창업주 일생이 곧 폐허가 된 조국의 재건이었으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역사이자 한강의 기적 그 자체임을 주입받으며 ‘회사이름+맨‘이 되어 내 몸에는 파란피가 흐르네를 자진해서 외칠 수 있는, 열정과 의지를 만발시킬 수 있는 신입 교육은커녕 실무에 투입되기 전, 초단기 사전 트레이닝도 없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묻는 순간 '나는 아는 거 하나 없는 천둥벌거숭이외다'를 귀 막고 소리치는, 일종의 자책골 같은 행위 었다.
사회에 나가 회사를 가면 신입사원 연수 교육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끝나면 사수가 여러분을 챙기며 사회생활에 적응하도록 돕게 될 것이라던 교수님의 말씀은 회사 웹사이트 하나 없는 초소기업의 신입사원이 된 내게는 우주의 진리처럼 먼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얼마간 이름 들어본 회사들의 공채에 응시했다. 부모의 학력과 재산 상황까지 써야 하는 개인 신상 정보와 자기소개서를 쓰느라 여러 밤을 지새웠다.
때로 서류가 통과되어 인적성시험을 보기도 했고, 필기시험도 보았으며 운 좋게 최종 면접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출근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내 수중의 돈은 중학생 과외를 해서 받는 30만 원이 전부였다.
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 시내까지 이동하는 차비조차 부담되던 내게 이름 들어본 회사의 공채에 도전하며 시간을 쓰는 것 자체가 과소비었다.
돈 한푼없이 명품관에 들어가 두리번대는 것과 다름없던 구직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려놓고 직무나 근무환경은 읽지도 않고 일단 지원부터 하고 보는 '묻지마 지원'을 하고 얼마 후 신사동에 있는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매우 부자인 대표님과 이사님은 모녀관계였고 독실한 신앙이 있던 분이었으나 신앙심은커녕 종교와 업무의 함수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하던 나는 3개월 수습기간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신앙심 부족을 이유로 해고됐다.
두 번째 직장은 근로계약서는커녕 최저임금도 지켜지지 않던 홍보대행사였다. 사무실의 대부분 공간이 잡지 화보 촬영에 협찬되는 옷들이 걸린 행거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내 주요 업무는 옷이나 신발을 협찬받으러 오는 잡지 기자님들을 상냥히 응대하고 협찬 갔던 옷을 회수해서 정리하는 일이었고, 한 달 중 얼마간의 기간은 협찬했던 옷들이 잡지에 얼마나 노출됐는지를 정리하고 이러한 홍보활동에 든 각종 비용을 정리해서 보고서로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보니 업무가 명료하지만, 실제로는 매일 코가 시커멓게 될 정도로 먼지를 먹고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일하는 중노동이었다.
가끔씩 보도자료를 쓸 기회가 주어졌는데, 처음 보도자료를 써서 선배에게 전달하니 심부름용으로 나를 부려먹던 선배가 그날 이후로 계속 보도자료와 카피를 써오라고 했다. 최소한 글을 쓸 때만큼은 담배심부름을 하지 않아도 됐다.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퇴근시간은 딱히 없던 그곳에서 일하며 새벽 3시에도 동부간선로 옆의 중랑천 공원에서 농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일했지만, 3개월 인턴기간이 끝나자 '더 같이 일 안 하기로 했어.'라는 말을 듣고 짐을 싸야 했다.
신앙의 벽을 넘지 못해 첫 직장에서 쫓겨난 후 자리 잡은 곳이라 잘해보겠다는 의지가 남달랐던 스물네 살의 겨울, 가장 빈털터리로 일하고 가장 추울 때 쫓겨났기 때문인지 지금도 겨울이 되면 우연이라기엔 참 슬프게도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1년 중 가장 우울하고 힘들다.
젊어서의 가난한 고생은 뼈에 각인되는 거다. 그래서 겨울마다 아프다.
3개월의 인턴기간, 회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바퀴벌레가 알을 까는 형상을 불시에 목격했다는 듯 멸시 그 자체의 눈빛이 쏟아져왔고 질책이라도 받을 때면 너 오늘 화장실 여러번 가더라는 말을 들었다.
그 후로도 상당한 시간을 3개월 미만 초단기 근무 기간 경력을 만들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자책감은 자괴감이 되고 분노가 되었다가 원망까지 더 해졌다. 수시로 해고되어 집에서 웅크리고 있노라면 아버지는 또 잘렸냐고 물었다.
사실 팩트를 지적한 것이나 나에겐 그 말이 비수가 아니라 도끼로 날아들었다. 애초 나의 부모님은 자식에 대한 위로나 격려를 배우지 못한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부모에게 받은 애정 없는 성장의 시간은 고스란히, 소망없이 만난 첫아이, 내게 전해졌다. 그것은 나의 원죄였고 저항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그 비싼 돈 들여가며, 그토록 가난하게 대학을 다녔는가 하는 회의감 속에서 불타는 숭례문을 보며 스물다섯을 맞이했고 그해의 1월부터 11월까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었다.
묻지마 지원 끝에 들어간 모든 회사에서 3개월 내 쫓겨나거나 도저히 더 근무할 수 없는, 예컨대 부모욕을 들었거나 억지로 술을 먹이거나, 성희롱을 당하는 등의 일들이 번호표 뽑고 기다렸다는 듯이 쉴 새 없이 일어났고 때마침 부모님의 부채도 갚아야 했다. 마지막 전재산이자 비상금이었던 적금을 찾던 날, 시청역에 있던 저축은행에서 혜화동까지 걸었다. 주머니에는 200만 원이 있었고, 울며 걷다 보니 찬바람에 눈물이 얼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진정한 의미의 빈털터리가 되어가던 중, 마케팅 대행사에서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두 차례의 면접이 이어졌다. 간절했다.
수없이 떨어진 입사지원서의 희망 직무에 늘 적던 '마케팅'을 하며 돈을 벌 기회였다. 드디어 나도 월급 100만 원을 받아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가슴이 뛰었다.
일주일 내 연락을 주겠다는 말에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잠들었다. 만약 입사가 안된다면 당장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지원할 생각이었다.
일주일이 되던 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지원하러 이력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기장판 위에 누워 꾸물대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입사 후 쓸 이메일 주소를 만들어야 하니 지금 당장 메일 아이디 하나를 알려달라는.
뭔가 근사한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 정도 순발력은 없어 영문 이름으로 이메일 주소를 부탁했다.
그렇게 2007년 8월 졸업 후 2008년 11월, 겨울을 코 앞에 두고서야 남녀화장실이 분리되어 있고, 난방되는 사무실에 직원들이 커피도 먹고 식사도 할 수 있는 탕비실이 갖춰진 곳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신입 연수는 없었지만, 눈빛이 낫같이 차갑던 실장님 (실제로는 사장) 입사 훈화 말씀 후 즉시 업무에 투입됐다.
그렇게 나는 마케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