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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Dec 13. 2023

의리가 아주 으리으리

나는 늘 장기연애를 했다.


피로 따위 무엇이냐며 말 그대로 싸질러 다니던 초반부를 지나 서서히 찬물과 더운물이 만나 딱 좋은 온도로 되어가는, 열정의 미직지근해짐이 좋았다.


뜨뜻미지근해진 애정의 온도로 반신욕도 하고 족욕도 하며 유유자적, 느긋해지려 할 때 즈음이면 나의 남자친구들은 둘레둘레 주위 여자들을 돌아보더니 아예 바다 건너 멀리 가버리기도 하고 손 뻗으면 잡힐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마음의 새 살림을 차렸다가 나의 발길질에 밥상이 뒤엎어지기도 하며 한때의 장밋빛 연애를 아사리판으로 만들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떤 과정을 거쳐 헛짓거리, 꼴값이라 부를만한 상태로 부패하는지를 똑똑히 여러 차례 목도하며 나는 나를 알았다. 나는 가슴 터지는 열정의 탱고가 아니라 슬렁슬렁, 때로 발도 밟고 키득거리느라 꽤나 시간이 흘러도 왕초보 왈츠반의 기초 스텝밖에 못 출지언정, 함께 손 붙들고 춤추는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편안함을 갈망했다. 상대가 나의 일부가 되어가다 결국 일체 되어가는 것에 매혹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곧 나였다. 이런 일체지향본능은 일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내 회사요, 내 브랜드였다. 그래서 순정을 바쳐, 진심을 다해 의리를 다하며 다짐했다.


널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지켜주겠노라고. 널 빛나게 해 주겠노라고.


하지만 의리라는 것은 나만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었다.


회사는 내게 부조리한 현실을 결연히 받아들이며 1명이 해낼 수 없는 과업들을 깃털처럼 가볍게 해 치워 내는 것으로 의리를 증명해 보이라 채근했다. 내 브랜드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 수없이 나를 분쇄하여 거름처럼 뿌려대는 과정은 일종의 유기농법이 되어 나의 꽃 피움으로 승화되리라는 세상물정 모르는 꿈을 꾸었다.


가장 비겁하고 의리 없는 존재들이 회사에 모여 계모임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하는 많은 시간 속에서 수없이 인류애를 상실하며 분노를 삭였다. 무릇 회사란 그런 이들로 채워지고 그런 이들이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기여했다고 생각할 때, 회사는 환승이별의 기회를 엿보거나 최대한 성과를 축소하여 연봉인상 최저선을 고민했고 무능력한 상사가 나를 착즙 하며 삽질 퍼레이드를 할 때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의리란 애초에 없는 것이었다.


그 으리으리한 의리 없음에 질려 공황에 빠졌고, 눈을 떠보니 깊은 늪 속에 침잠한 상태였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업계은퇴를 선언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먹고살 궁리를 했지만,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영어를 가르치고 작은 쇼핑몰을 운영하며, 낙향한 선비 같은 소박한 삶 속에서 안분지족 하였건만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했는가?


운명은 우습게도 또 나를 마케팅 세계로 끌어왔고 이 글 역시 사무실의 책상에서 쓰고 있다.


회사를 떠나고 나서야 알았다. 애초에 의리를 가장 지켜야 하는 것은 회사도, 애인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의리를 지킬 마음은 처음부터 없던 엄한 상대에게 연정을 품고 달려들었으니 실망과 회한에 사무쳐하던 것 역시도 우스운 일인 것.


내가 힘들고 괴로워할 때 가장 다독이고 위로하며 선물을 안겨주고 슬퍼지려 하기 전에 어서 술 한잔하고 털어내자며 얼싸안아주는, 내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일으켜 일단 한 술 뜨고 생각하자고 하는 존재는 결국 나였다.


꽤 긴 시간 나는 나를 방치했고 학대했으며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안의 있던 또 하나의 나는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언제든 돌아오라고, 한숨 자고 가라고.


꼼꼼하지 못하고, 좀 모른척해도 될 것들을 지나치지 못해 꼭 한 소리 먼저 질렀다가 미운털만 박히는, 융통성 없고 원칙을 중시하며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 그토록 자신을 박대했음에도 내 안의 웅크리고 있던 나의 의리 덕에 결국은 또 뭔가를 하고, 살아내며, 그렇게 인생이 흐르고 있었다.


처절하도록 혼자가 되고서야 알았다. 진정한 일체감은 나를 안아주는 자신과 이미 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를 지켜주는 진정한 의리는 내 안에 있음을.


나에 대한 의리로, 오늘은 저녁밥을 지어먹겠다. 비타민C도 먹겠다. 그리고 일찍 자겠다.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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