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어른이란 다 커서 자라지 않는 사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어리니까 어린이, 그들은 나이 든 이.
나이를 먹어가고, 천둥벌거숭이로 내던져져 벌어먹고 살기에 숨차 오르던 20대와 30대를 거쳐오며 멋지고, 배우고 싶고, 존경심이 피어나는 나이 든 이를 만나지 못했다. 어른이 그저 몸과 마음의 노화로 인해 거저 얻어지는 위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어른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1.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2.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3. 결혼을 한 사람.
일단 어른의 의미는 3가지, 그중 내가 알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정의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국어사전을 찾기 전까지 어른의 의미가 존경할만한 나이 든 사람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국어사전이 내려준 정확한 의미는 단순하고 명쾌했다. 존경까지 갈 것도 없이 일단 자기 일에 책임만 져도 어른인 것이다.
존경은 무슨, 바라지도 않는다 이거다.
마케팅 이사였지만 마케팅에 대해 일자무식이면서 되지도 않는 일만 벌이며 책임은 지지 않던 전 직장의 소시오패스 상사는 어른이 아니었다.
나만 사랑한다더니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여자의 '우린 지금 사랑하는 사이' 따위의 연락을 받게 한 전 남자친구도 어른이 아니었다.
사회에 나와 만난 대부분의 나이 든 사람들은 자기 일에 책임을 지지 않았는데, 그럼 대체 어른은 어디에 있는가?
다산콜센터에 전화해야 할까?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세상에 이런 일이 팀에 '혹시 어른 찾기 특집을 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하고 문의해야 할까?
대체 어른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내 인생에 어른은 정말 없었는가를 복기하기 위해 기억의 외장하드를 뒤져본다.
벌써 2년도 훌쩍 지난 그때.
걸어 다니며 토사물을 쏟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우울증 증세는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마지막 회사에서의 거의 끝무렵.
휴직이란 내 계획이나 의사에 전혀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손톱 끝까지 우울증이 뱉어내는 악취가 흘러나올 지경이 되면서 눈은 더 이상 글을 읽지 못했고 입에서는 소리가 내지 않았다. 목소리가 거세된 듯, 억지로 온 힘을 다해 쥐어 짜야만 겨우 의사 표현이 가능한 정도였다.
그 상태로는 더 이상 보스가 꽃피우는데 기여하는 화분받침이 될 수가 없었다. 보스의 쓰레기 분리수거 작전이 시작됐다.
내가 만든 보고자료를 팀원들 앞에서 피티 시키며 팀원들에게 평가와 더불어 보고서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라고 하거나, 회사 공식 웹사이트를 새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며 웹에이전시에서 받아온 시안과 구성을 CEO 보고한 후 만족스러운 피드백이 나오지 않자, 내가 그 어떤 컨펌 과정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리해 만든, 또라이가 헛짓거리 하며 만든 사고로 둔갑시켰다. 이미 나는 반박이나 항거의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산 송장에 가까운 상태였다.
천둥벌거숭이로 들어온 사회에서 14년이 지나 천덕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휴직을 했고 나는 칩거했다.
어른은 없었다.
다 커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이는 없었다. 항상 내가 하는 일들에 부여된 책임보다 더 큰 책임을 스스로 지어가며 일하고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보니 주위의 사람들이 그 어떤 미안함이나 죄책감도 없이 깔깔거리며 내 등에 책임을 더 얹고 있었다.
나의 어깨에 내려앉은 책임들이 언젠가 인정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지만, 실제 돌아온 것은 비정이었다. 내가 가장 약해졌을 때, 가장 먼저 내친 사람들은 바로 내 등에 책임을 얹던 사람들이었다. 살며 마주한 수많은 나이 든 사람, 나를 흡혈하여 복부비만이 되었던 그들. 그들의 기름진 비겁함.
칩거했던 꽤 긴 기간 동안 매우 분노하며 때로 길길이 날뛰기도 하고 때로 부들거리며 울기도 했고 그러다 지쳐 숨만 가쁘게 몰아쉬며 술에 의지해 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시간은 갔고, 또 삶은 이어졌고 밥은 들어갔다. 먹고살기의 그 고단함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다시는 노동임금을 받아 살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고 10년 전보다도 낮은 임금이었지만 일단 내 손으로 다시 돈 벌 수 있음에 기뻐하며 시작했다.
제안한 이는 업계의 큰 선배님. 존경심과 부러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우러러보던 분이었다. 급여는 작고, 휴가는 주어져도 쓸 수 없는, 일하는 사람은 오직 나 한 명인 작다 못해 미세한 스타트업이었다. 다시는 분골쇄신 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역시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 것. 노예가 또 주인같이 일했다.
코로나에 걸려 발바닥까지 아파 서있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이불을 뒤집어쓴 채 인스타에 피드를 올리고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었다.
4년 만에 떠난 여름휴가도 노트북을 안고 떠나야 했다. 그렇게 또 선 넘게 일하던 내게, 더 이상 무리하고 싶지 않다는 경종을 울린 것은 '왜 제품을 사서 쓰지 않는가? 좋아는 하는가? 열정이 없다.'는, 직업의 자존감을 가차 없이 할퀴는 선을 제대로 넘는 한마디의 말이었다.
그렇게 난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퇴직금이 정산되었다.
그런데 연차수당이 빠져있었다.
연차수당이 지급되지 않은 사유는 다음과 같다.
1. 코로나로 아파서 쉬었음
2. 재택근무를 병행했으니 휴가가 없는 것으로 협의되었음.
내가 협의한 것은 원래 받던 연봉보다 반 이상 줄어든 작은 연봉에도 일하겠다는 것이었지, 받아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차감이나 유명무실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게 기회를 준 어른이라고, 일을 하며 알게 된 작은 인연이었지만 우울증에 잠식당해 그저 누워있던 나를 마케터 팔자로 다시 살게 해 준, 업계 선배로서의 책임을 다해준 분이라 믿었기에 그토록 결심했던, 하지 않겠다던, 분골쇄신 업무태도를 다시 끄집어내며 일했지만 이별의 민낯은 이러하다.
연차수당 없는 퇴직금을 정산받고 하루 정도 큰 분노가 일었고, 그 후로는 나를 이용해 먹은 그분과의 인연이 이토록 짧은 유효기간이라는 것에 씁쓸했다.
내가 못 받은 연차수당은 약 100만 원 남짓. 밖에서는 존경받는 교수님이자 백화점의 VVIP였고, 한 끼 식사에 100만 원은 쉬운 사람이더라도 아까운 것은 있는 법이었다.
그 헛헛한 마음을 긴 메시지로 적어 보냈다. 이런 대우를 내가 수긍하여 받아들여서 더 이상 문제제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정도밖에 생각 못하는 분이라 내가 내려놓겠다며, 이런 대우로 당신의 자녀가 일한다면 어떻겠느냐는 마무리의 메시지. 그 탓이었을까?
며칠이 지나 내 자리에 새로 들어온, 후임자를 통해 연락이 왔다.
연차수당 원래 주려고 하셨었대요.
개인적으로 주려고 하셨답니다.
연락 달라고 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주는 연차수당이라니, 회사생활 십수년만에 처음 들어보는 생경한 산뜻함이 밀려온다.
그분에게는 푼돈, 하지만 내게는 큰돈인 100만 원. 하지만 눈물처럼 차오른 이 감정은 오로지 돈의 크기만큼의 분노가 아니었다. 분노의 행간 사이에 낀 착취당한 자의 서러움, 이용당할 때는 모르고 지나서야 인지한 비참함을 전혀 읽지 못한, 내가 어른이라 믿던 그분은 나의 마지막 메시지를 가난한 사람의 배고픈 따져 물음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나의 순수가 폄훼된 여러 번의 지난 경험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감정의 파고가 밀려들었다.
그렇다. 나는 어른 멸종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어른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삶이 아무렇지 않게 계속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