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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Nov 07. 2023

절반연봉 절반고통 - 무리하지 않는 삶

월급날 기분

대학생 시절 매년 1학기 시작 시기에 과사무실에서 나누어주던 학생수첩이 4개 있다.


매 학년마다 썼던 학생수첩은 손바닥만한 크기었는데, 꼭 보관하려 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애착인형처럼 내게 남아 지금도 집의 벽장 속에서 종종 모아둔 쇼핑백이나 부직포 청소포 등을 꺼내려할 때 불시에 앞 구르기 하듯 나타나 처절히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을 환기해 준다.


대학생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갈 수 있는 나의 '시간 이동 벽'은 학생수첩이다.


대학교 2학년 학생수첩의 첫 장에 '통장에 100만 원 찍어보기'가 적혀있다.


100만 원, 그 시기에 내게 얼마나 큰돈이라 느껴졌기에 500만 원도 아니고 1000만 원도 아닌 100만 원을 적었을까?


지금 내게 100만 원은 여전히 크지만, 그것으로는 살 수 없다.


일단 매달 갚아야 하는 대출비가 100만 원을 훌쩍 뛰어넘고 각종 보험과 공과금에 생활비를 더 하면 저것의 두 배는 이미 초과다.


대학생 시절 그토록 간절했던 100만 원은 학창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읽었던 수필 속, 은전 한 닢 한번 소유하고 싶다며 구걸하던 누군가의 절절함과 같은 것.


나의 은전 한 닢이던 100만 원은 더 이상 최저생계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학생시절의 은전 한 닢은 100만 원이었고, 첫 직장의 월급은 70만 원이었으니 내게 100만 원의 세계란 저 멀리 은하계와 같은 것이었다. 과연 내가 저곳에 입성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던 지지리 가난했던 20대.


100만 원의 세계에 입성한 것은 몇 차례의 부당해고를 경험한,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빚을 갚고 보험과 각종 공과금, 자잘한 필수생활비를 제하고 나면 내 손에는 20만 원이 남았다.


그 20만 원으로 차비와 점심, 용돈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늘 도시락을 쌌다. 밖에 나가 동료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는 것은 꿈꿀 수 없었다. 점심값도 문제였지만 식사 후 커피 한잔 할 그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저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 집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강력하게 포지셔닝했다.


딱 100만 원이던 월급은 기쁨이 없었다. 갈 곳 찾아 월급이 알아서 빠져나간 후, 20만 원이 덩그러니 남은 통장을 보면 너무나도 회사가 가기 싫어져 매일밤이면 내일 아침 출근길에 가벼운 교통사고라도 났으면 하고 바라곤 했다. 내일 아침 눈뜨면 갑자기 공주가 되어 천지개벽한 삶을 살 수 있길,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진심으로 소원했었다.


부모님 부채를 갚는 것이 끝나고, 시간이 흘러 경력이라는 것이 생기며 정신 차려보니 첫 월급의 몇 배가 되는 월급이 되어 있었다.


200만 원의 세상, 300만 원의 세상이 궁금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월급이 들어와도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 왔구나.


맨날 보는 식구의 저녁 귀가처럼 으레 당연한, 눈짓도 흘깃 정도에 불과한 그것이었다.


그런 무덤덤함을 만나기까지, 치사하고 더럽고 자존심 상하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8000번 정도 억누른 대가가 숫자로 환원된 것이 월급이었다.


새벽반 영어학원을 다니고 퇴근 후 전화영어 수업, 주말에는 영어과외를 받으며 키운 영어 실력으로 연봉을 올릴 수 있었고, 구몬일어 학습지로 뗀 히라가나에 전화일본어로 들입다 외우기 방식으로 일본어를 익혔다.


기술도 배경도 없는 내가 할 수 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은 외국어 밖에 없었다. 그 사이 부당 해고도 있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에 배제되거나 해외 출장 대상자에 오르지 못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쫓아가 뜨거운 물을 바가지채 부어버리고 싶었지만, 꾹꾹 터져 나오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영혼 없되 그렇게 보이지 않는 미소를 건네며 견딘 대가였다.


내 마지막 급여는 사립대 한 학기 등록금을 내고도 남을, 10년가량의 직장생활을 해 온 월급쟁이라면 눈 커질 액수였다.


그토록 염원했던 그 숫자의 세계에 왔지만, 기쁘지 않았다.


그런 무기쁨을 몇 차례 느끼고 정신을 차려보니 대학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였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컴컴하게 커튼을 드리운 집에 누워 흐느끼고 있었다.


해저 시추사업을 하듯 암흑에 있던 상당 기간을 거쳐, 다시 햇살을 보고 세상에 나왔지만 하루 건너 하루 침잠하지 않으면 숨 막힘에 괴로워했다.


지하철에서도 시선을 책에 고정하지 않으면 어지러웠고, 반듯한 책상이 일렬로 놓인 사무실을 지나가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먹고살이 방법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운 좋게 절반의 연봉, 절반의 출근 조건으로 다시 월급쟁이가 되었다.


10년 전의 월급보다도 적은 액수가 매달 통장에 찍힌다.


하지만 기다려진다.


월급날이 다가오면 이번에는 무슨 맛있는 것을 사 먹을지 생각한다.


샤브샤브 먹을까, 장어구이를 먹을까.


월급은 절반이 되었고, 숨 막힘의 고통도 절반이 되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월급날 기분을 되찾았다. 월급날에 설레기까지 참 많은 길을 맨몸으로 자갈밭 구르듯 돌아왔다.


그렇게 생긴 수없이 많은 생채기들은 여전히 남았지만, 자잘한 회복탄력성의 근육이 되어 이제 어지간한 것에는 노하지 않고 시간이라는 강에 분노를 띄워 노를 저어 보내는 마음의 조정 경기로 나를 다독인다.


이번달 월급날에는 맛있는 중국집 가서 유산슬에 차가운 청하 한잔을 먹어야겠다.


기다려진다. 25일이여 어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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