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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Feb 09. 2024

설날 즈음에 깨닫는 확실한 퇴사의 기쁨

‘즐거운 명절 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4대 보험 미가입자가 되었음에도 아직 재야의 1인이 된 것을 모르는 소수의 분으로부터 올해도 어김없이 이 메시지를 받았다.


복붙 메시지의 전형인 이 인사말은 마치 이메일 마침 부분에 쓰는 Best regards 내지는 Thank you 수준으로 형식적이지만 어쨌든 시간을 들여 인맥관리 차원의 한 대상으로 관리하시는 근면함에 cheers!


앞으로 더 소수가 되거나 또는 아예 오지 않을, 그 옛날 ‘기체후일향만강하시옵니까?‘로 시작되는 연하장처럼 아스라이 사라질 설 메시지에 간단히 감정 이모티콘으로 심플하게 답하고자 하니, 하트는 좀 투머치.


체크 표시는 시건방져 보여서 엄지 척 표시를 남길까 했으나 아무래도 좀 성의 없어 보여 결국은 상대가 기대도 하지 않을,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쓴 화답을 보냈다.


거기에 또다시 답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답을 안 오게 됨을 넘어 이런 겉치레 인사가 완전히 종결되는 마법의 한 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 저는 퇴사했어요 ‘


이렇게 또 한 번 기간제 인연 굿바이.


명절이 되면 직속상사부터 임원, 대표이사에 이르기까지 복붙 티 날까 싶어 호칭마다 맞춤 형용사를 넣어 메시지를 보냈었다.


답이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했는데 답이 오고 안 오고를 떠나서 일단 보내놓으기만 하면 업무 하나 처리한 느낌이었다.


덧붙여, 아무리 동료일지언정 명절 메시지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보냈다면 뭐라고 보냈는지 묻지 않는 것은 암묵적인 룰.


누가 누가 더 강력한 용비어천가를 써 보냈는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혈투와 같은 것이 명절 전날의 직장인 풍경 중 하나이다.


이거 꽤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진심과 진실이 없는 사탕발림 복붙 메시지라도 싫어하는 어르신 없더라.


십 년 넘게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심정으로 영혼 없는 감사와 찬사의 메시지를 꼬박꼬박 보냈지만, 퇴사를 하는 순간 무영혼 메시지 전송 업무와도 굿바이다.


퇴사란 진심 없는 행위에 대한 의무감에서 해방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또 진심을 다해야 하는 존재나 행위에 대해서도 환기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강아지와 가장 자주 산책을 했고, 엄마와 첫 여행을 떠났던 때는 모두 실업의 시기 었다.


퇴사에는 많은 단점이 있다. 일단 가난해진다.


건강보험 지역가입자가 된 후 얼마가 나올지 몰라 걱정해야 하고, 앞으로 뭘 하며 먹고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치솟는 실업률, 빚폭탄 영끌족 등이 뉴스에 나오면 어찌 살려하느냐는 부모님 전화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지시는 없되 보이지 않는 손이 등 떠미는 명절 메시지 전송에서의 해방과 쌍벽을 이루는 장점이 있다.


하기 싫은 좋은 말 안 해도 되고, 왜 태어났나 싶은 상사 생일상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며, 스트레스와 우울, 번아웃의 근원인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안 봐도 된다는 것이다.


결국 퇴사의 장점은 싫은 것들과의 완벽한 결별이 되겠다.


머지않아 또다시 싫어도 하는 삶을 살며 밥벌이를 하게 되겠지만, 일단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만 하며 안분지족 하고 무사안일한 호연지기를 펼쳐보리라.


청빈하게 낙도 하는 완벽한 한량이 되겠다.


BGM : 이승환 ‘원더풀 데이‘


https://youtu.be/CmIz-aLZjkk?si=85ZwSVgwM0VhWM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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