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와이프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읽고 있는 내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된 이 책은 꽤 유명한 서양 고전이지만, 경영학이 전공인 그녀에겐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사실 그녀의 질문의 포인트는 '이런 책'이 아니라 '어떻게'였다. 책 이름도 생소하지만 어떤 경위로 업무나 재미와는 무관한 책을 읽게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매우 단순했다.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의 '모든 것은 빛난다'에서 언급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훌륭한 인간의 삶이란 경이로움과 관조를 통해 신과의 동조(sync)를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예로 들었다. 이 비극 3부작의 주인공인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아가멤논)를 살해한 어머니(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 복수한 뒤 에리니에스(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된다. 쫓기던 오레스테스는 아폴로의 조언을 받아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재판을 받는데, 배심원의 평결이 5:5로 팽팽한 가운데 캐스팅보트를 지닌 재판장인 아테나 여신이 무죄를 선언한다. 이에 복수의 여신들은 분노하나, 아테나 여신은 남편이자 아버지를 살해한 죄와 어머니를 살해한 죄의 경중을 따지면서 새로운 피를 요구하기보다는 복수의 순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며 이들 여신들에게 자비를 요청했고, 이에 감동한 복수의 여신들은 놀랍게도 자비의 여신으로 변모했다. 자비의 여신들은 나아가 오레스테스와 모든 시민들에게 축복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갈등 봉합 방식이야말로 신과의 동조(sync)인 것이다.
군 복무 시절 일본 영화 'Love Letter'를 본 후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차창 넘어 멀리 보이는 산만 봐도 자동적으로 '오겡끼데스까'를 웅얼거렸던 나는 작가의 설명에서 Love Letter의, 그리고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비슷한 느낌의 이 그리스 비극 3부작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결국은 그게 다인 것이다. 게다가 취미랄 게 책 읽기 외에 별로 없는 인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람쥐 도토리 겨울 양식 모으듯 나의 독서 backlog에 쌓게 된 것이다.
최근 김웅의 '검사내전'을 읽었다. '미스 함무라비'에 다소 실망해 비슷한 종류의 책에 손이 잘 가지 않던 차에 마침 추-윤 갈등의 속살을 좀 들여다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집어 든 책이었다. 그런데 전문작가에 버금가는 예상외로 화려한 문체와 저자의 아웃사이더 기질마저 나와 잘 맞아떨어져 재밌게 읽던 참에 눈에 반짝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버크민스터 풀러가 말했듯이 전문화는 인간의 다양한 범위를 조율하고 검색하는 능력을 차단하고 일반 원리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전문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실상 더 이상 전문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다양성과 원리를 발견하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버크민스터 풀러가 누구길래 이렇게 내 마음을 후련하게 해 주는 말을 했단 말인가. (아마도 최근에 직장에서 벼멸구처럼 들끓었던 '전문가' 논쟁에 피가 빨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시 웹 검색을 실시했다. 김웅 저자는 버크민스터 풀러의 '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란 책을 읽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책 제목도 흥미를 불러일으켜, 나는 이를 즉시 독서 backlog에 올려두었다.
이와 같이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설명을 해줬더니, 와이프 또한 본인이 음악을 찾아 듣는 방법도 그러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이가 듦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는 조금씩 사그라들지만, 익숙한 곳에 한쪽 다리를 걸쳐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것에 노크를 해 보는 것은 끊을 수 없는 취미이자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