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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상 바오로 Sep 17. 2021

좋은 이웃

책 읽는 이웃

그들은 나보다는 연상이나 나의 부모님보다는 연하로 보이는 부부 여행객이었다. 아내는 비행기 복도에 선 채로 탑승하는 이들을 살폈고, 남편은 복도석에 불편하게 걸터앉아 마찬가지로 앞쪽을 바라보며 탑승하는 이들을 살폈다. 이들은 창가석에 앉을 이를 배려하여, 혹은 앉았다 다시 일어나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미리부터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내가 도착하여 창가석에 앉자, 그제야 그들도 착석했다. 배려심이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던 참에 이들의 손에 들린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좋은 이웃(=책 읽는 이웃) 덕에 이번 여행이 매우 편안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초기 설렘은 옆자리에 앉는 이가 누구인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비행기 이코노미석과 같이 꼼짝달싹할 수 없는 구조이거나, 이동시간이 긴 경우 더욱 그러하다. 거구의 몸을 좁은 좌석에 구겨 넣느라 쉴새없이 땀을 흘릴 뿐 아니라 진득한 기침마저 해대는 아저씨(아줌마)는, 어쩌겠냐만, 분명 기피대상 1호일 것이다. 반면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말쑥한 차림의 아가씨나, 근사하게 차려입은 깔끔한 이미지의 청년을 동승인으로 맞이한다면 로또 당첨된 것과 같은 기분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인생 최고 동승객은 방학을 맞아 마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만난 미모의 여학생이었다. 나는 소위 명문대 2학년생, 그녀는 명문대라고 하기엔 좀 그런 학교의 신입생. 이쯤 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 마농 레스코(Manon Lescaux)와 슈발리에 데 그리외(Chevalier des Grieux)의 운명적인 만남.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을 '귤 하나 드실래요?'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해서 마산역에 도착할 즈음엔 이틀 뒤 돝섬으로 가는 여객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아저씨가 된 내가 그런 낭만을 다시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현실에서 바랄 수 있는 가장 좋은 이웃은 이들 부부와 같은 책 읽는 이웃이다.

 

이들 부부는 착석하자마자 익숙한 자세로 머리 위 독서등부터 켰다. 이는 비행기가 주기장을 벗어나서 활주로에 접어들면 실내등을 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며, 이후 발생하는 동체의 흔들림 따위로 독서를 방해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이들은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급가속을 할 때도, 바퀴가 지면을 이탈할 무렵 일시적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때도, 그리고 비를 머금은 구름을 뚫고 상승할 때 창문에 맺히는 물방울로 인하여 탑승객 모두가 비닐하우스의 애호박처럼 보이는 상황이 펼쳐져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류 변화가 심할 때마저 옴마야~ 하는 신음소리를 가늘게 흘릴지언정 책을 덮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보다는 늦게, 그러니까 비행기가 어느 정도 고도를 올리고 선회비행을 마친 후 목적지를 향해 분명한 방향을 잡고 나서야 책을 꺼내 들었다. 내가 꺼내 든 책은 안톤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 실제로 지루한 내용의 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책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간간이 고개를 들어 이웃을 살폈다. 아내는 책을 읽는 내내 잠깐씩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흐음, 이건 분명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발견했을 때 하는 행동이야. 곁눈질로 무슨 책인지 살펴보니, 복음 말씀이 한가득 적혀있었다. 복음 해설서가 틀림이 없군. 좀 더 멀리 앉아있는 남편은 책에 코를 박고 비행시간 내내 거의 머리를 들지 않았다. 흐음, 엄청 재밌는 책인가 본데? 그는 착륙하고 나서야 기지개를 켜며 책을 덮었는데, 그때 재빨리 훔쳐보니 「왕좌의 게임 1」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한편, 비행기가 순항 모드에 접어들었을 때, 세 명이 동시에 책장을 넘기는 일이 발생했다. 책 한 장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5분, 책장을 넘기는데 걸리는 시간을 1초라고 보면, 세 명이 동시에 책장을 넘길 확률은 (1/300) × (1/300) × (1/300)이다. 이건 분명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다! ‘샤락~’ 하는 소리가 공명음이 되어 좌석과 좌석 사이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생각보다 커 우리 모두는 잠시 독서를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들을 비행기를 탈 때와 마찬가지로 내릴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거듭 주위를 살피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분명 오늘 로또에 당첨된 것이다. 그들도 나에 대해 그렇게 느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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