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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상 바오로 Oct 01. 2021

출판번역가로 먹고살기/김명철

고맙습니다

'내가 쓴 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른번역' 대표이기도 한 저자의 출판번역에 대한 철학과 노하우는 내가 팀원들에게 강조하는 것들과 매우 유사했다. 는 영어능력을 강조하지 않았다. (사실 영어능력은 번역가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격일 뿐이다. 영어능력을 강조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영어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영어 자체만 놓고 보면 저자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야 수없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 논리적인 사고방식, 꾸준함, 책임감 등 어찌 보면 교과서적인 덕목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한편, 제4장 '출판번역의 실전 노하우'는 영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전치사의 활용, 명사 중심의 문장 구조 등 저자가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번역 아카데미에서 가르칠만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제3장 '출판번역가로 먹고사는 노하우'는 번역가의 삶을 가볍게 스케치하고 있었다.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다만 이 자부심은 어떤 분야의 대가에게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자부심은 아니었다. (그는 김훈과 같은 문장을 쓸 수 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의 자부심은 이를테면 프로 운동선수의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프로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자부심은 이를테면 좋은 물건을 기일에 맞춰 납품하는 공장장의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그런 공장장은 타인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전문분야를 논외로 한다면 이 책은 자기개발서의 범주로 넣어도 좋을 만큼, 어찌 보면 일 잘하는 직원의 노하우 백서로 읽히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 자기개발서를 많이 번역했다고 밝혔는데, 아마도 이미 반쯤 자기개발 전문가임에 틀림없는 그의 전문성이 자연스럽게 책에 밴 것이리라.  


나 또한 작가와 마찬가지로 매일 영어와 씨름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잘 느낄 수 있었다.) 내 업무 영어로 작성된 자료를 읽고, 중요한 내용을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여 경영진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그 시상면은 시간을 들여 벼린 한 자루의 보고서와 같다. 그러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영어능력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필수적이라는 것이 업무의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영어보다 중요한 것은 금융 논리이기 때문이다.


금융 논리가 탄탄하지 않은 직원의 보고서를 읽으면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하나는 검토 배경, 검토 내용, 그리고 검토 결과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방대한 영어자료를 읽는데 급급해 여과되지 않은 수많은 정보를 보고서에 억지로 욱여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보고서에 영어 표현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 주석이 많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전문가로 포장하는 (그러나 들키기 쉬운) 장치일 뿐이다. 나는 특수용어(예컨대, DSRA*)를 제외하고는 영어를 한글로 적절하게 바꿔 표현하지 못하는 직원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이라고 믿는다.


* Debt Service Reserve Account의 약자로 번역하면 '대출원리금상환예비계좌' 쯤 되는데, 이건 너무 길다. 그리고 우리 회사에 다니면 DSRA 정도는 알아야 한다.  


이처럼 일반 회사에서 단위 조직의 업무성과는 최종적으로 한 장의 보고서로 압축된다고 볼 수 있다. 하여 팀장으로서 중요한 나의 임무 중 하나는 얼른 직원들을 업무에 익숙하게 만들어 제대로 보고서를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내가 죽어나기 때문이다. 나우리 팀에 새로 배정받는 직원들에게 영어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다만, 영어가 주 언어로 기능하는 우리 팀의 업무방식에 빨리 익숙해지라고 조언한다. 보고서는 논리적이어야 하며, 상대방과의 협상은 더욱 논리적이어야 한다. 논리적이라는 것은 매 문장이 '왜냐하면'으로 뒷받침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 업무의 부가가치는 상대방과의 논리 공방에서 창출되기 때문이다 등등.


나 대신 잔소리를 해 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졌다.




불현듯 나 또한 출판번역가가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업무 관련 서적 두 권을 번역한 경험도 있다.) 그는 제1장, '출판번역가, 어떤 사람이 적합할까?'에서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의 리트머스지 테스트를 제시했다.


1. 글 읽는 걸 좋아해야 한다 - OK. 나는 그야말로 책을 끼고 사는 사람이다.

2. 논리적인 사고에 익숙해야 한다 - OK. 이건 내가 팀장 달고 나서 매일 부르짖는 얘기다.

3. 글쓰기를 좋아해야 한다 - OK. 지금도 쓰고 있다. 최근 브런치 작가 타이틀도 달았다.

4.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 - OK. 나 배 안 나왔다.

5. 불안정한 수입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 OK. 와이프가 일한다.


'선배에게 1' 글에서 썼지만, 나는 최근 모 선배에게 이력서 한 번 써 보시라는 시건방진 조언을 한 적이 있다. 선배는 참을성 있게 내 얘기를 들어줬지만, 나는 이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 너는 써 본 적 있느냐고 물어볼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국제기구나 외국계 금융기관에 제출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영어로 작성해 놓은 건 있지만, 실제로 제출하진 못했다. 그만큼 나는 우리 회사에 익숙해져 있다.)


해서... 이 참에 출판번역가 이력서를 한 번 작성해 ? 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이력서 또한 색다른 글쓰기의 하나라고 느껴지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땡큐, 블로그. 땡큐,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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