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금융공기업 프로젝트 금융본부에 배치받는 직원들은 세 권의 프로젝트 파이낸스 책을 읽도록 권유받는다. 한 권은 E.R.Yescombe가 쓴 「Principles of Project Finance」, 또 한 권은 John Dewar가 편저자인 「International Project Finance」,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은 이 책이다. 물론 빠른 시간 내 프로젝트 파이낸스의 뼈대를 훑어보기 위해「프로젝트 파이낸스 원리와 응용」(서극교 저), 「국제 프로젝트 파이낸스」(배인성 저)를 활용하기도 한다.
많은 직원들이 용기 내어 책 읽기에 도전하지만, 현업에 투입되어 쏟아지는 자료를 읽고 처리하는 동시에 실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두꺼운 영어책을 철저하게 읽어내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또한 직원들에게 프로젝트 파이낸스는 이론적으로 접근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당장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책은 결코 실무경험의 대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업주, 변호사, 엔지니어, 기술·환경 자문사 그리고 정부 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당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금융 전문가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렇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수록, 그리고 당장의 업무처리로 인하여 허덕거리지 않는 여유가 생길수록 밥벌이로 하고 있는 업무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프로젝트 파이낸스의 속성들이 금융의 기초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총인 AK47을 개발한 칼라슈니코프가 종종 언급한 게오르그 슈파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복잡한 건 쉽다. 단순한 게 어렵다.” 그래서 역자는 가끔 후배들에게 농담 삼아 “프로젝트 파이낸스 전문가가 되는 건 쉽다. 여신전문가가 되는 게 어렵다”라고 얘기하곤 한다.
H금융공기업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스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분들은 분명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숙명인 순환근무, 그리고 변화하는 금융환경으로 인하여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는 시스템은 한계를 예고하고 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고, 이 책의 번역 작업은 그러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금융기관 출신인 Yescombe의 책은 프로젝트 파이낸스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으로, 구체적인 수치를 활용하여 프로젝트 파이낸스에서 쓰이는 주요 개념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Dewar의 책은 프로젝트 파이낸스의 다양한 측면에 대하여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논의를 펼쳐낸 책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현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Vinter 변호사가 쓴 책이다. 이 책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개별 주제에 대하여 심도 있는 법률적 배경, 그리고 반드시 법률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만은 않는 금융시장의 현실에 대하여 저자만의 견해를 풀어내고 있다. Dewar의 책과는 다르게 동일 저자의 관점이 책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중간중간 책을 덮고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종국에 이해하게 되면, 무릎을 치며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교과서”보다는 “소설”이나 “회고록”의 느낌도 든다) 다른 책이 아니라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이다.
한편, 이 책을 쉬운 책이 아니다. 프로젝트 파이낸스를 처음 경험하는 이에게는 낯선 개념들이 즐비하다. 예컨대 우리나라 법률체계에서는 생소한 qualifying floating charge나 receiver와 같은 용어들이 예고 없이 등장하며, 북해 유전개발이나 RAB 등 영국의 사례나 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필요한 경우 역주를 달아 독자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도록 노력하였으나,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역자 스스로가 경영학이나 법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전문번역가도 아니기 때문에 번역이 매끄럽지 않고 오역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유수의 영국 법률법인 한국사무소 대표인 L 변호사님의 감수를 거쳐 오역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노력하였다. 프로젝트 파이낸스 실무를 담당하다 보면 변호사들에게 시간이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귀중한 시간을 내어 준 L 변호사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책을 번역할 수 있었던 지식은 H금융공기업에서 근무하면서 얻은 것이다. 전문적인 서적이니만큼 대중에게 읽히지는 않겠지만, 혹여 책 판매 수익이 생긴다면 이는 H금융공기업과 유관기관의 프로젝트 파이낸스 업무 발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쇄비도 못 건질 것을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 번역이 보다 많은 후배들이 프로젝트 파이낸스 업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두어 달 전에 「Project Finance: A Legal Guide, 4th ed」(Graham Vinter, Gareth Price, David Lee / Sweet & Maxwell) 번역출판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구조는 내가 한국 출판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한국 출판사는 저작권을 가진 영국의 Reuter와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한국 출판사는 이미 저자로부터 허가도 받았고, 영국 출판사인 Sweet & Maxwell으로부터 동의도 얻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Reuter가 번역출판 사업은 중단하겠다는 내부 방침을 정했다고 알려왔다. 한국 출판사 편집장은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면서 황당해했다.
아,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람. 일단 Reuter에 직접 항의서한을 보내고, 저자에게 연락도 해 봐야겠다. 이래 봬도 내가 저자랑 안면도 있는 사이인데... 물론 제대로 된 답변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세상사에 갑을관계가 엄연하니 말이다. 아무래도 약삭빠른 Reuter가 돈이 되지 않을 곳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꿔먹은 게 아닐까?
그나저나 번역은 다 해놓았는데 이를 어쩌나. 무공비급처럼 수제자의 등짝에 새겨야 하나. 번역출판 계약을 체결한 한국 출판사의 편집장도 마음이 쓰였는지 괜히 미안해하는 목소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돈 굳었으니 좋아해야 할까? 어차피 전문작가/번역가가 아닌 이상 자비출판이란 꽤나 비싼 '취미활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