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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상 바오로 May 01. 2023

바보들의 나라, 켈름/아이작 싱어

글 쓰는 방법

김애란은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비슷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에 대한 누군가의 질문에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답했다. 지난밤 흙냄새를 가득 피워 올리며 흩뿌리던 봄비를 몸속으로 거둬들인 벛나무가 한낮의 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고 고개를 졎혀 하늘을 우러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한지에 떨어뜨린 잉크처럼 4월의 푸른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면 온몸의 수많은 봉오리는 그야말로 아우성을 칠 것이다. 소금을 한 꼬집 넣은 버터에 달달 볶아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하는 옥수수알을 품은 냄비의 심정일 것이다. 글은 쓰려고 노력한다 해서 써지는 것이 아니다. 프로 커리어 첫 홈런을 친 롯데 안권수에 대한 평에서 이강철 해설위원도 "홈런이나 삼진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투수가 던진 공의 궤적을 면밀히 추적하는 과정에서 공이 배트의 스위트 스폿에 맞으면 그게 홈런이 되는 것이고, 타자의 타격 자세를 무너뜨리는 볼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게 삼진이 되는 것이다. 홈런 스윙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삼진 피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글은 농밀한 생각이 문장을 통해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된 패션일 뿐이다.


내 글은 (일탈을 꿈꾸지만, 결국 제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정장 또는 비즈니스 캐주얼에 가깝다. 그리고 글을 쓸 때에는 거의 항상 책에서 영감을 받는다. 얼마 전 함께 출장을 다녀온 엔지니어 한 분이 "팀장님은 책 많이 읽으시죠?"라고 물어온 적이 있다. 분명 과거 비슷한 질문을 받았으면 겸언쩍어하며 겸양의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나이를 먹은 오늘날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 그분의 질문에 대하여 당당하게 "예, 저는 엔지니어님이 생각하시는 전형적인 먹물 또는 책물림형 인간입니다."라고 답했다. '먹물' 또는 '책물림형'이란 단어에는 부정적이 느낌이 강하다. 책상에 앉아서 펜대만 리지 현장은 잘 모른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간의 인식에 대해 나는 굳이 변명할 생각이 없다. 내가 건설현장에서 철근을 어깨로 나르거나, 의료현장에서 환자의 고름을 짜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고매한 인식 때문에 나는 배우자감으로 간호사나 사회봉사자를 염두에 뒀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팀원들이 가끔 "어우... 저는 '을'이 아니라 '병', 그것도 아니면 '정'이에요"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잊지 않고 주의를 준다. 협조가 잘 안 되는 이들과 함께 업무를 하는 이 힘들다는 걸 인정해 달라는 투정이겠지만, 같은 업에 종사하는 이 외에 어느 누가 은행원을 '을'이라고 인정해 주겠는가? 은행원이란 기본적으로 남이 가져다주는 자료를 검토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좀 샜는데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먹물의 전형이고,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쓸 때도 먹물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좀 더 일반화시키자면 대부분의 경우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분야가 글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소설은 자전적인 면이 있다.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자신이 자신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샌 김에 조금만 더 새도록 내버려 두자. 나는 몸으로만 일하는 직업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공자님이 말씀하신 '학이불고'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고루해지지 않는 방법은 공부를 하는 방법 밖에 없다. 요즘처럼 몇 년 단위로 억지로 세대를 나누어 분절시켜 '너와 나는 다르고, 우리와 쟤네는 다르다'라는 개소리(bullshit)*를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도 책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어를 제2외국어로 배울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이해하는 것도, 우크라이나 자체가 변경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그러니 우크라이나를 민족국가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오류라는 것을 아는 것도), 그렇지만 어쨌든 푸틴이 전쟁을 일으켜 홀로코스트의 주인공이다시피 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집단인 OUN에게 정치적 빌미를 제공한 것을 인식하는 것도 책을 읽어야 형성되는 인식 또는 고민의 지점이다.*** 그래서 이 먹물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하는 질문에 '네... 분명 지원이 필요하긴 한데... 이게... 음...' 하면서 우물거릴 수밖에 없다. 책을 읽어 뭘 좀 알긴 하는데, 그걸 깊게 고민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해답을 찾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뭘 잘 모르는 이는 우물거리지 않는다. 짧고 명확하다. 그들의 인식 지평에서 수확할 수 있는 답안이 몇 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향이 결과적으로 옳은 경우, 탁월한 성과로 포장되기도 한다. 먹물의 관점에서는 배가 아플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먹물은 공자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아야지요. 군자는 필히 눌언이야. (단, 눌언은 민행과 결합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는데 대한 탁월한 분석을 읽고 싶다면 해리 G. 프랭크퍼트가 쓴 [개소리에 대하여]를 읽으시길.

**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난 세대와 현 세대가 함께 연주하는 소설적 이중주는 황석영의 [해질무렵]을 참조하시길.  

*** 구자정의 [우크라이나 문제의 기원을 찾아서] 참조


그런데,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도 반복되는 현상이 있다 - 과거에 합격하는 순간 손에서 책을 놓는 거, 그리고 '이리 오너라~!'부터 배우는 거.* 최근 한 인턴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고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회사에 들어와서도 공부해야 하나요?" 대충 답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어쩌면 그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정색을 하고 했다. "음, 내 경우엔 말이지,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야 내가 진정으로 무식하다는 걸 깨달았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진짜 그랬는지 궁금하다면 김준혁이 쓴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읽으시길.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글쓰기의 두 가지 요소 중 하나인 농밀한 생각에 대한 최근의 예는 해외 인프라 PPP(Public Private Partnership) 사업을 둘러싼 다양한 학문적 혹은 정책적 논의의 비현실성, 그리고 이에 필적하는 실무대응의 미숙함 또는 책임회피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생각이다. 이는 논문으로 써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이 정도 언급하는 수준에서 그치자. 나는 가끔 속으로만 '고스톱 패가 안 좋을 땐 운 좋게 쌍피(PP) 먹고 피박(less than six Ps) 면하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무려 쓰리피(PPP)를 바래? 그것도 따닥(P+PP)으로?'라고 웅얼거린다. 내뱉을 수도 없고, 내뱉아도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고, 이해하더라도 라테 말고 계신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농밀한 생각이 문장의 형태가 되려면 책이라는 효소를 만나야 한다. 최근 이 효소의 역할을 해 준 책은 [바보들의 나라, 켈름]이다. 아이작 싱어가 쓴 짧은 동화책인데, 내용은 단순하다. 켈름이라는 나라의 통치자이자 현자 중의 현자(바보 중의 바보이기도 하다)라 불리는 그로남은 켈름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다섯 현자들(역시 바보들이기도 하다)과 상의를 한다. 논의의 결과는 켈름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웃 나라와의 전쟁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길을 잘못 들어) 실제 전쟁은 그 이웃나라의 이웃나라와 하게 된다. 전쟁에 패하여 그로남은 쫓겨나고, 정권은 그의 정적인 포크라카의 손에 잠시 머무르다 도둑 파이텔 일당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런데 구관이 명관이라는 것을 켈름의 주민들이 이해해서였을까, 별다른 이유 없이 그로남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지만, 이를 곧 여성당에게 넘겨주고 만다.


생각이 술이 익는 것처럼 부글부글 끓게 만든 이 책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위기'라는 말이 생겨나자 사람들은 켈름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두 단어를 발명한 주인공은 그로남이라는 인물이었다.

켈름에서는 통치력과 지혜가 늘 함께 따라다녔다. 다섯 명의 현자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그로남의 통치를 도왔다. 그 다섯 명은 다음과 같았다. 얼뜨기 레키슈, 얼간이 자인벨, 바보 트라이텔, 빙충이 센더, 멍청이 슈멘드릭이었다. 그로남에게는 슐레밀(이디시어로 '바보'라는 뜻)이라는 비서도 있었다.


어떻게 끓냐고? 이런 식이다.


PPP라는 말을 수입하자마자 뭔가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말을 수입한 이는 항상 그렇듯이 높은 곳에 계신 분이다. 이 동네에도 통치력과 지혜가 늘 함께 다닌다, 암요. PPP는 말하자면 열대과일인데, 너희 집 북향 베란다 시멘트 바닥에서 키워내란다.


낮은 곳에 계신 분들은 베란다에 공구리 작업을 시작했다. 어쨌든 식물인데, 씨앗을 심을 흙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시간이 지나 높은 분이 왜 아직 과일 맛을 볼 수 없느냐고 채근하면, 낮은 분들은 레미콘 회사가 십 년째 레미콘에서 시멘트를 섞고 있기 때문에 시멘트를 아직 붓지 못해서 또는 요즘 수입 시멘트 품질이 안 좋아서 그런지 아직 안 굳어서 그렇다고 답변한다.


결국 이러한 광경은 과거 소련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 즉 '우리는 일하는 척하고, 당신은 우리에게 보수를 주는 척한다'는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볼까? 최근 제프리 삭스가 쓴 [빈곤의 종말]에서 읽은 내용이 현실에서도 그러한지 테스트를 해 봤다. 며칠 전 만난 UNDP에 근무하는 직원에게 같은 UN 소속인 IMF나 Worldbank와 얘기를 나눠봤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두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이 사례와 (의미없이 체결하는) MOU겹쳐보면 글이 되지 않을까?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볼까?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이쯤 들으니 지겹지? 그래, 나는 이런 식으로 글을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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