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찬 교수님은 작은 키에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셨다. 주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정치학 개론'을 강의하셨는데(전공 필수과목이었기 때문에 학점이 구멍 난 양말과 같았던 늙수그레한 선배들도 삼삼오오 강의실 한편에 앉아있었다), 그는 강의시간 내내 강단을 좌에서 우로, 또 우에서 좌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특유의 에너지로 정치학에 대한 열정을 학생들에게 불러일으키셨다. 이 교수님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번역한 분이기도 한데, 나치즘을 예로 들며 정치로부터 도피하는 것 또한 정치의 아레나에서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될 수밖에 없으므로, 정치란 가장 적극적인 인간의 선택 행위여야 한다고 이르셨다. 그 결과 현실정치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정치학 또한 사회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의 학문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열정이 넘치는 그의 강의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뮤지컬과 같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에너지 준위가 높았던 신입생들은 궤도를 이탈해 다른 과목 수업을 '째고' 단체로 술을 퍼먹거나, 학생회에서 조직한 집회에 참여하곤 하였다. (타 과목 교수님들 입장에서는 아마도 기가 찰 노릇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에 더해 낮잠까지 즐기는 편이었다.
'25시'는 강의 도중 가볍게 언급된 책이다. 당시 강의의 주된 내용은 유럽 사회가 왕정에서 의회 중심의 공화정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신분(테크노크라트)으로서의 관료, 그리고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었다. 관료의 등장은 역사의 필연이다. 단, 관료조직이 '머신'이 될 때 무시무시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데, 게오르규의 '25시'에 그 공포가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고 하셨다. 또 여담으로 당시 유행하던 '사건 25시' 그리고 'GS25'를 언급하시면서, '25'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프로그램명이나 프랜차이즈명은 좀 곤란하지 않겠냐는 말씀도 하셨다. 왜냐하면 25시는 암흑의 임계점을 넘어선 절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25시는 인류의 모든 구원이 끝나버린 시간이라는 뜻이야. 설사 메시아가 다시 강림한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시간인 거지. 최후의 시간도 아닌, 최후에서 이미 한 시간이 더 지난 시간이지. 서구 사회가 처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25시야." (작중 인물인 코루가(사제의 아들이자 소설가)의 말)
소설 25시는 유럽의 약소국인 루마니아 시골에 사는 요한 모리츠의 기구한 삶을 그린 책이다. 그는 열심히 돈을 벌어 수잔나와 결혼하여 작은 땅을 일구는 삶을 꿈꾸던 근면한 청년이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암운이 짙어지면서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받고 전격 체포당한다. 루마니아는 독일의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수잔나에게 눈독을 들이던 경찰서장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곧 바로잡힐 것이라는 믿음은 차츰 사라지고 그는 자유를 찾아 헝가리로 도피하지만, 헝가리 당국은 적국인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체포한다. 이후 헝가리 정부는 노동력이 부족한 독일에 그를 포함한 외국인들을 팔아넘긴다.
그는 기계문명의 화신과 같은 독일의 군복용 단추 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면서 영혼마저 털리고 마는데,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어느 유명한 골상학자가 그를 '게르만인의 원형'으로 판별하면서 갑자기 민족의 영웅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강제 수용소 감시인의 역할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위대한 게르만인의 혈통을 계승하기 위해 힐데라는 독일 여성과 혼인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강제 수용소에서 친분을 쌓은 프랑스인과 함께 탈출하는데, 기대와는 달리 프랑스는 독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그를 포로수용소에 감금한다. 그를 구명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요한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 풀려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이번에는 연합국 수용소에서 장기 복역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게 해 준 나라의 수용소는 그나마 좀 더 인간적일 것이라며 삶을 체념하던 중, 기적같이 미군 병사로 복무할 기회가 열리면서 요한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책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미군 복무지원서에 쓸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주마등처럼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넋이 빠진 채로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미군 장교는 호통을 친다. 웃어, 웃으라고. 25시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요한 모리츠 역할을 연기한 Anthony Quinn은 이때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는 미소를 보여준다.
한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조리돌림은 요한이 연합국-연맹국 간 전쟁의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 루마니아 국민이라는 사실에 일차적으로 기인하지만, 진정으로 그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은 기계문명, 그리고 기계문명의 집행관인 관료들이다. 기계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한 인간은 자력으로는 결코 베틀에 걸린 실오라기와 같은 신세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들의 편의에 따라 야노스, 욘, 요한, 야곱, 얀켈로 등으로 불리며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정작 부당한 대우를 하는 이들은 일말의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의 억울함은 곧 드러나지만, 서류에 그렇게 기재되어 있다는 이유나 골상학과 같은 무오류의 과학이 그렇게 정해주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업무처리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합리화는 역사의 중심 경향이라고 믿는다.
직장 또한 조직화된 인간들의 군상이기 때문에, 조직이 커지면 직장도 차츰 관료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다. 확대된 업무를 보다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필연적인 변화의 과정이지만, 조직의 관료화는 반드시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나 창의적인 개인을 억압하는 기제를 갖추게 된다. 그중 하나는 '칸막이 행정'으로 표상되는 책임전가 시스템이다. 그 어떤 형태를 갖춘 것이라도 칸막이를 몇 개 거치다 보면 분절된 공간에서의 파편으로만 남게 된다.
나는 매우 운이 좋게도 입사 초기 회사의 급성장을 경험했다. (이 얘기는 나와 나의 동기들 모두 상대적으로 승진이 빨랐다는 말과 같다) 입사할 때 600명 정도 규모였던 조직은 현재 1,000명을 훌쩍 넘어섰다. 600명 시절 우리는 모두가 서로를 알았고, 우리는 스스로를 '가족'이라고 불렀다. 세상이 변해 가족 친화적인 근무환경을 조성한다고 할 때, 그렇잖아도 친밀한 우리들은 사회가 깔아주는 멍석에 앉아 '가족'끼리 술을 마셨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적 조직이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이런 일차원적인 사회가 싫었다. 제발 좀 서로 '남'이 되길 빌었다.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정책금융기관의 임무 중 하나는 시장안전판 역할이기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거세게 불어닥친 자본규제와 유동성 규제로 상업은행들의 업무가 위축되면서 정책금융기관의 업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 전반적으로 규제가 강화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신설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직은 커지고 업무는 세분화되었으며, 신규 채용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나 바라마지 않았던 '가족' 문화의 소멸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한편에서는 예전처럼 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부서 간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등 불만스러워하는 얘기들이 흘러나왔으나, 나는 이러한 변화가 아무래도 좋았다. 부서장을 정점으로 하는 부서 또한 한 단위의 소규모 이익집단(인센티브 성과급과 관련하여서는 동일 운명체이기 때문이다)으로 본다면 드디어 이익집단들로 구성된 게젤샤프트(Geselleschaft)적 조직이 도래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 같지 않다고 툴툴거리는 이들을 보며 나는 다그쳤다. 게마인샤프트적 감각으로 게젤샤프트를 다그치지 말라고.
그러나 공공기관의 게젤샤프트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이익은 허울 좋은 공공복리의 증진이 아니라 복지부동이라는 점을 깨닫고 나서야 툴툴거리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물론 최근 들어 성장의 정체가 시작된 우리 회사의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렇게 들었다) 내가 아는 다른 공공기관 직원은 '문제가 있는 부분은 지속 가능한 형태로 수정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얘기하면 그건 배임이라고 변명하며, '좀 고생스럽더라도 사업을 정상화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냐'라고 건의하면 '그만 사업 포기할까 봐요'라고 대답한다. 그 사업의 종잣돈은 국민의 세금이다. 어이가 없어 그런 식의 책임회피가 민망하지도 않냐고 따질 즈음 그는 정기인사로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2년 동안 한 자리에 네 명이 그런 식으로 왔다가 갔다.
업무를 서로 미루는 관료적 보신주의야 직장생활 일상 다반사이니만큼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분명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있었던 - 그러고 보니 착각인가?) 나에 대한 조직의 조리돌림은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게다가 나를 조리돌림 한 이들은 모두 조직에서 업무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존경받는 이들이다. (나는 지금도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나는 조직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J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경영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경영진의 나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서 촉발되었다. 기존의 접근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성과를 내고 있던 내게 경영진은 급기야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특별반을 설치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팀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조직을 축소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골몰하고 있던 직제팀장은 내가 담당하고 있던 팀을 없애고 대신 특별반을 설립하면 되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직제규정에 따르면 '팀'은 정식 조직이고 '반'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임시 조직이다.) 경영진의 '특별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묘안이었던 것이다. 나의 부서장은 잠시 반항하는 모양새를 보이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거스르지 못할 것 같아, 그리고 내가 희생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희생될 수 있으니 상대적으로 젊은 나를 희생시키겠다는 결론을 냈다. 당시 인사팀장이었던 동기는 경영진의 뜻에 따라 나를 특별반의 반장으로 발령을 냈다. 발령이 난 때는 내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부모님 댁에서 며칠 쉬고 있던 때였다.
‘특별반’이라는 명칭은 그럴듯하지만 나는 팀장에서 반장으로 강등되면서 연봉이 깎였다. 조직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 성과를 낸 공로로 포상을 받자마자 보직을 박탈당한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두어 달 후 특별반의 업무추진 경과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담당 임원은 내게 물었다. 일은 할 만하냐고. 옆에 앉아있던 부서장은 '이 친구 연봉이 깎였는데, 이 부분을 감안해 달라'라고 나 대신 답변했다. 그 임원은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는 자신이 말한 '특별반'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오히려 나를 중심으로 팀원 수를 대폭 보강하는 큰 팀을 만들라는 뜻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자리에서 물러나와 부서장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의 보직을 박탈시킨 것은 누구의 작품이었냐고. 부서장은 직제팀장이라고 했다. 직제팀장에게 물었다. 왜 경영진의 뜻을 곡해했냐고. 그는 나의 부서장의 작품이라고 했다. 동기인 인사팀장에게 물었다. 인사발령을 내기 전 경영진의 뜻을 확인했냐고. 그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고 했다.
J 프로젝트를 해결하고 나서도 2년이 지난 때였다. 내가 근무하는 본부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곳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떠나고 싶었다. 통상 2년을 채우면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이미 5년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사가 지겨웠다. 어디든 좋으니 제발 좀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던 중 본부 내 또 다른 대형 사고가 터졌다. 사람들은 이 건에 대하여 국회나 감사원에서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수군댔다. 그리고 그 해 10월 중순 나는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 대형 사고를 처리하기 위해 1:1 맞트레이드되었다. 사람들은 회사 설립 이래 처음 보는 일이라고 들 수군댔다. 나는 지금도 이것은 잘못된 인사라고 믿는다. 반드시 나일 필요가 없었으며, 굳이 정기인사를 두 달 앞둔 시점에 그런 식으로 모두의 주목을 끄는 방식의 인사는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날 저녁 곧바로 인사위원회가 소집되었으며, 다음 날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하는 가운데 인사발령 사항이 게시되었다.
그로부터 또다시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까지도 같은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문제가 되었던 대형 사고도 얼추 해결했다. 이번에야말로 옮겨달라고 했더니 인사팀장은 좋은 곳으로 가기는 어렵겠다고 답했다. 선호 본부에서 7년이나 근무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는 것까지는 아무래도 좋은데, 남들이 맡기 싫어하는 업무를 떠맡은 것이 왜 내게 불리한 방식으로 작동하느냐고 물으니 답이 없다. 대신 선호 본부에 7년을 근무하여 이제는 명실상부한 해당분야 전문가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그걸로 만족하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요한 모리츠가 생각났다. 그래서 웃었다.
글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 마치 내가 매우 억울한 일을 당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억울하다는 감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매우’ 억울하다는 감정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내가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대상은 경영진, 부서장, 직제팀장, 인사팀장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바라문처럼, 크샤트리아처럼, 바이샤처럼, 그리고 수드라처럼 자신들의 직무 본성에서 생기는 행위를 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근면성 자체는 죄가 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불이 연기로 가려지고 거울이 때로 더러워지듯, 태아가 막으로 덮여있듯 가려져 있는’(바가바드기타, 제3장 38절) 세상에서 ‘존재의 밤에 깨어있는 자제의 소유자’(바가바드기타, 제2장 69절)처럼, 아르주나와 같이, ‘욕망의 형태를 지닌 정복하기 어려운 적을 쳐부수려’(바가바드기타, 제3장 43절) 한다. 아, 직장인으로서, 직장생활은 내게 요가*와도 같다. 위에서 언급한 이들과 술자리라도 하는 날엔 반드시 주화입마에 빠져 다음 날 운기조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 yoga라는 단어는 범어 yuj라는 동사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yuj는 말을 수레에 붙잡아 매다, 소에 멍에(yoke)를 매다, 나아가 정신을 집중하다, 통일하다, 제어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길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