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아무리 용기를 내도 사람을 꺾지 못한다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양심(良心)이 국어사전 속에 갇혔다. 어떤 양심은 남극에 유배됐다. 다른 양심은 달의 뒷면에 버려졌다. 감옥을 가보지 않고도 감옥 속에 산다. 남극에 서보지 않고도 극한의 하얀 황무지에 산다. 달에 버려진 양심은 아예 존재 자체가 잊혔다. 우주보다 넓을지도 모르는 양심을 그렇게 영어(囹圄)에 던져 놓고 열심히 죽기 위해 산다.
보이는 법도 무법이 되는 세상. 보이지 않는 양심이 힘을 쓸 재간이 없다. 본래부터 그랬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겨날 때부터, 양심은 거기 있는데 여기는 없다. 거기는 마음이고, 여기는 세상이다. 마음과 세상의 경계가 없어졌다. 경계가 없으니, 막을 수가 없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를 않는다. 고개를 숙여야 할 때, 눈을 부릅뜬다. 한 걸음 물러나야 할 때, 발길질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벌거벗은 몸뚱이 그 안에, 양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온다.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의 입은 몸뚱이 그 안에서 양심을 꺼내 돌아간다. 어느 곳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왔던 곳으로 그렇게 돌아간다.
모두의 양심이 그런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양심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가는 99명이, 양심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살아가는 1명을 당할 재간이 없다. 놈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만, 그런 분은 놈이 불리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분 앞에서 ‘분’과 ‘놈’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런 분 앞에서 ‘분’과 ‘년’을 구분하지 못하면, 어쩌면 절망 속에 몸이 갇히는 신세가 된다.
어느 날 꽃 한 송이 앞에서 그런 생각에 빠졌었다.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머릿속에는 생각이 널뛴다. 세상살이가 꽃보다 녹록하지 않은 까닭이다. 아니다. 모든 것을 견디고 버티는 꽃보다, 내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유를 찾을 수도 없다. 설령 이유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양심의 세계에는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들로 가득하다.
올 때가 되면 소리 없이 온다. 갈 때가 되면 또 그렇게 소리 없이 간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햇살을 받으면 활짝 웃고, 달빛이 내리면 살짝 웃는다. 웃어야 웃는 사람보다 그냥 웃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꽃이다. 그래서 꽃이 사람보다 낫다. 수많은 말을 쏟아 내며 다른 이의 마음에 번번이 상처를 내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못하다.
사람은 세상의 질곡에 빠지면 냄새가 난다. 꽃은 수렁 속에서도 향기를 낸다. 사람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꽃을 꺾는다. 꽃은 아무리 용기를 내도 사람을 꺾지 못한다. 사람이 양심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지만, 꽃은 향기를 잃어도 여전히 꽃이다. 사람이 양심을 버리면 세상을 보지 않지만, 꽃은 색을 잃어도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울 수 없다. 그래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그래도, 꽃 같은 사람은 많다. 양심을 버린 구린내 나는 ‘분’들 속에서 양심을 지키는 사람. 양심을 잃은 가여운 ‘분’들 속에서 양심을 간직하는 사람. 마음과 세상의 경계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침과 저녁의 경계가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아는 꽃처럼 지혜롭다.
하루에 한 번, 딱 한 번 만이라도. 하늘을 올려보고, 해와 달을 눈에 넣어보고, 바람이 어디로 가는지 살피고 사는 것은 지혜의 일부분이다. 꽃이 하루를 살고, 이틀을 지내고, 그렇게 계절을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내고 살아가다 보면, 꽃이 되어 바람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국어사전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를 풀어주고, 남극에 있는 양심을 불러오고, 달에 버려진 양심을 데려올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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