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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 May 10. 2021

21-24

라이프 8

 세 시간 정도, 어쩌면 그 이상. 그러니까 그 정도의 시간 동안 마음을 졸여왔던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간에. 얼굴도 모르는, 심지어 귀걸이를 보면 잡아 뜯어버리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사람을 만나기 직전에도. 쇼핑하러 가듯, 동네 카페에 아메리카노 한 잔 때리러 가듯 새로운 남자를 만나지 못하는 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선 일상생활을 잠시 정지한 채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만남 직전의 이런 내 모습을 보았을 때 이후 관계의 방향성이란 실로 자명한 것이었다.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카톡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서게 되겠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니 자연스러운 것이라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게 그때의 그런 내 행동들은 그리 정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보던 드라마가 16화에 다다랐을 때,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감정을 이제 그만 소모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2회 차 시청임에도 불구, 나는 해당 드라마가 20부작임을 까먹고 있었으며 결국 19화와 마지막 화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런 식의 사고 때문인지 새로운 드라마나 영화를 잘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봤던 드라마를 계속 또 보며 안전을 추구하고 있다. 예측할 수 있는, 적어도 겪어본 감정을 겪게 될 장면이 연속되는 그런 것들. 곧 슬픈 지점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그렇게 많이 힘들진 않겠지. 뭐 그런 생각들. 편안함에만 안주하려는 성향이 문화적 소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것에는 누군가의 좋은 지적이 있었다.


 그런 사상의 확장은 대단해서 이제는 드라마와 영화 같은 작품을 넘어 안타까운 실제 이야기 혹은 뉴스마저 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이에 대한 평상시 나의 변명은 감정 몰입을 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의 실체마저 잘 모르겠고 그저 마음 편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극에 달해 이렇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응당 사회적 관계에서의 도덕과 의무에는 누군가의 힘든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공감할 줄 아는 것 또한 포함되는 것인데, 이렇게 가다가는 공감 결여 및 내 할 말만을 위주로 한 전형적 맨스플레인만 일삼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이미 그러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고 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아직 힘들지 않다는 게 희망이라면 희망이겠지.


 맘에 안 드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주관적인 잣대로 나는 그것을 평가를 내리고, 결정하고, 거부한다. 슬픈 드라마를 볼 때 흘릴지도 모를 눈물이 창피해서일까? 자존심 하나로 굴러먹는 전형적 '이대남'이 되고 만 걸까? 그렇다면 정말 큰일인데. 적고 보니 좀 심각한 상황인 것도 같은데. 일단은 모든 것이 결국 피곤함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위를 해보며 구입한 비타민B와 비타민D가 효과가 있기를 바래야겠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

 새로운 남자를 만나러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정확하게는 약속을 잡은 그때부터 평소라면 느꼈을 법한 긴장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눈치를 보지 말고 평상시처럼만 하라는 친구들의 다정한 조언 덕분이었을까. 거의 반년 만에 구애의 목적으로 남자를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드디어, 25세의 나이에 정신을 차려 편의점 가듯 쉽게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게이로 거듭나게 된 걸까. 아무튼 그렇게 만난 그는 그리 맘에 들지 않았고, 나는 피곤한 나머지 일찍 자리를 파하자고 했다. 언덕을 내려가며 집에 가서 무얼 먹을지, 어떤 치킨을 시켜야 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살이 넘은 시점에 처음 퀴어 문화를 접하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특별히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저 누군가와 연애 관계를 조금 일찍 맺을 수 있었더라면 이런 것에 약간은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근데 그러려면 퀴어 커뮤니티에 일찍 들어오긴 했어야겠지. 능숙하다는 건 또 뭐야. 이러나저러나 원래 그런 연애 스타일을 가진 사람임을 부정하고 싶은 합리화가 아닌지? 다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만의 호의를 베풀고, 몰아치는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전전긍긍하지 않는 연애를 하는 사람을 동경한다는 얘기였다. 상대가 누구든 말이다.



*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언가 많은 것을 물 흐르듯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능숙하지 못하고 어색한 건 너무 싫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왔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내 성질머리는 그것을 참아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지 못한 내가 싫었다. 끊임없는 회상으로 치부를 복기하며 후회를 거듭했다. 이것이 과연 위대한 성장통의 일종이었나? 여전히 나는 정체 상태인 듯하고, 성장이란 먼 미래의 이야기 같은데. 4년은 무언가 알고 체득하기엔 짧은 시간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아무래도 나의 어른스러움에 대한 기준이란 상당히 높은 듯했고, 쓰잘데없는 내적 갈등으로 피곤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지금, 새로운 남자는 괜찮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모순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또 될 대로 되겠지. 대충 봄 핑계를 대며, 허약해진 심신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굴러오는 남자 정도는 마다하지 않을 수 있겠지. 몇 달 전의 나처럼 적어도 입맛이 뚝 떨어진 상태는 아니니까 그냥,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대화를 하며 커피를 마실 수는 있겠다 싶었다. 과거에 대한 메스꺼운 되새김질은 잠시 접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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