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안에서 완전했던
[미셸 르그랑 추모] 음악 안에서 완전했던
글 김나희(클래식음악평론가) 2019-02-08
<쉘부르의 우산>의 영화음악가 미셸 르그랑(1932~2019)을 추모하며
<쉘부르의 우산>(1964) 포스터.
미셸 르그랑 타계 소식은 페이스북으로 먼저 접했다. 그와 함께 무대에 올라 연주했던 어느 바이올리니스트의 절절한 애도의 메시지를 읽고 나니, <프랑스 뮈지크>의 뉴스로 올라와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 한참 동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작곡가 프란시스 레이의 추모 기사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2018년 12월 2일, 파리 필하모니에서 열린 미셸 르그랑의 강연에 갔다. 직접 그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듣고,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만났던 다른 탁월한 피아니스트들이 그러하듯, 말로 하는 이야기보다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보여주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하리라는 기대와 함께 필하모니에 도착했다. 무료에 선착순 입장이라 일요일 오후인데도 일찌감치 도착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수십년간 미셸 르그랑의 음악을 들어왔고, 그 전날 필하모니 피에르 불레즈 콘서트홀에서 열린 공연에도 다녀온 오랜 팬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제 삶의 목표는 한 가지였습니다. 완벽히 음악 안에 사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는 하나의 음악적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나아갔습니다. (피아노) 연주, 지휘, 노래, 작곡… 저는 이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수첩을 뒤적여보니 당시 열심히 받아 적은 그의 목소리들이 문장으로 남아 있다.
미셸 르그랑은 1932년, 작곡가 겸 지휘자인 아버지와 지휘자인 외삼촌을 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빼어난 음악적 자질을 지닌 아이들이 그러하듯 만 11살에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해 엘리트 음악 교육을 받았다. 여성 최초로 유럽과 북미에서 유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작곡가이자 교수로서 필립 글래스, 아스트로 피아졸라, 퀸시 존스, 다니엘 바렌보임, 다리우스 미요 등 다음 세대의 거장들을 키워낸 전설적인 나디아 불랑제 문하에서 9년을 공부했다. 음악원을 마친 미셸 르그랑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장르는 노래(샹송)였다. 자클린 프랑수아, 앙리 살바도르, 카트린 소바주의 반주자로 음악적 커리어를 시작했다. 배우 겸 가수인 모리스 슈발리에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되어 함께 북미 투어를 하며 미셸 르그랑은 유럽을 벗어난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상과 마주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 그는 재즈라는 새로운 장르를 발견했고, 기꺼이 그 미지의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 새로운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익혀나갔다. 트리오, 빅밴드, 피아노 솔로, 콰르텟까지 그는 가능한 모든 조합으로 재즈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여정에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들이 함께하며 길을 밝혀주었다.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 엘라 피츠제럴드, 스탄 게츠…. 탄탄한 클래식적 문법을 완벽히 소화한 그가 재즈라는 새로운 언어를 익힌 뒤에 영화음악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셸 르그랑은 1955년 앙리 베르누이 감독의 <과거를 가진 애정>(Les Amants du Tage)으로 영화음악에 첫발을 디뎠다. 4년 후, 운명처럼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 시대가 도래했고 미셸 르그랑은 새로움을 추구한 누벨바그 감독들이 찾고 있던 음악감독이었다.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1962),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 등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들의 미학적 기준에 부합하며, 영상과 완벽히 결합해 영화의 완성도에 방점을 찍어줄 음악을 만들어냈다. 영화음악의 지위는 미셸 르그랑 덕에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장 뤽 고다르, 아녜스 바르다, 프랑수아 라이센바흐 그리고 자크 드미, 이들과 함께 미셸 르그랑은 누벨바그라는 영화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겼다. 그들 중 특히 형제보다 더 가까웠던 자크 드미와 함께 세상에 내놓은 <쉘부르의 우산>(1964)으로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형식의 뮤지컬영화라는 극찬을 받았다. 1964년 제17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와 그다음 해 주제가상 후보에 오르는 등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으나 실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업계 모두가 러닝타임 내내 한번도 끊기지 않고 음악이 이어지는 뮤지컬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며 비관적이었다.
영화로 시적인 서정성을 추구해온 자크 드미는 시네 오페라로 불려도 좋을 이 새로운 형식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1년 넘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좌초할 뻔했지만 서로를 형제로 불렀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그들의 예술적 도전에 믿음을 가진 젊은 프로듀서 맥 보다르를 만나 <쉘부르의 우산>은 극적으로 세상에 나왔다. 미셸 르그랑의 표현대로 ‘전 우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들어진 영화’인 <쉘부르의 우산>은 전세계를 울렸다. O.S.T 속 가장 유명한 곡인 <Je Ne Pourrai Jamais Vivre Sans Toi>는 나나 무스쿠리가 다시 불렀고, <I Will Wait For You>로 번안되어 프랭크 시내트라, 토니 베넷, 루이 암스트롱, 리사 미넬리의 목소리를 통해 끊임없이 대중과 만났다. 형제와도 같은 두 사람이 영화와 음악으로 만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던 도전은 계속되었다. <로슈포르의 연인들>(1967), <당나귀 공주>(1970) 등 몇년 전 시네마테크에서 그의 오랜 단짝이라 할 수 있는 자크 드미의 영화들을 만나며, 낡았다는 느낌 없이 전달되는 서정에 놀란 적 있다. 디지털 리마스터링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흐와 모차르트의 영향이 느껴지는 화성적 구조에 특유의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를 얹은 미셸 르그랑의 음악 덕분이었다.
<쉘부르의 우산>의 대성공 후 파리를 떠나 LA에 자리를 잡은 미셸 르그랑은 영화음악이 배경이 아닌 ‘또 다른 대사’로 작용한다고 믿으며 할리우드에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오슨 웰스, 마르셀 카르네, 시드니 폴락, 루이 말, 노먼 주이슨, 로버트 앨트먼, 클로드 를루슈, 조셉 로지, 리처드 레스터 등과 손잡으며 미셸 르그랑이 참여한 영화의 수 역시 빠르게 늘어갔다. 고다르와 제임스 본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크리스 마커처럼 가장 무관할 법한 존재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바로 그의 음악이었다. “영화음악에 대한 제 생각은 무척 단순합니다. 이미지들 사이에 감춰진 숨은 감정들을 표면으로 드러나게 하면서 관객의 무의식에 말을 거는 겁니다. 영화를 위한 음악이기 때문에 저에게 영향을 준 모든 문화와 장르의 음악을, 모든 장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국적도, 시대적 스타일도 모든 것을 다 시도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사용하는 건 그 다양성이 오히려 통일성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과 메종 드 라디오에서 그의 연주를 여러번 들었다. 공연장에서 접했던 그의 모습은 변화무쌍했다.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의 반주를 하거나, 재즈 밴드와 함께 피아노 즉흥 연주를 선보였고,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이 그의 협주곡들을 초연하기도 했다. 순식간에 감정선을 건드리는 멜로디, 어딘가를 향해 끝없이 가는 듯한 즉흥 연주,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그가 빚어내는 음악적 순간은 그 자체로, 가장 영화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피아노 앞에서 <Je Ne Pourrai Jamais Vivre Sans Toi>를 연주하면 수천명의 청중은 물론 악기를 내려놓은 오케스트라 단원들까지 모두 <쉘부르의 우산>을 보았던 순간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너 없이 절대 살아갈 수 없을 거야’라는 제목의 ‘너’는 그에게 음악이었을 것이다. 바람대로 완벽히 음악 안에서 살아낸 생이었으니, 그곳에서도 부디 음악과 함께하기를 바란다. 다시 <쉘부르의 우산>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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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씨네큐브에서 <쉘부르의 우산>을 재상영한다고 한다.
Je ne pourrais jamais vivre sans toi 들으면서 펑펑 울다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