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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Sep 27. 2020

무대 위, 그 조명 아래서

나를 마주하다. 

새로운 시작. 그 말이 나한테는 너무 달콤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나로 사는 일. 물론 사람의 본질이 변하기는 쉽지 않으니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는 극적인 변화는 바라지도,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깨끗한 첫 페이지를 연다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난 고등학교를 입학하자마자 중학교 시절 날 알았던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선택을 했다 --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 나는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나는 춤추는 걸 좋아해”라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춤을 춰본 적은 없었다. 그저 어렸을 때 열심히 했던 발레가 그리웠고, 중학교 때 반 단체로 작은 율동이나 체조 등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일 때 어렴풋이 느꼈던 자유로움을 다시 체감하고 싶었다. 다행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자유로워 별다른 오디션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나도 할 수 있어' 하는 빼꼼 얼굴을 들이미는 자신감이 내 안에서 공존했다. 그냥 취미생활이니까. 가볍게 생각하자. 이런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렇다, 순간의 무모함이었다. 다행히 나는 나름 춤을 잘 추었고, 점점 재미를 붙여갔다. 매주 춤 연습을 하고 팀원들과 동선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공부 스트레스를 벗어나 몸을 움직이며 즐거운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갔고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매 가을, 큰 축제를 개최했다. 많은 동아리들이 전시를 하고 공연을 하는 자리도 마련되었다. 춤 동아리인 우리도 당연히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같은 재단 안에 있는 학교들이 함께 준비하는 공연인 만큼 그 규모도 상당했다. 처음에 난 마냥 신이 났다. 무대에 서본 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린이 발레 무대에 선 이후로 처음이었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대를 싫어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낯을 가리던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 놓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학예회를 가 보니 내가 당당히 무대에서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보고는 적잖게 당황하고 신기했다고 했다. 그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리허설을 치렀고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으로 연습을 하며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마침내 축제 당일이었다.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체육관의 2층에 앉게 되었고 1층은 관객들로 가득했다. 그곳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매일 보던 체육관은 그 순간 너무나도 큰 공연장 같았고 그 넓은 공간을 다 채울 정도로 빽빽이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손에서 땀이 나길 시작했고 갑작스럽게 많은 걱정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실수하면 어떡하지? 넘어지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지? 난 못할 것 같아. 


온갖 불안감이 나를 휩쓸었다. 나는 친구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화장실을 가려고 복도를 지나가다 보이는 전신 거울 앞에 나는 멈칫했다. 우리는 종종 그 거울 앞에서 연습을 하곤 했다. 익숙한 거울이었는데,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 속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8cm의 높은 힐을 신고, 짧은 바지를 입고 서 있는 17살 소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무대에 서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하루 종일 예쁘게 꾸몄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아무리 꾸미고 가려도,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눈을 통해, 난 나를 들여다보았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믿던, 얼핏 보면 어른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던 내 모습, 그리고 그 안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던 겁쟁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난 아직도 두려웠고, 상자 속에 갇혀 있었다.


“뭐해? 빨리 와! 이제 곧 우리 차례야!”


날 찾으러 온 친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 친구의 손에 이끌려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10월, 아니 11월이었던가.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던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추워서 떨었던 걸까, 아니면 긴장돼서였을까. 진작에 머릿속이 하얗게 된 나는 어떻게든 이 떨림을 멈추기 위해 방방 뛰며 몸을 풀었다.


“이제 올라가시면 돼요!”


학생회 스태프의 말에 이끌려 난 무대 위에 올랐다. 높은 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려니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고 또 넘어지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암흑 속에 무대 위에 올라 첫 포즈를 취했다. 정적. 폭풍전야. 노래가 흐르기 전까지 그 짧은 고요함. 난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도, 생일도 항상 그 당일보다 하루 전이 더 떨리고 설레듯, 체육관이 울릴 정도로 큰 노랫소리가 나오기 전의 고요함이 내 긴장을 최고치로 끌어올렸다. 벼랑 끝에 내몰리는 마음으로, 난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떨림과 동시에 피어올랐던 작은 마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노래는 시작되었고, 나는 강렬한 조명을 마주했다. 가수 비의 노래 중 이런 가사가 있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고.” 사람들은 뭐 저런 우스꽝스럽고 오글거리는 가사가 있냐고 조롱했지만 한 번이라도 무대에 서 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을 할 것이다. 조명이 감싸는 느낌. 순간 따뜻해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5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노래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의 시간. 난 모든 생각을 지우고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다.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댄스 동아리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착한 아이” 또는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이 아니었다. “춤추는 애”라는 또 다른 ‘낙인’이 찍혔는데, 이번만큼은 그게 싫지 않았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내 이미지와 남들이 보는 이미지가 겹쳤기 때문일까. 나는 기꺼이 그 이미지를 받아들였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처음으로 ‘나’만을 위한 활동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자랑스럽게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와 동시에 자존감도 높아졌고, 조금이나마 더 당당해졌다. 2학년 2학기 때부터는 다른 친구와 함께 동아리 장을 맡으며 리더십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시경쟁이 매우 치열한 자사고의 국제과정에서 춤 동아리를 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들은 춤 동아리가 있다는 점을 탐탁지 않아했다. 운동 동아리나 봉사 동아리, 또는 발명 동아리에 비해 소위 말하는 “스펙"이 되지 않는다며 괜히 아이들의 집중만 흐트러트리는 활동이라고 뒤에서 비난했다. 동아리 형성과 활동은 학생 자치회의 주관이기에 대놓고 없애자는 목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자신의 아이가 춤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분들이 많았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떤 활동을 하든 관여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중학교 시절의 난 주위에 이런 말을 들으면 기가 죽고 눈치가 보여 동아리 활동을 중단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나는 비난에 풀이 죽기보다는 화가 났다. 댄스 동아리가 얼마나 나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온몸으로 경험했기에 남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까. 춤을 추는 것은 “날라리"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특히 학창 시절에는) 깊이 박혀 있는 사회에 화가 났고 남의 시선을 생각하느라 지금까지 이렇게 재밌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래서 난 더 열심히 춤을 췄고,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 1등 성적을 유지했으며 동아리 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댄스 동아리 규모도 키웠다. 함께 리더 자리를 맡고 있던 친구 역시 이런 뒷말들을 알기에 치열하게 노력했다. 역시 이 한국 학교 사회에서는 성적이 권력이더라. 그 후로 부모님들도 내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댄스 동아리를 없애야 한다는 말도 사그라들었다. 나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믿는 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온전히 ‘나’를 믿고 행동한 순간. 뿌듯했다. 이제 내 삶의 기준은 내가 정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진하게도, 난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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