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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Sep 20. 2020

나를 정의하는 이 네 벽 안에서

다르고 싶었어

사도세자는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혹은 정치 싸움의 희생양으로, 네 벽으로 꽉 막힌 뒤주 속에서 삶을 마감했다. 틈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서서히 삶의 빛을 잃어 갔다.


물론 감히 사도세자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가, 아니면 나 자신이 정해준 상자 안에 갇혀 작은 틈 속으로 들어오는 그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영원히 닿지 않을 세상의 빛만 바라보다 내 안의 빛을 잃어가면서. 어느 날 문득, 내 손에 쥐어진 흔하디 흔한 설문조사 종이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름. 뭐, 어렵지 않다. 난 내 이름을 한국어로, 영어로, 그리고 한자로도 쓸 줄 안다. 화할 민, 기둥 주. 화평하고 온화한 세상의 중심이 되어라. 항상 기분 좋게 난 내 이름을 적는다. 성별. 여성. 또는 남성. 그 중간은 없다. 여성을 체크한다. 학생, 회사원, 전문직, 공무원, 주부…… 이 세상에 직종이 얼마나 많은데 어찌 이 A4 용지 종이 한 장에 모두 담을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학생에 체크한다. (뭐,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미국에서 이러한 설문지를 받으면 꼭 있는 다른 질문. 인종. White/Caucasian. Black/African. Hispanic/Latinx. Asian. Native American. Pacific Islander. Other. 난 또 주저 없이 Asian을 선택한다. 다시 한번, 고민하지 않아도 됨을 다행이라 여기면서. 그러면서 드는 생각. 우리나라에는 선택이 딱 두 가지만 존재한다. 내국인. 또는 외국인. 이 역시, 중간은 없다. 


내 신원은 고민할 것도 없이 각 문항에 딱딱 맞는 박스가 존재한다. 그 작은 박스들 중간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나는 알기에, 이리 딱 맞는 점에 어느 정도는 감사하며 살고 있다. 사회가 인정한 범위 안에 존재한다는 말이니까. 그 기준을 벗어나면 겪게 되는 갖가지 서러움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을 보았고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난 이 안일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부끄러우면서도 감사한다. 


그러나 이런 문항들은 우리의 신원을 규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체성까지 통제하려 든다. 요즘 유행하는 MBTI 테스트도 이런 식이지 않을까. 나는 ENFJ란다. F를 제외한 다른 범주에서 나는 항상 중간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ENFJ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항들도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 속사정을 설명하기엔 끝이 없으니 나는 ENFJ라고 소개하고 남들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이 외에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배하려 드는 기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예쁜 사람. 못생긴 사람. 인기 많은 사람. 깐깐한 사람. 재수 없는 사람. 멋있는 사람. 사교성이 좋은 사람. 나대는 사람. 소심한 사람.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정말 셀 수도 없이 많다. 한번 ___ 사람이라고 정의되는 순간 낙인이라도 찍힌 것처럼 그런 사람으로 살게 된다. 


피그말리온 효과(긍정적인 기대와 관심을 받으면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와 스티그마 효과(부정적으로 낙인찍히면 실제로 더 나쁘게 행동하는 것)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상반되는 이 두 개념의 공통점은 주변 사람의 의식과 낙인이 개인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라고 남들이 정해주고 나서부터 그 사람은 정말 그런 사람이 된다. ‘착하다'라고 하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착하게 행동하고, ‘못됐다'라고 하면 반항심에 더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 사람은 강하면서도 약한 존재이다. 남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막상 스스로는 그 힘에 쉽게 휘둘리게 된다. 


난 왜 꺼려지면서도 그렇게나 ‘착한 아이, ' ‘모범생'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을까. 이 점을 스스로 자각한 이후로 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책했다. 왜 그랬을까. 아니 아직까지 왜 그러고 있을까. 그 결과 내가 내린 결론: 사람이니까. 지극히 나약하면서도 강한, 그런 사람이기에 그렇게 휘둘리고, 아파하고, 이를 깨닫고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그 순환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작은 틈 속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열심히 이 상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절, 난 이 빛을 보았고, 주저 없이 잡았다. 다르고 싶었다. 달라지고 싶었다. 난 그렇게 처음으로, 나를 정의하는 이 네 벽을 온전히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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