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인식하는 것에 대해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포괄하는 세계는 넓고 깊고 다양하다.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감각으로서의 아름다움도 제각각이다.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순수의 전조」)도 아름다움은 외형과 통념에 있지 않고 사유의 깊이에 있음을 말했다. 꽃을 보거나 꽃 그림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은 직설적이고 통상적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답다는 본질적 생태가 인간의 의식 속에 이미 견고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그 너머 '사건'의 영토가 넓지 않다. 그러나 같은 꽃을 말한 것이라도 생태적 아름다움만이 아닌 인간의 흔적과 내면이 투영되어있는 것이 보인다면 차원이 다르다 하겠다. 누군가는 말할 수 없는 설렘이나 슬픔이나 기쁨 같은 복합적 상념의 눈으로도 꽃을 볼 것이다. 구체적 의미로 규정할 수 없어도 조화와 불균형 사이의 긴장과 관계들이 주는 변화무쌍한 순간들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에 치중하지 않고 시각적 관계와 이야기를 보이는 그 자체로 읽고 느낀다는 것은 높은 감각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아름다움의 수준은 도식적인 것들과 상투성으로부터의 거리에 반비례한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세상을 보는 식견에도 영향을 미치는 통찰력과 닿아 있다. 언어는 천천히 드러나도 되거나 언어가 되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있다.
직설만으로 채워진 완성형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어렵다. 보는 순간 멋지거나 아름답다는 환희는 있겠지만(물론 그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움직임이나 격정이 사라지고 점점 지루하고 무감각해지기 쉽다. 사람의 감각은 새로운 것에 먼저 반응하고 변화하는 것들에 지속적 관심을 준다. 익히 존재해온 변함없는 것들에는 점점 무감각해져 그 존재에 대한 감각은 투명한 상태를 향해 간다. 반대로 변화하고 움직이고 궁금한 구석이 많다는 것은 상상의 여백, 화자와 청자 간 질문과 교류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모호하고 긴장될수록 그 여지는 다양한 상상과 감정 교류로 채워질 수 있다. 그래서 제각각 살아오고 봐 온 것들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각각의 미적 세계가 여백과 공간을 채우게 된다. 법칙도 인과관계도 없고, 오로지 온몸의 감각으로 본다는 느낌, 분위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자유로운 이야기가 그려진다.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졌지만 궁금하지 않다는 건 설렐 일도 없어서 심심한 일이다. 아름다움으로 아름다움을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위안으로 위안을 언급하기 어렵다. 궁금하다는 것은 그 속에 상상의 공간이 많고 감정이 돌아다닐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통속적으로 평가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과 정신세계의 의미 있는 것들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풍요가 아닌 결핍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름다움의 세계는 복합적이다. 관객(우리는 세상 모든 것들의 관객이고 배우다)은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의 두 감정(풍요와 결핍) 사이의 공간에 개별적 아쉬움과 그리움과 복잡한 감정 들을 은연중에 채워 넣는다. 그래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도 개별적이고 종종 역설적이다. 만개한 꽃 무리는 아름답지만, 그것은 학습된 의식이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사실적 정보에 가깝다. 물론 그런 상투성에도 단정할 수 없는 깊이와 격의 차이는 존재한다. 주관적 느낌에 관련된 형용의 세계는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보이는 사실 너머의 진실은 말하기 어렵다. 더욱이 아름다움은 진실의 문제와도 그다지 관계가 밀접하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에 따른 것이다. 복잡하고 뒤섞인 관계들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인간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교류해 온 결과로써의 안목이 작용한다. 그것이 이유를 지닌 아름다움일 수 있고 질문으로서의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뭔가 있지만 말하기 어렵고 궁금한 감정이다. 동시에 전적으로 경험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어긋나고 불투명하고 흐트러지거나 모호한 속에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그 뭔가'라는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새로 깨닫거나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정돈되지 않았던 순간들의 긴장감과 모호함 속에서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세계로 편입되어 간다는 것을 느낄 때의 기쁨이 있다. 아름다움은 외형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관계와 이유와 배경에 의해 드러나기도 한다. 상투적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숨겨진 이미지로 은근히 드러나기도 한다. 변화와 관계와 어긋남과 관계없음과 사소한 순간의 강렬한 자극, 흐릿해도 선명하고 인상적인, 말할 수 없는 슬픔이나 상처 같은 것들. 아무것도 아닌 순간의 희열, 어색하고도 척박한 불편 뒤의 극적인 아름다움 등, 예를 들거나 그 사소한 일부도 말로는 제대로 인용할 수 없다.
아름다움과 함께 세상의 진위와 인간의 선악도 말이 아닌 바깥에서 드러날 때가 많다. 그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크다. 언어는 세상의 중추이지만 세상을 편협하게 바라보게 하는 함정을 가지고 있다. 언어의 노예가 되는 것은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정서적 노예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의식과 정치적 주장들을 언어라는 도구로 능숙하게 주무르는 사람들은 대중을 의식의 노예로 만들기도 한다. 언어와 언어 이용자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언어와 언어의 바깥을 함께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말꼬리만 따라가서는 본질과 진실을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언어의 윤곽과 말할 수 없는 관계들에 대한 통찰을 키우는 것이 언어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편협하고 예리한 말의 칼날을 쉽게 휘두르는 세력들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의 바깥에 있는 진실과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안목은 언어와 언어의 바깥에 함께 있다. 말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진실을 보는 눈과 같은 기관이다. 심미안이 구별하는 것은 예술적 아름다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숨은 진실들을 알아보는 안목이고 진실과 허위를 구분해 내는 판단력이다. 누구의 주장과 선동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의 직관으로 도달할 수 있는 판단과 적중의 안목이다. 이것을 갖춘 사람은 집단의 말과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다수의 입장에 서야 안심되는 나약한 현대인들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다. 오로지 스스로 판단하고 바라본다. 언어가 아닌 채로 견고한 세상의 작은 진실들을 직시한다. 작은 진실들 속에 아름다움도 함께 있다.
안목의 수준은 인식의 수준이다. 사람이 보는 것은 세계를 대하는 자세와 같고, 안목은 지각이다. 아는 것들의 수준과 깊이에서 세상의 의미들을 읽어내는 능력이 나온다. 아름다움이란 화려함 뿐 아니라 의미의 깊이와 층위와도 관계 깊다. '멋지다'는 감탄사 그다음의 말이나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안목은 불완전하다. 그 안목으로 살아가는 데도 불편함은 없다. 그런 눈이 열리기 전에는 이것이 왜 아름다운가,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걸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의심한다. 아름다움은 통념과 주관 사이 어디쯤 있다. 이 또한 말이 닿기 어려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