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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Nov 01. 2020

점찍고 수십억 가치가 생긴 그림들

한국의 자존심, 김환기와 이우환

현대미술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미술? 그거 사기 아니야? 점 하나 찍고 온갖 의미를 갖다 붙여서 수억, 수십억씩 가격을 매기고. 그런 거 누가 못 그려, 그건 예술작품이 아니지’

맞는 말입니다. 그저 붓에 물감을 묻혀 점을 찍었을 뿐이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그림이 몇 억이나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애초에 이걸 그림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좀 예쁘게 찍어 놓기는 했지만, 이런 점 하나 대체 누가 못 찍을까요? 미술 작품에 희소성이 있고, 작가의 삶이 가치 척도가 되고, 온갖 의미가 있어서 도록을 보면 알아듣기도 어려운 이야기가 잔뜩 있고, 그런 것들이 비싼 이유가 될 수 있겠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진정 이해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런 그림도 있습니다.

점이 좀 많습니다. 많긴 해도, 이렇게 점찍는 것을 누가 못해서 안 합니까. 시간만 있고, 마음만 먹으면 이런 점쯤이야 수십만 개도 더 찍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점만 찍어도 수억, 수십억이 손에 들어온다면 마다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현대 미술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변명을 해준다고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변명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저 작품들이 그만한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저 물감을 찍어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렇더라도 가치가 있습니다.


방금 글을 쓰다가 중요한 질문을 썼습니다. ‘이런 것도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위 두 그림은 각각 이우환의 그림, 김환기의 그림입니다. 한국에서 그림값이 제일 비싼 두 화가입니다. 화가가 그렸으니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 뭐라 그래도, 작가가 그림이라고 하는데 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림이 무엇일까요? 멋진 자연 풍경을 보고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멋지게 묘사하면 그것이 그림입니다. 초등학생들의 과학상상화가 그림입니다. 원시인들이 동굴에 소와 사슴을 잔뜩 그려 놓은 것, 그것도 그림입니다. 여기서 다른 그림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적이 있습니다. 3살짜리 아이에게 펜을 쥐어주고 그림을 그려보자고 했습니다. 꼬물꼬물 열심히 그리는데 아직 손을 다루는 게 서툴러 그저 동그라미만 잔뜩 겹쳐서 몇 개 그려놨습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물어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라고 합니다. 그저 동그라미를 잔뜩 칠해 놨을 뿐인데 아기에게는 각각 할아버지, 할머니였습니다. 자기 딴에는 명확히 구분해서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못 그린 동그라미가 아이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인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 모습과 동그라미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어떤 그림이라도 경우가 같습니다. 아무리 비슷하고, 똑같아 보이더라도 그림은 그림일 뿐 실제가 아닙니다. 실제를 잘 묘사했다 하더라도 빛의 방향에 따라, 시점에 따라, 사람의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단풍이 예쁘게 물든 숲을 찍는데 눈으로 본 것과 너무 다릅니다. 눈으로 볼 때는 저 빨간 나무가 커 보이고, 뒤의 노란 나무들이 뭉쳐 있습니다. 그런데 카메라로 찍으니 이파리들이 제각기 선명하게 보여서 눈으로 볼 때의 느낌과 다른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보이는데, 친구에게는 사진에서는 땅이 너무 좁아 보인다고 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그려도 사람마다 다른 느낌이 납니다. 그것이 그림입니다. 이것이 실제와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제와 똑같게 그리겠다 마음먹고 그렸다면 말이 다르지만, 사실 그림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3살 배기 아기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올립니다. 뭐,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긴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림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서양미술은 수백 년 간 똑같이 그리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원근법, 명암법 같은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더욱 똑같이 그리기 위해 절대적인 색을 생각했습니다. 빨간 커튼은 빨간색으로 칠하되 어두운 부분부터 밝은 부분까지의 색이 딱 정해지는 것입니다. 나무책상은 연갈색입니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절대적인, 이데아와 같은 객관적인 개념에 근접하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에 접어들며, 사실 그림이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왼쪽처럼 그리는 것보다, 오른쪽처럼 그리는 것이 훨씬 강렬하게, 깊게, 더욱 감성을 자극하더라는 것입니다. 신화와 성경 속 이야기에서 세상의 현실로, 곱고 예쁜 그림에서 강렬한 연출이 들어간 그림으로. 사실 이렇게만 보면 현대인은 알아채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미 저 시기는 수백 년 전에 지났고, 우리는 수많은 근현대 미술을 보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주변의 디자인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렇다 해도 왼쪽 그림보다는 오른쪽 그림이 더 재밌고 와 닿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은 얼마나 잘 그리냐에서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로 넘어왔습니다. 200년 전부터 그랬습니다. 그리고 150년 전부터는 작가가 더욱 당당해집니다. 얼마나 닮게 그리는지가 아니라 내 눈에 들어온 것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

바닷가 풍경이 이렇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리다 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모네의 유명한 해돋이 그림입니다. 잘 그렸다고 해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모네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그림을 그렸던 걸까요? 대충 휘저어 놓고, 빨간 점 하나만 그리면 끝인가요? 끝입니다. 왜냐하면 모네가 저 자리에서 저 장면을 봤을 때 그렇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와 닮았는지 어쨌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른쪽의 그림은 마티스의 그림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시뻘건 색으로 방을 가득 칠해 놓았습니다. 여자에게는 아무런 입체감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주 잘 그린 명작입니다. 지금 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그저 그림이지만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그림이었습니다. 방이 저럴 리가 없으니까요.


급기야 이런 지경까지 갑니다.

액션페인팅이라고 이름 붙이고, 추상표현주의라고 그럴싸한 사조에 집어넣은 그림입니다. 붓에 물감을 묻히고 마구 휘둘렀을 뿐입니다. 작가는 담배를 피우며 재를 털기도 하고, 자근자근 밟기도 했습니다. 이런 행동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까지는 그림이라고 봐줄 만 한데, 이 엉터리 같은 물감 덩어리도 그림으로 봐줘야 할까요? 고전주의 사람이 보기에 낭만주의 그림은 아주 못 그린 그림이며, 낭만주의 사람이 보기에 인상주의 그림은 미완성된 엉터리입니다. 그런데 인상주의 화가에게 표현주의 화가는 아주 뿌듯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림은 작가가 그린 것이 그림이니까요. 위의 액션페인팅은 잭슨 폴록이 했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그린 것이 아니라 행위를 그렸습니다.


칸딘스키는 음악회를 그렸습니다. 어느 쪽이 칸딘스키의 작품일까요?

이쯤 되면 누구나 정답을 맞힐 수 있습니다. 오른쪽입니다. 사람들이 있고, 그랜드 피아노도 있습니다. 그런데 화면을 휘감아 나가는 노란색이 무엇일까요? 음악회라면 모름지기 왼쪽 아니겠습니까? 칸딘스키는 음악을 그렸습니다. 음악회라면 음악이 들어가야지요, 왼쪽은 그저 멈춰있는 사람들이 악기를 붙들고 서있을 뿐입니다. 사실 아주 당연합니다. 그림이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린다는 것은 참으로 편협한 생각입니다.


귀에 들리는 음악을 그리고, 마음속에 솟구치는 감정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00년 전부터입니다. 그러다 잭슨 폴록은 행위를 그렸습니다. 그들의 작품이 인정받는 것은 미술의 범위를 넓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이미 역사 속에 모두가 알고 있던 것입니다. 동굴 벽에 소와 사슴을 왜 그렸을까요? 큰 난제였습니다. 왜 인간이 벽에 동물을 그렸는가. 우리가 접하는 것은 몇 마리의 동물뿐이지만 실제로는 수백수천 마리의 동물 그림이 동굴에 온통 빼곡히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서, 쉽게 말하면 그 동물들을 다 잡고 싶어서입니다. 그저 보이는 것을 그린 게 아닌 소망을 그린 것입니다.


원시인의 그림만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있지 않은 신들의 이야기를 묘사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완벽한 조화를 만든 것입니다. 사람을 조각한 것이 아니라 조화로움을 조각한 것입니다. 중세 그림은 신의 성스러움을 그렸습니다. 보이는 것을 사실대로 그리기는 르네상스부터 근대미술 직전까지, 얼마 되지 않는 잠깐의 유행이었습니다. 또 그러면서도 교회 건축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고, 거대한 그림들 역시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보이는 것만 잘 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림이 대체 무엇일까요? 이우환의 작품, 김환기의 작품도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맨 처음 첨부한 그림에서 점 하나 찍힌 작품은 이우환의 ‘조응’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는 점을 찍은 것이 아니고, 조응correspondence을 그렸습니다. 이우환의 선미술적인 작품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철판 앞에 돌이 하나 있습니다. 리움 미술관에 가면 훨씬 거대한 철판 앞에 선 바위가 있습니다. 이 작품 앞에 서면 느낌이 옵니다. 긴장감, 대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단순히 철판과 돌덩어리를 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우환은 느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작품을 알고, 조응을 보면, 커다란 하얀 캔버스에 찍힌 점 하나를 보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감이 옵니다.


처음에 첨부한 김환기의 그림은 우주입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점을 찍고, 우주라고 하였습니다. 점을 찍은 게 아니라 우주를 그린 것입니다. 무한히 뻗어 있고, 지금도 넓어지는 우주를 그렸습니다. 눈앞의 예쁜 나무 하나도 그림이지만 우주를 그린 그림도 그림입니다. 그리고 좀 보다 보면 우주 같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만으로는 사실 부족합니다. 어째서 수억, 수십억 원까지 가치가 치솟는지 설명이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도 그림이고, 그림이 가치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는 시대적인 배경, 작가의 삶도 이야기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해도 누구나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그저 물감 발라서 찍은 것뿐인데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말장난 같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우환이 찍은 점에서 조응을 볼 필요도 없고, 김환기의 점에서 우주를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이해를 강요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저 물감 덩어리니까요. 저도 어떤 작품을 보면 가치가 잘못 매겨졌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만 가격이 그렇게 치솟은 데에는 그것에 공감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시가 열리고, 작가 개인 미술관이 세워지는 데에는 그만큼 느낌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못 느끼는 사람에게 느끼기를 강요할 수 없듯이, 느끼는 사람에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관객이 그림을 보고 ‘이건 그림이다 아니다’ ‘잘 그린 그림이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작가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관객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3살 배기 애기는 동그라미를 보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올립니다. 저는 별로 공감이 안 되지만, 아기의 부모님은 그렇구나 하고 좋다고 웃을 겁니다.


사실 살면서 이우환의 그림과 김환기의 그림을 실제로 본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미술에 취미가 없고, 전시회 가는 건 딱히 끌리는 일이 아니니까요. 본다고 뭘 느끼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로 보기를 권합니다. 부산에 가면 이우환 미술관이 있고, 서울에 김환기 미술관이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제법 예쁩니다. 현대인의 미감이 그 정도입니다. 아무 무늬도 장식도 없는 디자인을 예쁘다 느끼고, 루이비똥 마크 잔뜩 박힌 모습도 예쁘다고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심지어는 페인트도 칠하지 않아 시멘트가 고스란히 드러난 인테리어가 힙한 카페의 필수조건일 때도 있었습니다. 현대 예술이 사기든 아니든, 모두의 일상 속에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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