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치 May 10. 2021

여러가지 초상화 1

고대 이집트 미이라부터 인스타그램까지

이집트의 미이라에 그린 인물의 초상화입니다.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듯합니다. 앙다문 입술과 힘이 들어간 눈썹, 미간. 깡다구 있어 보이는 눈빛. 자기 일에 책임감이 분명하고, 약간은 깐깐하지만 그래도 털털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우뚝 솟은 코가 인상적입니다.

기원전 400년

이집트 그림의 훨씬 이전, 이 조각은 고대 그리스 조각입니다. 이 당시의 조각은 사람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나 사실적인, 잘 만든 조각이 사실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는 인간의 시대입니다. 여기서 인간이란 ‘이성’을 말합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찬미가 예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황금비가 고대 그리스의 유산입니다.

사실적이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입니다. 자연에는 완벽한 비율이 있는 반면, 각각의 개성이 뚜렷합니다. 아무리 쌍둥이라도 다르게 생겼습니다. 모든 풀은 저마다의 황금비를 간직하지만, 똑같은 모양의 풀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면을 봤습니다. 인간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 사람을 두고도 그 사람의 인상, 눈빛이 아니라 완벽한 인간의 비율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저, 당신, 친구가 아니라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완벽한 상을 뜻합니다.

이를 발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 바탕에는 동물과 다른,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 속에 굳건히 문명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한 위대한 인간의 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술이 자연을 자연 그대로 담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위대한 인간 이성의 찬미가 바로 예술인 것입니다.

그리스 하면 그리스 신화가 떠오릅니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은 신화를 표현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완벽한 인간 상을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 속에 감정, 비합리적인 면 또한 들어갑니다. 이상적인 상을 두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합니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의 예술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에는 완벽한 인간을 조각했습니다. 이성을 총동원하여 이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저는 이를 보며 오늘날의 미적 기준을 떠올립니다. 흔히 ‘성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미감을 존중합니다. 완벽한 인간의 상에 대한 동경심이 있는 것입니다. 한때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성형강국이라 불렀다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미인들을 비꼽니다. 틱톡을 보면 똑같이 생긴 중국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미감을 존중합니다. 저마다의 미감이 있고, 완벽하다 느끼는, 시대의 이상적인 미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고, 턱이 갸름한, 그것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완벽한 인체 비율을 탐미했듯 말입니다.

그래서 이와 비교하여 이집트 미라의 그림을 보면 더욱 재밌습니다. 첫 그림에서는 전혀 이상적인 미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상을 그린 듯 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담아낼수록 못 만든 작품이 되는 것이지만, 이집트에서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쯤에서 동양의 초상화도 한 번 보겠습니다. 동양 초상화 하면 대부분 이런 이미지를 떠올릴 것입니다. 수염 하나하나 그려 넣은, 정성이 가득 담긴 그림입니다. 인터넷을 돌다 보면 뾰루지까지 그려 넣었다고들 합니다. 인물의 성품까지 담아내는 듯합니다. 서양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 보입니다. 더 멋지게, 더 아름답게, 더 인상 깊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담담하게, 차분하게,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어색해 보이는 자세는 마치 트레이드 마크 같습니다. 인물이 감상자를 정면으로 보지 않는 것도 특징이겠습니다. 마주 보는 작품도 있습니다. 눈동자가 중요합니다. 눈을 마주친 느낌을 확실히 주는 그림도 더러 있습니다.

동양의 초상화는 내면을 그리는 목적이 컸습니다. 인물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되, 내면이 잘 드러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지금이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양에서는 오랜 시간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외면에 집중한 시기가 아주 깁니다. 고대 그리스 이후의 이집트 미라 그림을 봤지만 왜 그런지 아래 그림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저는 이런 중세 작품을 아주 싫어합니다. 여담이지만 학생 때 수업을 들은 교수님께서 중세 미술을 연구하셨습니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부른다지만 사실은 연구거리가 가득하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감하지 못합니다. 너무나 재미가 없고, 그야말로 학문을 위한 학문의 느낌이 가득합니다. 직업이 미술사가셔서 재미를 느끼시는 것 같지만, 감상자인 저는 모르겠습니다.

중세에는 회화보다도 저런 식의 건물 장식이 주가 되었습니다. 엉성하게 붙이고, 그린 흔적이 역력합니다. 별로 할 말은 없지만, 개성이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개성이 없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물을 인물로써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의 진행 도구로써 표현합니다. 그 인물의 개인적인 특색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서양 미술에서 아주 오랜 기간의 특징이었습니다. 인물에 파고든 것은 18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그 당시의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을 파고든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200년, 그 이전의 작품에서 인물은 개인으로서의 인물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도구로서의 인물, 그리고 외면적인 명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민등록증, 사원증에 붙이는 명함판 사진과 같습니다. 그런 사진은 ‘이 사람의 생김새는 이렇습니다’가 중요하지, ‘이 인물의 성격, 인상, 분위기가 이렇습니다’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충 찍은 증명사진에서도 분위기가 풍긴다면 찍는 사람이 걸출한 사진작가이거나 인물이 풍파를 겪고 살아온 늙은 어부이거나 날 때부터 난 사람인 일류 모델일 것입니다.

이 점이 동양의 초상화와 많이 다른 점입니다. 오랜 역사에서부터 동양의 초상화는 인물의 외면은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되, 그 내면이 잘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만 봐도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 똑같이 그렸는데, 사진과는 다르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느낌이 옵니다. 사진과 다른 그림입니다. 똑같이 그린대도 동양에서는 인물의 내면을 알 수 있게 그렸다면 서양에서는 증명사진으로서 똑같이 그린 것, 그리고 이야기의 도구로서 화려한 이야기를 위해 장식한 것입니다.

다시 위의 작품으로 돌아가자면… 저렇게 작품의 질이 낮기 때문에 암흑시대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유산, 로마의 위대함이 사라진 시대에 종교가 파고 들었습니다. 마치 문명이 퇴보한 듯, 투박한 교회 건물들과 장식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다시금 꽃피는 것은 동로마가 망하면서부터입니다.

조금 시대를 뛰어 넘겠습니다.

말씀드렸듯, 이런 그림에서는 딱히 볼 거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보자면, 복식을 알 수 있습니다. 당대 사람들의 의상과 헤어스타일, 반지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의 신분을 유추할 수 있고, 거기서 시대상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잘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옷 섬유의 재질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보고 있던 관점으로 보자면 그리 재밌는 그림은 아닙니다. 인스타그램에 ‘셀피’라고 올렸을 때 나오는 아무런 인상, 시점 없이 찍은 그야말로 순간을 남기기 위해서 찍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사진은 찍은 사람, 찍힌 사람에게는 인상 깊을지 몰라도, 제3자에게는 한 번 보고 지나가는 이미지일 뿐입니다. 아마 내일이면 까맣게 잊어 기억나지 않을 이미지입니다. 즉, 인상이 없습니다.

저한테는 이런 그림이 훨씬 재밌습니다. 기법이야 비슷해 보여도, 인체 비율도 이상하고, 사람을 그린 건지 요괴를 그린 건지 이상한 그림에, 머리가 유달리 작아보이는 어깨깡패가 참 이상합니다. 이런 이상한 그림에 인상이 깃듭니다. 무조건 이상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딱 봐도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져와 봤습니다. 비슷한 시기에도 이렇게 다른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그려도 똑같게만 그려 놔야지 하는 것과 이 사람 완전 어좁이잖아 ㅋㅋ, 이 사람 어깨 완전 넓네 ㅋㅋ, 이 사람 도깨비 같이 생겼네 ㅋㅋ 하는 심정으로 그린 것은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낳습니다. 또 감상자도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누가 봐도 이상한 그림이기에 인상을 준다는 게 무엇인지 알기가 편합니다. 그러면 아래 그림을 한 번 보겠습니다.

똑같이 ‘똑같이 그려야지’ 하고 그린 것 같지만 인물을 마주한다는 느낌이 옵니다. 살아있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위 두 그림은 1600년대의 그림입니다. 오른쪽이 화가의 자화상이고, 왼쪽은 그의 작품입니다. 초상화는 아니고,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입니다. 서양의 오래된 그림에서 파란색 천, 옷에 둘러 쌓인 여자가 있다면 성모 마리아고, 아이가 무릎 위에 있다면 예수입니다.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가 어떤 성격인지, 누군지를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표정도 뻔합니다. 고전주의 작품을 보면 다들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인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걸 그리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를 그린 그림을 보면 참 재밌습니다. 멍 때리고 있는 것 같고, 입을 헤 벌리고 눈에는 초점이 없습니다. 머리는 산발이고 눈꺼풀에 힘이 잔뜩 빠졌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 같습니다. 왼쪽 그림은 그림을 보는 느낌인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분명 모델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델은 단지 얼굴의 형상만 제공하는 도구였겠습니다.

초상을 그릴 때, 인물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중세까지는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성경 이야기 전달과 부자의 명함을 남기는 것 뿐이었습니다. 시대가 지나며 르네상스가 오면 인물을 더 정확하게, 멋지게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Renaissance, 재탄생입니다. 종교에서 벗어나 수학과 과학이 발달하고, 고대 그리스에 죽었던, 로마에서 끝나 버린 인간 이성이 다시금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림에서도 원근법, 소실점 같은 개념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 같은 도구로 트레이싱도 하고 말입니다. 이 시기에는 더 정확하게 모사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바로크 시대가 옵니다. 빛과 그림자, 웅장함, 화려함의 시대입니다.

인물을 나타내려 합니다. 그러나 얼굴 자체로는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적도, 시도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소품을 집어 넣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의미하는 상징적인 물건들을 넣습니다. 또는 해골 같은 일반적으로 해석하기 쉬운 것들도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아주 발달하고, 빛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기도 하면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나 연출에 그칩니다. 서양 미술이 인물 자체에 집중한 것은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요즘에도 인물을 보여주려 여러 연출을 하기도 합니다. 조명을 이용하고, 여러 소품들을 넣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스튜디오 사진을 보면 알기 쉽습니다. 그런 느낌입니다. 인물 자체를 보여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 인물을 드러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합니다. 소품, 조명, 의상, 색감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에는 인물 초상은 그저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된 것은 거대한 자연입니다. 풍경화가 등장합니다. 멋진 자연, 햇살이 비추는 멋진 절벽, 멋진 숲이 있는데 이를 아주 커다란 캔버스에 그리기도 바빴습니다. 요청이 온다면 부자, 귀족, 왕족을 그려주기도 했지만, 풍경화가 좀 더 매력적이었겠습니다.


그리고 로코코 미술입니다. 화려하고, 예쁜 색이 주를 이룹니다. 보슬보슬한 터치가 인상 깊습니다. 바로크 미술이 강렬한 대비, 웅장함을 보여준다면 로코코는 귀족들의 화려한 장식이 가득찬 연회장이 떠오릅니다. 요즈음의 셀카로 친다면, 예쁜 필터를 적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전히 인물보다도 그림의 이미지 요소에 집중합니다.

그럼 언제쯤 인물에 집중하는 시대가 올까요?

사실주의를 지나야 합니다. 서양 미술은 르네상스부터 고전주의까지 기술에 집중합니다. 개중에 인물에 집중한 그림들도 있지만, 그 시대에도, 미술 사조로서도 크게 집중 받지 못했습니다. 커다란 흐름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초현실주의 그림이라 하면 살바도르 달리를 떠올리고 20세기를 말하지만, 사실 러시아 등지에서는 수백 년 전에도 초현실적인 작품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있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사실주의는 Realism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 이겁니다. 당시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계몽이 일어난 이후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많은 문학가와 화가들이 세상을 바로 보기 시작합니다. 귀족, 왕조로 이어지던 역사는 사실 1%도 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99%가 넘는 민중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있지도 않은 신화를 그리거나, 극소수의 인물만이 등장할 그림을 그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 낭만주의가 들어옵니다. 낭만적이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강렬한 색채, 현실이 과장된 이미지가 들어가서 낭만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은 그 자체가 화가 개인의 감상을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감상이 잔뜩 들어간 그림입니다. 이 시기 신고전주의 역시 등장합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계몽사상의 두 자식인데, 계몽주의적인 때에 인간의 이성과 감성 모두 주목 받았습니다. 이성에 따르는 사람들은 고전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고, 감성을 따르는 사람들은 낭만주의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실 이들은 모두 자연을 그렸는데, 인물 초상화 이야기를 하니 한 번 가져와 봤습니다.

고전주의는 이성적으로 완벽한 그림을 그리려 했습니다. 빛, 명암이 완벽하고, 형태적으로 빈틈이 없으며, 색채 역시 절대적인 색감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낭만주의 화가들은 더욱 즉흥적으로, 감성을 자극할 색채와 형태를 구사했습니다. 당장 위의 그림만 봐도 붓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작가의 내면, 작가의 감상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실주의로 돌아오면 기법적이기보다는 사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자, 사실주의라기보다 현실주의라는 말이 우리 말 뉘앙스에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인상파 화가들이 또 등장하고, 야수파, 입체파 등등 여러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모더니즘의 시작입니다.

이 그림은 구스타프 쿠르베의 자화상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려 합니다. 오늘날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보고도 성격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이토록 변했습니다. 서양의 고전 미술, 한 200년 전부터 1000년 전까지 그림들의 인물을 보면 잘 그렸지만 별로 느낌은 없습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익숙해서 그럴까요. 학생들의 낙서, 그림을 보면 인물이긴 하나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을 그렸다고만 알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 이전과 이후 그림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을 그렸다의 ‘사람’은 형태, 대상으로서의 사람입니다. 인간을 한 명의 개인, 각자의 역사를 지니고, 감정을 표하며,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간으로 보며 그리게 된 것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지나 인간을 한 명의 인간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50년 전입니다. 이후 수많은 미술가들이 폭발적으로 인간을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보고 나면 셀카를 하나 찍어도 그냥 찍는 건 지루해서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했습니다. 숟가락질 한 번만 해도 행위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한 5살 아이와의 이야기로 이번 글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아직 손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손질이 어색한 아이였습니다. 어느날 화이트보드에 보드마카로 동그라미를 몇 개씩 끄적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물어보니 이건 할머니, 이건 할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알아 볼 수 없는 낙서덩어리지만 아이에게는 보고 싶은 할머니, 재미 있는 할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다음에도 인물 초상화를 계속 보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점찍고 수십억 가치가 생긴 그림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