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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Nov 29. 2019

冊. 후치 수식의 묘미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허새로미


내가 운이 좋아 두 달여에 걸쳐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을 쓰신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10주차 과정의 마지막 시간에는 배운 것을 활용하여 에세이를 한 편 써 내야 했다. 그 어렵다는 자유 주제에 무려 즉석에서 쓸 것을 생각해야 하는 에세이였다. 5문형부터 가정법에 이르는 방대한 영문법 표현들을 아우르는 동시에 충분히 인상적이기까지 하려면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주제여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뜬금없이 떠오른 게 나의 실직 이야기였다. 영작하여 다른 클래스메이트들 앞에서 발표를 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소재였지만 쓸 말은 않았다. 그전에 과제로 제출한 다른 글들보다 head가 장중하고 중언부언이기까지 했던 걸 돌이켜보면 정말 그 이야기를 쓰긴 써야 했었나 보다.


나는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 통고를 받았는데, 사고를 친 적도 없거니와 퍼포먼스는 오히려 우수한 편이었던지라 그게 공정한 처분은 아니었다. 통보받은 당일에는 충격과 분노로 잠이 안 왔다. 그러나 30대 비혼 여성이 하루아침에 실직을 하면 그 울분을 곱씹을 여유조차 분에 넘치는 것이다. 찾아봤더니 마침 한 신생 회사에서 꼭 나와 같은 적성과 경력을 갖춘 인재를 찾고 있었다. 포트폴리오도 자기소개서도 하루 만에 준비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영문 이력서였다. 당시 회사에서 내게 가장 상냥하고 협조적이었던 잉글리시 네이티브 직원, D에게 도움을 청하자 D는 열과 성을 다해 돕겠다는 의지를 표했고 나는 즉시 그녀를 고용했다.


이 대목에 이르러 나는 이렇게 썼다. Seated at the desk that wouldn’t be mine any more one week later, I drafted a résumé to send to her that night.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일주일 후면 더 이상 내 자리가 아니게 될 책상에 앉아, 나는 그날 밤 그녀에게 보내 줄 이력서 초안을 작성했다.” 선생님은 분사구와 관계대명사절의 적절한 쓰임을 칭찬하셨다. 한편 한국어에는 후치 수식이 없다. 영어에서 피수식어 뒤에 수식어구를 덧붙이고 또 덧붙여 미련을 드러낸다면 한국어에서는 애초에 그 문장을 끝낼 생각이 없는 것처럼 서술어를 잇고 또 잇는다. 위 문장을 한국어 스타일로 하면 “나는 책상에 앉아서 이력서 초안을 작성했다. 일주일이 지나면 그곳도 더 이상 내 자리가 아니게 될 터였다. 그날 밤 나는 D에게 그 초안을 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에세이를 처음부터 한국어로 적었다면 당연히 그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발, 일주일 후면 잘리게 생겼는데 그럼 거기서 이력서를 쓰지 일을 하겠냐? 거지같은 회사 콱 망해버려라.” 나는 내 영작문도 마음에 들었지만 한국어 작문 쪽도 나쁘지 않다.


한국어는 전치 수식을 하다 보니 수식어가 길어지면 뭐가 뭐의 수식을 받는지 알아보기도 힘들고 문장의 의미도 불분명해진다. 특히 명사를 꾸미는 말이 길어지면 그걸 서술어로 빼는 게 좋은 문장이라고도 한다. 언어 특성이 그렇다니 그렇게 쓰는 게 맞나 보다 하지만, 후치 수식 쪽이 더 마음에 와 닿는 문장도 많다.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에디 레드메인이 부르는 Empty Chairs, Empty Tables는 이렇게 시작한다.


There’s a grief that can’t be spoken


There’s a grief / that can’t be spoken 공무원 영어 강의 식으로 분석해 보자면, 유도부사 There 뒤에서 주어 a grief와 동사 is가 도치되었고, a grief는 that이 이끄는 주격 관계대명사절의 수식을 받으며, 이때 관계대명사 that은 which와 바꾸어 쓸 수 있다. 직독직해를 하면 “슬픔이 있다네 /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쯤 된다. 한국어로 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문제없으나, 혼자만 살아남고 말았다는 비통함에 도취된 청년 마리우스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There’s a grief, 하고 운을 떼면 그 뒤에 이어질 수식어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There’s a grief that can’t be spoken.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다네”는 슬픔의 과장에 지나지 않지만, 후치 수식어가 달린 슬픔에는 사연이 있다.


관계대명사절뿐 아니라 부사절도 명사절도 다 뒤로 보내버리는 영어 특유의 문장 구조가 나의 심금을 울린 적이 또 있다. 영화 [캐롤]에서 캐롤이 테레즈에게 보내는 이별 편지의 한 문장이 그랬다. 나는 이 영화를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제트 기류가 약해진 틈을 타 남하한 북극의 한파가 서울 상공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어느 구정 연휴에 홍대CGV에서 혼자 봤다. 구정 연휴의 영화관이란 공부와 취업과 결혼과 출산과 육아와 승진과 부동산 이야기로 서로의 신경을 긁는 일에 지친 일가 친척들이 보다 건전한 여흥을 찾아 나섰다가 이르게 되는 곳이다. 그런 집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재미있어 보이는 영화는 벌써 매진되고 [캐롤] 같은 수상쩍은 영화만 간신히 표가 남게 된다.


상영관을 채운 자들 절반은 그게 로맨틱 코미디인 줄 아는 듯싶었다.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은 눈빛을 주고받던 캐롤과 테레즈가 갖은 내적 외적 갈등을 겪다가 충동적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할 때까지도 영화 주제가 두 헤녀의 연령과 계급을 뛰어넘은 우정 이야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관객들은 수 분 후 화면을 가득 채우는 베드씬에 이르러서야 “어머, 어머”를 연발하다 하나둘씩 일어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여자 알몸은 보고 싶어서 “뭐 해, 빨리 안 나오고”라는 타박을 들으면서도 한 손엔 눈부시게 빛나는 스마트폰을 쥐고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서 있던 중장년 남성들도 있었다. 관객들이 떠나고 산만해졌던 주의가 다시 스크린에 집중되었을 무렵 테레즈는 혼자 남겨졌다. 이별을 알리는 편지에서 캐롤은 이렇게 썼다.


Please don’t be angry when I tell you that you seek resolutions and explanations because you’re young.


종속절 접속사가 세 개나 들어간 문장으로 모든 종속절 접속사는 뒤로 빠졌다. 가정(when)도, 할 말(that)도, 이유(because)도 뒤로 보내고 나니 부디 노여워하지 말라는 캐롤의 당부만이 남고, 이것이 테레즈가 이별을 납득하지는 못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분이 된다. 극장 상영판의 번역이 훌륭했는데 기억이 정확히 안 나 아쉽다. 내가 야매로 번역하면 “당신이 해답과 설명을 바라는 건 젊어서 그런 거라고 내가 말한다 해서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요.”인데, 이 말에 앞서 “내 어떤 말로도 당신에게 이별의 이유를 납득시킬 수는 없겠지요”라는 변명이 나오긴 했다. 어느 쪽이든 목적지 없는 여행의 기착지에 어린 연인을 버리다시피 두고 떠나는 사람의 말로는 너무 모질다. 틀림없이 해명을 요구할 연인에게 “그건 너가 어려서 그래”라고 하는 건 그냥 꼰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여기에 종속절의 묘미가 있다. 캐롤과 달리 테레즈는 젊어서, 이별의 이유를 따지고 들겠지만 기실 테레즈가 가진 경험과 언어로는 그것을 미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캐롤이 그것을 알아서 그렇다고 말하면 이번에는 테레즈가 화를 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요, 라고 캐롤은 호소하는 것이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가 when과 that과 because 이하에 제시돼 있다.


번역을 아무리 유려하게 하여도, 종속절이 세 개나 붙은 문장이 한국어로 듣기 좋은 이별 인사가 될 리 없다. 접속사마다 끊어서, “다음 말을 듣고 화내지 말아요. 당신은 지금 해답과 설명을 듣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당신이 젊어서 그런 거겠죠.”라고 하면 싸우자는 뜻이다. 한국의 캐롤이 한국의 테레즈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에는 모질어서도 꼰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영어가 뒤에 구구절절 종속절을 달지언정 Please don’t be angry하고, 우아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언어라면 한국어는 겸손하게 돌려 말하는 언어다. 수동 공격에 특화되어 있어서 홀연히 한 사람이 떠나며 이루어지는 결별보다는 뒤끝 질척한 치정극의 서막을 올리는 데 더 어울리는 언어이기도 하다.


Please don’t be angry when I tell you that you seek resolutions and explanations because you’re young. 내가 한국의 캐롤이라면 이 말을 이렇게 하겠다.


“그토록 젊고 정연하고 열정적인 당신, 그리하여 나의 모자란 말로는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여도 구차해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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