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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Dec 21. 2019

冊. Please Share Your Context

[컬처 맵], 에린 메이어

영어로는 불필요한 말

나의 오랜 지인 중에 오타쿠가 있어 어느 날은 그녀가 2차 창작 그림들을 그려 올리기 위한 전용 계정을 만들면서 “내 그림을 구독만 하려고 만든 (수상쩍은)  계정들은 팔로우를 받고 싶지 않으니, 나랑 같이 교류하실 분들만 팔로우 부탁드려요”라는 말을 바이오(프로필 페이지)에 영어로 적어두고 싶은데 그 말을 번역해 줄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나는 앞의 부사절을 떼어버리고 “I only accept the followers who will interact with me on my Twitter timeline(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저와 교류하실 분들의 팔로우만 받겠습니다)”라고 야매로 번역해주었다. ‘구독만 하려고 만든 계정’, 소위 구독계라는 것의 다소 음습함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을뿐더러, 영어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요구를 할 때 구구절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언어라는 인식이 있어서였다. 영어에서 요구나 요청을 하는 문장에 부사절이 붙는다면 그것은 이유가 아니라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이고, 그나마도 절보다는 전치사구가 더 즐겨 쓰인다. 이를테면 for your protection(귀하의 보호를 위해), for security reasons(보안상의 이유로) 같은 구들이 그것이다.


지인은 흡족해 보였으나 나는 혹 저 문구가 트위터의 일부 한국 또는 일본 오타쿠 분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지 내심 염려하였다. 저 말은 문자 그대로 서로 멘션을 주고받으며 어울릴 사람만 팔로우를 받겠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데, 그렇게 하겠다는 이유도 목적도 밝히지 않았으므로 고맥락 문화권의 사람들은 이제 저 문장 하나에 어떤 의도가 생략되어 있는지를 고심하기 시작할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인의 그림 실력은 뛰어나다. 그러니 자기와 수준이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리겠다는 뜻으로 읽힐지도 모르고 비사교적인 사람과는 불쾌해서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읽힐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어나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를 써 놓기로 한 것은 지인의 결정이었으므로 나도 그것을 더 고쳐보자고 하지 않았다.



[컬처 맵], 고맥락 문화와 저맥락 문화의 커뮤니케이션

[컬처 맵]은 글로벌 비즈니스 세계에서 타 문화권 출신인 사람들과 더 잘 어울려 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전반적 의사 소통, 피드백, 리더십, 설득, 의사 결정, 신뢰, 의견 대립, 시간 관념 측면에서 고맥락 문화권 사람들과 저맥락 문화권 사람들의 말/일하는 방식을 비교한 책이다. 고맥락 문화란 그야말로 맥락에 많이 의존하는 문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일본, 중국, 한국이 사이좋게 이 문화권에 속하며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말해지거나 쓰인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말해지고 쓰인 상황에 의존하여 소통을 한다. 개인보다는 그 개인이 타인과 맺는 관계가 더 중시되고 그러므로 ‘나’보다는 ‘우리’가, 자칫 상대방의 kibun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직접 표현보다는 간접 표현이 힘을 얻는다. 기실 관계의 힘이 거의 모든 것을 압도하므로, 상대의 나이, 성별, 직업, 직급, 출신, 재산 등등 인간 관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정보 없이는 마음 편하게 대화조차 나눌 수 없다. 이번에 한 번 보고 말 사이가 아닌 것 같으면 집요하게 나이를 묻는 것도 그 때문 아닌가 싶다. 저 사람이 나보다 언니인지 오빠인지 동생뻘인지를 빨리 확인해야 앞으로의 사귐에서 내가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인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유교 윤리의 강력한 영향력이 작용하는데, 관계에 서열이 더해지면 손아랫사람이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눈치’라는 것을 익혀야 한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말은 ‘떡’과 ‘같’이라는 음절이 반복되고 두 구가 대응을 이루고 있어, 즉 형식이 그럴싸해 내용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주어가 없어서 벌써 난관에 부딪히지만) “I speak like a shit, but you (should) get me right.”쯤 된다. 시발, 니가 X같이 말하는데 왜 내가 니 말을 이해해야 됨? 고맥락 문화권에서는 그래야 한다. 이제 내가 이 문화권에 적응하는 데 장렬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면 적절한 돈과 (양질의 관계를 전제로 한) 소속감이 필수라는데 이번 생은 잘 안 될 것 같다.


내가 한국어 자체는 못하는 편이 아닌데도 많은 한국인과 대화가 어려운 것은 고맥락 문화의 특성과 그 문화의 엑기스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국어의 특성 탓이다. 글자로 쓰면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데 억양이나 뉘앙스에 따라 달라지는 말을 구별해 알아듣는 게 나는 특히 힘들었다. 초등학교 때 급식을 남겼더니 선생님이 “양파도 먹어야지.”라고 해서 나는 선생님이 대신 양파를 먹을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알고 보니 나더러 그걸 먹으라는 말이었다든지, “불평할 거면 하지 마”라고 하기에 얼씨구나 하고 하지 않았다가 야단만 더 맞았다든지 하는 경험 때문에 나는 점점 더 정확한 말과 맥락 공유에 집착하는 사람이 됐다. 남들은 잘 안 하는 걸 하려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또 점점 빨리 말하게 돼서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이라면 회사에서 그래도 일 잘하는 사람,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 축에 든다는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알기 쉽게 정리해서 제꺽 공유하는 버릇이 아무래도 도움이 됐다.


나쁜 점이라면 고맥락 문화권에 훌륭하게 적응한 사람들과 일하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점이다. 나의 예전 팀장은 매사에 주어를 생략하는 사람이었다. “누가요?”라고 물으면 자기 말을 끊는다고 불편해해서, 말이 다 끝나길 기다렸다가 물어봤더니 스스로 한 말도 기억 못 해서 대화 전체를 되감기해야 하는 비효율적 소통이 팀장과 나 사이에 심연처럼 가로놓여 있었다. “그럼, A로 할까요?”가 제안이 아니라 의사 결정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도 나는 두 달이 걸렸다. 두 달이나 걸린 까닭은, 그렇게 결정된 일이 두 달간은 운좋게 괜찮은 성과를 내다가 별안간 틀어지자 그 책임이 나한테 넘어왔기 때문이다. “그 말을 꺼낸 건 제가 아닌데요.” “그때 우리가 같이 결정했잖아요.” “언제요? 저는 ‘팀장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세요.’라고 했잖아요.” 고맥락 문화권에서는 상사의 말에 두 번 이상 말대꾸를 해서도 안 된다. She spoke like a shit, so I failed to get her right.


또 놀랍게도 매번 맥락을 공유하는 나의 방식을 피곤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저도) 다 아는 건데 (님은) 왜 자꾸 말하세요.” 나는 그게 질문인 줄 알고 “세부 맥락은 계속 바뀌는데, 그래도 목적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목적에 맞게 일하자는 뜻이에요.”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그런 걸 일일이 말하거나 말해달라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요!” 하고 싶은 말을 수사법으로 돌려말하고 그 의도를 알아서 간파해주지 않으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과 일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매사 confirm과 check를 안 할 수 있겠냐고. 마치 그 사람의 눈에는 알피지 게임에서처럼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각자가 가진 정보의 양과 급이 떠올라 있어서 그런 것은 굳이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퍼포먼스는 제가 더 높을까요?’ 내가 그렇게 묻지 않은 건 그 사람처럼 설의법을 능숙하게 쓸 줄 몰라서였다. 혹시나 sarcasm이 아니라 질문인 줄 알고 대답해주면 어떡해. 처음부터 그 사람이 “목적은 잘 알고 있으니까, 바뀐 세부 맥락 중 우리 업무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것들만 정리해서 공유해 주시겠어요?”라고 요청했으면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해줬을 텐데.


[컬처 맵]을 읽다 보면 글로벌 비즈니스 월드에서는 저맥락 스타일의 영어로 소통하는 게 유일한 해답처럼 느껴진다. 글쓴이도 아예 ‘팀원들의 출신지가 서로 다르면 저맥락 스타일로 소통해야 된다’고 못을 박는다. 나는 종사하는 업의 특성상 일터에서 영어를 좀 쓰고, 그게 내가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기 중 하나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하는 일은 다 영어로 했으면 좋겠을 정도다. 그만큼 영어가 대부분의 일에서 요구되는 명료함을 충족시키는 언어인 까닭이다. 이 책에 따르면 같은 영어라 하더라도 미국인의 의사 소통이 영국인의 의사 소통보다는 훨씬 더 저맥락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영어 쓰는 영국인이 한국어 쓰는 한국인보다 맥락에 더 의존하기는 어려울 터.


맥락 공유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상으로도 나는 영어 쪽이 더 명확해서 좋다. 영어는 주어와 동사가 없으면 문장으로 쳐주지도 않는다. [고종석의 문장]에서, 한국어가 주어를 자주 생략하는 것은 한국어의 특성일 뿐이므로 외국어와 비교해서 뭐 어쩌고 하지 말랬는데 그 특성이 나는 불편한 것을 어쩌겠는가. (물론 영어에는 수동태라는 전가의 보도가 있다.) 부유하는 생각을 붙들어 말로 빚을 때 막연하면 막연할수록 나는 그걸 영어로 써본다. 동사 자리에서부터 막힌다면 그것은 굳이 말이나 글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 잡생각이다. 5문형에 딱 맞아 떨어지는 문장이 나와야 비로소 나는 할 말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반면 한국어에서는 서술어가 문장 맨 끝에 오는 바람에, 말을 할 때는 종종 생략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주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불완전하거나 틀린 문장에 쓸 만한 정보가 들어 있다고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업무에 필요한 정도의 영어를 적절히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나면 영어로 이메일을 쓰는 게 한국어로 쓰는 것보다 마음 편하다. 평생 영어를 써 온 사람들로부터 “You are one of the clearest and most well-organized managers I’ve ever worked with.” 같은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덤이다. 또 그것이 저맥락 문화권의 영어이므로 나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네이티브가 아니니까 다른 저의가 있다 한들 모른 척하기도 더 쉽다.) 한국어로 하면 “정말 딱 부러지시네. 어디 가서 손해는 안 보겠네.”라는 말이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헤아리느라 시간이 걸린다. 고맥락 문화권에서 미스커뮤니케이션의 책임은 대개 듣는 쪽에 있고, 특히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고 하면 권력 낙차가 존재하는 관계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권력이나 권력차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한들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쪽이 감정 노동을 하게 돼 있다. 저맥락 문화권에서는 X같이 말한 쪽에 잘못이 있다. 발화 시점에서부터 주의가 요구되는 까닭에 미스커뮤니케이션의 발생 확률도 낮아지고 문제가 생긴다 한들 책임 추궁과 해결의 시점도 앞당겨진다. 내가 일할 때 저맥락 스타일의 영어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다.



말해지지 않은 정보의 해석 문제

고맥락 문화권 언어의 또 다른 문제는 ‘말해지지 않은 정보’와 관련이 있다. 이걸 제일 잘 보여주는 게 일본의 혼네 다테마에인데, 이 분야에서 그 나라 사람들을 따를 자는 없겠지만 나는 한국(어)에도 이 ‘말해지지 않은 정보’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암묵적 룰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겸양은 한국 사회에서도 미덕이기 때문이다. 또 한국어에서 반어나 중의적 표현이 즐겨 쓰이는 것은 이 언어 사용자들이 말 뒤에 의도를 감추는 데 그만큼 능숙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혼네 다테마에가 철저히 고수되는 것도 아니어서, 한 사람의 의도가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기까지 오히려 더 많은 수고가 드는 건 아닌지 나는 의심해보곤 한다. 어떤 말은 직설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 말이 나온 상황에 따라 돌려 말해진 것일 수도 있다. 이를 해석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가 해석한 바에 따라 취한 행동에 상대가 반응할 때까지 그 해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도리가 없다. “괜찮아요”라는 말에도 이중성이 있으므로 언제까지고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흡사 슈뢰딩거의 발화 의도다.


이것은 듣는 사람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도 피곤하게 하는 언어적 특성 혹은 관습이다. 나는 중요한 용건을 전달할 때일수록 간접 표현은 삼가고 남이 몰랐으면 하는/모르는 게 더 나은 것은 아예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지 좀 되었으나, 이 원칙을 이마에 문신으로 새기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어떤 사람들이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억측해 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을 피해 망상으로만도 몰아갈 수 없는 게, K-사회에는 돌려 말하는 것을 예의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누구의 말은 곧이곧대로 들어야 하고 누구의 말은 적극적으로 상상해 가면서 들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게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성에게는 쿠션어 사용, 즉 ‘예쁘게 돌려 말하기’라는 의무까지 부여되어 있으니 내가 예쁘게 둥글게 좋게좋게 말하지 않는 바람에 자신에게 큰 반감을 품었다고 오해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이것은 여성에게는 “B안이 이러이러해서 A안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보다 “B안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사회적 인식의 잘못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함께 긴밀히 일할 사람에게 미리 알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용건, 요청, 이슈가 생기면 바로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무 말이 없으면 진짜로 할 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명확한 말과 글로 일하고 싶을 뿐

얼마 전 글쓰기 워크숍에서 ‘외국어나 SNS 유행어를 섞어 쓰는 언어 생활’에 대한 의견을 글로 적어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사원 평균 연령이 내 나이보다 낮은 직장에서, 그것도 절반은 영어를 쓰며 일하다 보니 이제 모국어의 어휘력도 영어의 어휘력도 본래 나 정도의 경력과 능력을 갖춘 자에게 요구되는 만큼에는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업무 용어는 조사와 접사와 어미와 대명사를 제외하면 거의 영어다. 어젠다를 어나운스하고 컨텍스트를 쉐어하고 이메일을 포워딩하고 미팅을 위한 인비를 보내다 보면 원래 그걸 한국어로 뭐라고 불렀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십여 년 전 다니던 보수적인 회사에서 ‘작일에 상신한 기안을 명일까지는 결재해 주시기를 요청드리옵고…’ 같은 말을 썼던 것을 상기하면 언제는 업무 용어에 간결하고 명료한 우리말이 쓰이기는 했었는지, 그전에 한국어가 간결하고 명료한 언어이긴 한 것인지 깊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 나는 이렇게도 적었다. [외국어나 유행어가 한국어의 지위에 위협이 된다면 그건 한국어가 면역력도 응용력도 없는 형편없는 언어이든지 한국어 수호자들이 게으른 탓이다.]


일하는 데 영어가 필요한데 한국어에 영어를 좀 섞으면 어때, 어떤 말을 제대로만 쓸 줄 안다면 나는 그것의 출신 같은 건 묻지 않겠다. 그러니 모쪼록 Please share your context whenever you start a work-related conversation, as if you were from a low-context culture. Never speak like a shit unless you want to be treated like a sh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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