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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Feb 02. 2022

住. 사라지는 모든 것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대하는 마음에 관하여

연초에 친구가 고양이를 맡겼다. 원래 안면이 있던 고양이라 보름이 좀 넘는 시간을 단둘이 재미나게 보냈다. 모든 일이 그렇듯 물론 트레이드오프도 있었다. 나는 직접 고른 물건으로만 가득한 내 작은 집을 가능하면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는데, 고양이가 오는 바람에 화장실의 절반은 고양이 화장실이 차지하게 됐고 현관 앞 통로를 커다랗고 흉측한 종이 스크래처가 가로막았다. 스크래처는 고양이가 가구를 긁을까 봐 친구가 특별히 주문해줬는데, 좋은 점은 전부 종이로 되어 있어 버릴 때는 집앞에 그냥 내놓으면 알아서 수거해 갈 거라는 점이었다. 친구가 고양이를 맡기러 온 날 그 얘기를 했더니, “사자마자 버릴 생각부터 하고 있네.”라며 웃었다. 나는 준비성이 철저한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 뭔가가 생기면 그게 없어질 때도 계산에 넣는다. 그래야만 내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일에도 대처할 수 있어서다. 나의 준비성은 위기 대처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그게 없어서 생긴 것이다.


생활의 변화도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 고양이가 드나드는 침실은 24시간 문을 열어놓고 지내야 하는 한편 고양이 청정구역으로 지정된 옷방은 하루에 딱 5분씩 두 번, 도합 10분간만 머무는 공간이 됐다. 가구에 방수 커버를 씌우고 화장실을 치우고 밥과 물을 챙기고 고양이와 놀아주는 시간을 하루 1시간 정도로 잡고 출퇴근 시간과 수면 주기를 조정했다. 나가 있는 동안은 혹시 고양이가 날 따라 나왔는데 내가 모르고 문을 닫아버린 게 아닐까, 밖을 보라고 조금만 열어둔 창문의 고정 장치를 고양이가 혼자 풀고 창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다. 귀가하면 그 걱정이 무색하게 고양이가 나와서 몇 분간 나를 반겨주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인 나날이었다. 잠시 맡았을 뿐인데도 이토록 애틋한데 몇 년간 살뜰히 고양이에게 애정을 쏟아부은 주인의 마음은 어떠랴 싶어 친구에 대한 애정도 덩달아 깊어졌다.


고양이는 다행히 무던하여 첫 주에 새 환경에 적응했다. 5일 차부터는 침대에 올라와 내 발치에서 잠들고 새벽에 나보다 먼저 깨서 내가 일어날 때까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한밤중에 목이 말라 깼는데, 고양이도 같이 일어나 주방까지 따라 나왔다. 비몽사몽간에 발치에 어른거리는 작은 동물 그림자를 향해 나는 “—야” 하고 이름을 불렀다. 입밖에 내고 보니 고양이 이름이 아니라 20년쯤 전에 집에서 키운 강아지 이름이었다. 20년간 그 강아지를 떠올린 적은 있어도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다. 단 몇 주라 하지만 동물과 한집에서 ‘산’ 것이 20년 만이었고, ‘집에 반려동물이 있다는 감각’이 20년 만에 되살아나 이제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강아지의 이름을 무심코 부르게 한 것이다. 나는 까닭도 없이 아주 슬퍼져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모르는 이름으로 불렸어도 고양이는 개의치 않았다. 잘못 부른 게 미안해 얼른 고쳐 불렀는데 귀엽게 하품이나 하며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고등학생 때 집에서 개를 키웠다. 내가 아니라 새끼강아지를 가족이 데려온 것이어서 ‘내’ 강아지라는 감각은 없었고, 물론 귀여워는 했지만 종종 귀찮아서 돌보는 일을 슬그머니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미루곤 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지나 나는 독립을 했고, 그 후로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개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개를 유기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개가 사는 집에 다시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20대에는 생존이 목전에 걸린 이슈여서, 그다음엔 생업이 바빠서 개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독립 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할 일이 없기도 했다.


고양이를 “—야” 하고 불렀을 때에도 잊고 지냈던, 개에 대한 애정이 애틋하게 솟구쳐 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나 애틋했다면 반평생 개를 한 번도 못 만나고도 지금껏 멀쩡히 지낸 게 이상한 일이다. 갑자기 그 개가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거나, 20년 전 추억에 새삼 젖었던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 순간에 나는 맡은 고양이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친구가 고양이를 데려온 데에는 나름의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다. 선뜻 고양이를 맡아주겠다 할 만큼 친밀한 우정에도 물론 두 사람이 쌓아 온 역사가 있다.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순전히 우연에 우연히 더해져 잠깐 이 집에서 홈스테이를 한 것뿐인데, 그 우연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개도 친구도 고양이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2022년 1월 어느 한밤중에 불현듯 슬프고도 사랑스러운 기분에 젖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게 자다 말고 깨어나 신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취약해진 인간이 잠시간 빠져든 감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그 감상이 사람을 움직여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작용하기도 한다.


고양이가 있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해 내 고양이처럼 보살폈다. 올겨울은 딸기가 흉작이라, 맛있는 딸기나 맛있는 딸기가 들어간 디저트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아무튼 힘 닿는 데까지 구해서 양껏 먹었다. COVID-19로 가속화된 전 세계적 기후 위기로 커피도, 설탕도 작황이 좋지 않다는데 작년에도 올해에도 나 하나 소비할 만큼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해가 바뀌어도 기세가 움츠러들지 않는 팬데믹 때문에 당분간 해외여행은 요원하나 나는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하고도 가보고 싶은 나라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웬만큼 가봤기에 요 당분간은 그 추억에 기대어 지낼 수 있다. 좋은 것, 사랑스러운 것은 누릴 수 있을 때에 실컷 누려야 한다. 그런다 해도 그것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 갑자기 상실감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실컷 누렸던 것, 향유했던 것, 애정을 끝까지 쏟아부었던 것이 사라지고 나서 찾아오는 감정에는 명확한 이름이 있다. 거기에 이름표를 붙여 기억의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놨다가, 그러고 싶은 날 꺼내어 이리저리 비춰보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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