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쇠한 오타쿠의 유감
어찌된 연유인지 3D보다는 2D가 좋고, 긴 영상에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왓차에서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게 되었다. 2시간짜리 영화는 엄두가 안 나 못 보면서 20분짜리 애니메이션은 앉은자리에서 8편씩 보니까 결과적으론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은데, 후자에는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즐거움을 연장해 가는 묘미가 있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 편씩 〈귀멸의 칼날〉 유곽편 최신화를 보는 게 낙이다.
슬프게도 노안이 일찍 오는 바람에 만화책 원작은 접하지 못하였으나 애니메이션은 ‘정상급 인기작은 이 정도까지 돈과 혼을 처바를 수 있다’는 것을 매 화마다 기록 경신해 가며 보여주는 수직秀作임이 틀림없고,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서의 재미도 흘러넘친다. 트위터에서도 종종 실트에 올라 화제가 된다. 나는 1기도 1주일 만에 보았고 어쩌다 보니 극장판 〈무한열차〉도 두 번이나 보러 갔었다. 〈무한열차〉 편에서는 단연 주柱인 렌고쿠가 주연이었다. “마음을 불태워라!”하고 문자 그대로 스스로를 불사르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은 크게 동하지 않았다. 그 장면만이 아니라 이 작품 전체가 그랬다. 불타오르지 않은 것치곤 너무 열심히 보고 있지 않느냐고? 남는 시간에 할 일이 없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소일消日에 해당한다. 그리고 나는 워낙 성실하여 한번 무엇을 보기 시작하면 어지간한 노잼이 아니고서야 끝까지 본다.
성실할 뿐 아니라 내게는 오타쿠의 혼이 있다. 오타쿠란 무엇인가를 설파할 작정은 아니고, 무언가를 그저 좋아할 때와 ‘덕질’할 때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이 혼이 활활 불탔던 것은 재작년 파이널 판타지14 5.0 패치 〈칠흑의 반역자〉를 플레이할 때였다. 나는 가끔 돈이나 쓰고 게임은 새 패치가 나왔을 때 메인 스토리만 열심히 밀면서 다른 때는 서버에 1의 과부하도 주지 않는, 게임사가 제일 좋아하는 유형의 라이트 유저인데 이 메인 스토리를 좋아하는 정도가 심하다. 8시간 일하고 퇴근해 새벽 두시까지 6시간씩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심적으로 물리적으로 눈물을 흘린다. 플레이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게임 캐릭터에 대해, 그 캐릭터의 선택과 비선택에 대해, 공식에서는 일언반구도 한 적이 없는 망상적 설정에 대해 트위터에서 몇 시간이고 지껄여댄다. 2017년부터 이 게임도 트위터도 같이 해 온 친구들이 있어 각자 망상의 나래를 펼치다 밤을 홀딱 지새운 적도 있다. 새로운 패치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출시 후 3개월은 만성 수면 부족, 영양 부족에, 생계를 위한 노동을 마치면 쏜살같이 퇴근해 에오르제아에 접속하는 나날을 보냈다.
사회에서는 건실한 직장인, 그것도 일 잘한다는 평가를 솔찬히 얻는 직장인이 오타쿠의 혼 같은 것을 지니고 있으면 성가시지 않은가. 몹시 성가시다. 오타쿠의 혼이 성가신 것이 아니라 직장인의 정체성이 성가시다. 1년 차도 아닌 시니어가 분기 목표 설정 회의 중에 별안간 이 혼이 타오른다고 책상 밑에서 트위터를 켤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음 차례가 우리 팀 목표 공유이고 내가 팀장인데. 지속 가능한 덕질을 위해서라도 생업은 열심히 하는 게 좋다. 더구나 최근에는 일을 덕질처럼 즐기는 사람이 인재라고 추앙받는다. 스타트업 면접에서 “어떤 일을 끝까지 해본 경험이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바로 지원자에게 오타쿠의 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끝까지’ 가 본 오타쿠 경험이라고 하면 역시 6년 전 트위터에서 한창 흥했던 모 장르 덕질이다. 현재 〈귀멸의 칼날〉이 누리는 인기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이었다. 당시 나는 애니 덕질에서 역시나 빠질 수 없는 2차 창작의 세계에 발을 들여 ‘대운동회’니 ‘디페스타’ 같은 종합 동인행사뿐 아니라 장르 온리전, 배포전까지 샅샅이 훑으며 부스에서 책을 팔았다. 내 생에 이 2차 창작을 한답시고 쓴 글만 백만 자다. “이걸로 자기 글을 썼으면 책 다섯 권은 냈지”라는 것은 비非 오타쿠의 감각이다. 오타쿠의 혼은 일단 불타오르면 수지타산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하면 좋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심지어는 해야만 해서 하는 것이다. 한때 출판계에 잠깐 있었으니 물성에 있어서도 여느 책에 뒤지지 않는 것을 만들리라 다짐하며 나는 책 제작에도 여간 심혈을 기울인 게 아니었다. 팔아서 돈을 벌려 한 것도 아니고, 2차 창작 세계에서는 글이 그림의 인기를 이길 수 없어서 많이 팔려봐야 100권 남짓이었던 내 책은 제작비를 간신히 웃도는 수익을 남기고 끝났다. 소위 ‘황금 연차’였던 나의 인건비는 셈에 넣지도 않았다.
그 시간에 투잡을 뛰었더라면 책 매출의 배를 벌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경영자의 관점으로 보면 나는 돈도 시간도 에너지도 손해만 봤다. 2차 창작은 그 창작물의 저작권은 내게 있어도 원작의 저작권이 내게 없으므로 어디 내놓고 자랑할 것도 못 되어, ‘무엇이 남았냐’고 한다면 남은 것은 혼을 불태운 추억뿐이다. 가끔 놀러오는 손님들이 “이건 무슨 책이야?”리고 묻게 만드는 책 몇 권뿐이다. 오타쿠한테 이보다 더 값진 자산이 어디 있나.
“어떤 일을 끝까지 해본 경험이 있나요?” 이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막상 설명하려면 난처하기는 할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오타쿠 히스토리를 구구절절 털어놓으면서까지 일자리를 구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오타쿠의 혼을 불태워서든, 남다른 책임감을 타고나서든 뭔가를 끝까지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요즘 회사들이 찾는 이유도 알 것은 같다. (그 회사에서 시키는 일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관해, 회사도 물론 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집요함이 있어야만 성공시킬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이 집요함도 갈고닦는 것이어서 발휘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른 것이다.
최근 나는 “좋겠다, 오타쿠는.” 같은 말을 달고 산다. 흥하는 장르가 있고, 굿즈든 동인지든 손에 넣을 재력이 있는데 혼을 불태우지 못하는 것이 실로 유감스럽다. 콘텐츠의 양도 질도 날로 번성하고 덩달아 눈도 높아진 탓도 있을지 모른다. 또는 불혹에 가까운 나이,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는 평정을 드디어 갖추게 된 것인가—나의 가설인데, 40년쯤 산 사람이 미혹되지 않는 것은 평정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두뇌와 신체가 퇴화해서인 것 같다. 이제 새벽 두 시까지 게임을 하면 등이 아프다. 캐릭터 설정집의 쬐끄만 글씨가 잘 안 보여서 아이폰 카메라로 확대해서 읽어야 한다.
나이 들어 기력이 없어 오타쿠의 혼도 쇠하는 것이라면 슬프다. 나는 불혹 아니라 지천명, 이순에 이르러서도 원작의 아주 작은 떡밥만 보고도 “A랑 B는 사랑을 한다고”를 부르짖고 싶은 마음이 있다. 오타쿠 혼을 불사르는 것은 여러모로 생활의 지장을 초래하나 어차피 내 생활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며, 인간으로 태어난 주제에 열역학 제1법칙을 거스르며 뇌내 엔돌핀을 무한 생성해 내는 재간은 그 혼밖에 부리지 못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