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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Jan 12. 2020

冊. ‘ 가난’에 어울리지 않는 말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홍차와 장미의 나날]

몇 년 전 일부 트위터리안들에게 공분을 산 칼럼 한 편이 있었다. ‘우아한 가난’에 관해 설파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다루는 책([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을 실은 꽤 재미나게 읽었다. 독일어 원제는 [Die Kunst Des Stilvollen Verarmens]고, 구글 번역하니 영어로는 [The Art of Stylish Impoverishment(스타일리시하게 가난해지는 기술)]이다. 작가 소개부터가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언론인”으로 시작하는데 과연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가난에 대한 태도도 기품이 있으셨다. 한국식 “소확행”(이것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지마는)과 비교하면 어쩐지 이쪽의 격이 떨어져 보인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은 양반 제도가 폐지된 지 1세기도 더 지나서 그럴 것이다. 고결한 블루블러드가 흐르는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물질주의의 천박한 유혹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을 사는 법을 아는 자신의 혜안과 식견을 은근히 내세우는데, 어쩌다 보니 좀 까는 것처럼 되어 버렸지만 진짜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저자가 한때 잘나가는 언론인이었고 일시적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실업 상태에서 교양 있고 부유한 지인들과 여전히 친교를 유지할 여력이 되는 게르만계 백인 남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impoverishment라는 단어 선정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책을 덮을 때까지도 해소되지 않았을 뿐.


문제가 되었던 칼럼이 공분을 산 것도 그 지점이었다. 그 칼럼에서는 ‘가난’을 ‘10년 후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로 규정했다. 아울러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추구할 수 있는 ‘우아함’에는 택시 승차, 양질의 의복과 음식 구입, 더 나은 뷰를 가진 방에 월세를 더 지불하는 행위가 포함되었다. 크든 작든 돈으로 위안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베풀어 준 혜택이니 응당 누려야 한다. 또 ‘가난함’도 ‘우아함’도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까닭에, 그 말을 어디에 가져다 붙이든 쓰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고도 생각한다. 하여도 가난을 수식하는 말을 택할 때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가난을 체험해 본 자의 의견이다. 돈이 계급을 나누는 사회에서는 돈 때문에 사람이 살기도 죽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아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다양할 것이나, 실제로 그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단어를 오직 세련된 자조를 위해 가져다 쓰는 태도를 나라면 우아하다고는 하지 않겠다.



책 제목 이야기도 다시 하자면 stylish와 impoverishment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바꿔 말하면 stylishly impoverish(우아하게 가난해지다)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poverty(가난)는 지난하게 이어지는 status이지 event가 아니므로 내내 스타일을 유지할 성싶지 않다. 기품 있게 져 주거나(elegantly lose), 고상하게 스러지거나(gracefully fade away), 심지어는 곱게 나이 들(age graciously) 수 있을지언정 우아하게 가난해져서 지속적으로 우아하게 가난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단 얘기다.


한국 사회에서 가난은 수치스러운 것이고, 박탈감을 품거나 그 사실을 드러내는 것도 지향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가난의 경험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나는 불행 배틀에 참가할 의사도 없고 가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만이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있다고 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여기는 쪽이다.) 가난의 모습도 거기 처한 당사자의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구차하다. 20대에 나의 가난은 같은 집,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을 고를 수 없는 것, 몸도 마음도 편히 쉴 만한 곳이 없는 것, 하자가 있는 생활 공간에서 그 하자로 고통받다 병을 얻어 안 그래도 없는 돈을 써 가면서 그래도 참을 만한 하자를 골라 이사를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돈은 학자금 대출을 갚고 월세를 내고 휴대폰 요금이 빠져나가면 절반 넘게 사라지고 비상금은 통장에 두 자리가 쌓일라 치면 꼭 쓸 일이 생겨서 제대로 모아 본 적도 없었다. 유난히 쪼들리는 달이면 결혼하는 사람들도, 세상을 떠서 부조금을 내게 하는 주변인의 일가친척도 원망스러웠다. 친구를 만나는 횟수는 내 관심의 깊이가 아니라 오로지 주머니 사정에 달려 있었다. ‘발 뻗고 잘 곳은 있고 밥도 굶지는 않는’ 정도의 가난이라도 인간관계 정도는 파괴할 힘이 있다. 가난해도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조촐한 식사를 즐길 여유가 있는 독일 귀족남과 나는 처지가 달랐다. 사회적 안전망의 촘촘함도 독일과 한국이 다를 것이다.


그때 내가 좋은 옷이나 음식에 돈을 썼다면 몇 만원을 아낀다고 생활이 근본적으로 나아지리라는 어떤 확신도 없는 와중에 그 옷과 음식이 좋아 보여서였다. 커피값에 적잖은 돈을 쓴 것은 스타벅스, 커피빈에 가 앉아 있는 게 방구석에 틀어박히는 것보다는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었던 까닭이다. 나보다 더 알뜰하고 경제 관념도 확실한 사람이라면 같은 상황에서 더 슬기롭게 생활을 꾸려 나갔을 수도 있다. 나는 아마 그 사람들보다 덜 알뜰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나의 허영에 죄를 물을 수도 있다. 나는 유혹에도 약하고 없어 보이는 게 싫은 사람이라 되도록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그런 걸 우아함이나 삶에 dignity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부르려면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아한 건 우아한 것이고, 가난한 건 가난한 것이며, 가난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한다 해서 가난 자체가 우아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또 거기에 대고 가르치는 말을 얹기는 쉽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나도 남들과 입장을 바꿔서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한 생활 양식을 가치 판단하거나, ‘우아한 가난’ 같은 말로 상대를 기만하는 쪽을 골랐을 것이다. 품위나 도덕성을 시험받는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래서 스스로 품위나 도덕성을 타고난 줄로 여길 수 있는 것도 특권이다.


특권 이야기를 해서 말인데,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몰려 있으면서도 비교적 제정신을 유지하며 처지가 나아질 때까지 존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래도 내가 한국 사회 평균으로 치면 나름 고등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뭐라도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즉 비슷하게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나는 운이 좋았다. 빚도 병도 부양할 가족도 없지만 더 좋은 차도 더 넓은 집도 없으므로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하는 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 마음이라면 그걸 기만적이라고 하는 건 내 마음인 이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특권을 팽개칠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 게 아예 없는 척한다. 나는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어드밴티지에 사력을 다해 매달렸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인스타에서 여전히 유행 중인 듯한 복고 소비 취향도 흰 눈으로 보게 된다. 그저 재미삼아 80년대 감성을 소비하는 것이 트렌드라면 할 말 없지만, 소박함을 가장한 비위생적 환경에서 수준 미만의 음식에 턱없는 가격을 매기는 업체들도 그렇고 누군가에게는 실제 삶의 현장일 옹색하고 빈한한 환경을 '복고'로 포장해 즐기는 소비자들도 썩 품위를 갖추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그중에는 가난을 대상화할 특권을 자기 품위와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가난과 품위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잴 재간은 없고 거기 놓인 것이 물리적 거리가 아님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나, 저 태도야말로 품위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쯤은 안다.


가난한 생활에 품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인상 깊은 사람은 모리 마리다. 가난한 사람이 향상심을 가져 생활을 낫게 해 보려고 이리저리 애를 쓰는 건 나도 해 본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홍차와 장미의 나날]은 모리 마리가 풍요롭고 행복했던 유년기부터 성인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주로 음식과 관련된 일화와 추억을 엮은 책이다. 마리는 그 모리 오가이의 딸로 태생은 부유했으나 역자의 말에 따르면 자라서는 ‘영락을 거듭했다’. 셋방에서의 요리를 묘사한 글에 그 영락의 흔적이 있는데, ‘부엌은 비좁고 수돗물도 수도꼭지만 있을 뿐 나오지 않는 데다 공용 싱크대는 바깥에서만 쓸 수 있어서 언제나 누군가가 있다’고 마리는 썼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침대 위에서 재료를 다듬어 독일식 샐러드를 만들고 맑은 장국을 끓이고 두릅을 조렸다는 묘사가 너무 좋아서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나도 몇 번이나 읽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글은 [이상한 행복]으로, 가난한 자신을 기만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삶의 이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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