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연속면 Feb 07. 2021

住. 내 말년에 홍차와 장미의 나날

[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이 집으로 이사 와서 나만의 식탁이 처음 생겼다. 주민등록등본의 ‘이전 거주지 내역’ 옵션을 선택해 출력하면 다섯 장은 너끈히 될 만큼 나는 많은 주소지를 거쳐왔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사가 연례 이벤트였을 정도다. 그중 어떤 집들은 기억이 희미하다. 대다수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들이다. 그 어느 집에도 나 혼자 앉아 온전히 식사를 즐길 만한 공간이 없었다. 타인과 불가피하게 부대껴야 하는 집, 책상에서 일도 여가 생활도 식사도 처리해야 하는 집에서 끼니는 그저 때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구강 건강이나 소화기에 문제가 있다면 다 그 비루한 공간의 책임으로 미룰 것이다.


근래 몇 달간 재택 근무를 했다. 역병의 시대에 비교적 안전한 공간에서 재택이 허용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일평생 해온 노력의 결과인가—좀 감개무량했을 정도로 재택 근무는 내 성향에도 취향에도 들어맞았다. 애초에 내게 집은 내내 일하는 곳이었다. 생계를 위한 투잡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거니와(언제고 다시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나 혼자 사는 집에서 가사 노동은 전적으로 내 몫인 까닭이다. 집에 오래 있으려니 집구석도 전보다 눈에 더 잘 들어온다. 방과 방 사이의 세 평 남짓한 공간에, 나 혼자 독차지할 테이블 하나를 둘 공간 같은 것. 테이블은 2인용이어도 포트와 핸드 그라인더와 드립퍼와 커피잔을 다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거기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평온함이 딴 곳에 있지 않다. 이렇게 오래 앉아 있게 될 줄 알았더라면 더 좋은 물건으로 살 것을 그랬다.


그러나 이 평온함도 일시적인 것이다. 이사를 온 지 2년이 지나니 짤없이 은행이 내게 전세대출 만기 통지서를 보내왔다. 연장하려면 각종 서류를 준비해 굳이 대면 창구를 방문해야 한단다. 얼마 전 새삼 깨달았는데, 내가 급여 생활자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이란 것도 지금부터 저축해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할 만큼은 남지 않았다. 나는 하루키 글의 주인공이 아니므로 내 삶의 터닝 포인트를 스스로 결정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 어쩌면 터닝 포인트는 이미 지나버렸을지도 모르고, 이다음 집에는 내가 앉아 홀로 커피도 마시고 어여쁜 접시에 케이크를 얹어 먹을 수 있는 테이블 놓을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또 방향 잃은 위기감만 도져서 한동안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모리 마리처럼 태생적으로 아가씨가 아니어선지, 나만의 식탁과 내 웨지우드 커피잔 따위가 없이 곤조만으로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보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고작 손으로 내린 커피 한 잔을 위한 여유 시간과 공간—그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말년에 못 누릴 것은 무어냐도 싶다. 그것이 안 된다면 은행이 준 2년의 유예 동안만이라도 평화를 맘껏 누리자. 그렇다고 COVID19가 장기화되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지만.


연초에는 습관처럼 계획을 하나 세웠다. 이 짓을 서른 번은 해왔으니 이제 습관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부터는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들은 처분하자고 마음먹었다. 소유물의 가짓수도 개수도 줄이고 관심이 간다고 덜컥 시간과 돈을 써대지 말고 양보다 질에 집중하자는 것이 그 골자다. 몇 달을 집 안에만 들어앉아 있다 보니 그동안 출퇴근과 별 실속도 없는 네트워킹(그나마도 부지런히는 안 하였으나) 같은 데 쓴 시간이며, 관리하는 데 추가적인 돈이 또 들어가는 물건들을 사들인 비용이 하도 아까워져서 하게 된 결심이다.

이런 마음도 역시 내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먹었다. 이 자리가 생기고서야 처음으로 장기 계획 비슷한 것을 세울 수 있게 된 셈이다. 작년 상반기부터 지긋이 앉아 읽고 쓰고 생각할 기회가 는 덕도 당연히 있다. 진작 이럴 기회가 있었어야 하는데 그동안 반강제로 번잡스럽게 살았던 듯한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고 COVID19가 장기화되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冊. 멀고도 가까운 로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