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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연속면 Jan 31. 2022

冊. 멀고도 가까운 로망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올 설 연휴에도 나는 책 열 권을 내다 팔았는데 책장의 모습에는 달라진 데가 없다. 그 열 권은 한 번 읽고 더 볼 것 같지 않아 서가에서 퇴출시킨 것이다 보니 머릿속에도 별로 남은 게 없다. 과연 이번 생에서 열 벌의 옷과 열 권의 책만을 남기는, 선인과도 같은 삶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한탄하며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을 읽었다.



저자는 나 같은 범인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만큼—그러니까 족히 나의 백 배는 되는 장서를 보유한 자타공인 애서가다. 절대량이야 어떻건 능히 건사하기 어려운 분량의 책을 이고지고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으레 갖는 로망을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명창정궤(明窓淨机)


이른바 ‘햇볕 잘 드는 맑은 창 아래 깨끗한 책상’이다. 두 평짜리 고시원에서 13평짜리 투 룸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법한(안 썼지만) 주거공간과의 투쟁을 반평생에 걸쳐 하고 있는 나의 심금을 울리는 말이기도 하다. 명창정궤의 실현을 위해 일반인은 손에 넣기도 힘든 고서로 가득한 마호가니 책장이나, 최신 애플 제품을 총망라한 워크스테이션은 필요치 않다. 그저 양지바른 창에 책 몇 권을 얹을 수 있는 정갈한 책상과 그것을 둘 한 평 공간이면 된다. 소박하게 들리나 쉽게 이룰 만한 로망은 아니다.


우선은 남향, 최소한 서향으로 난 창이 하나 있어야 한다. 바깥 정경도 너절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쓰는 방의 창은 동쪽으로 나 있는데, 3층이라 어둡지는 않으나 창을 열어두면 간간이 담배 연기, 음식 냄새, 딱히 묘사하고 싶지 않은 각종 소음이 올라와 ‘명창’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명창정궤는 어쩐지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주니 내 랩탑과 모니터도 치워버려야 한다. 더 이상적으로는 방에 책상 하나와 책 몇 권만 두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마음을 비우고 독서에든 집필에든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때고 드러누울 수 있는 침대를 흡사 배수진과 같이 치고 있는 현재 내 방의 구도는 그래서 이미 글러먹었다.


또 이 말은 비단 채광이나 책상 배치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번잡함도 없이 오직 책과 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삶의 방식, 즉 ‘심플 라이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작고 어여쁜 책상을 들여놓는 것보다 주변을 싹 정리하고 내친김에 서가까지 뒤엎는 것이 아마 더 큰일이리라. 평생을 곁에 두고 읽을 단 몇 권의 책을 솎아내는 것이 지금 내게 가능한 일인가? 듣기에는 멋지지만, 섣불리 판단했다가는 노년에 이르러 간장 종지만도 못한 얄팍한 내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인생의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아니, 더는 하루키를 욕하지 말자. 여튼 평생을 함께할 책을 선별하려면 우선은 방 한 칸을 책으로 가득 채워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곱씹어볼수록 ‘명창정궤’란 현대인이 몸소 실천하기 어려운 라이프스타일인 것도 같다. 특히 서울에 거주하는 1인 가구 세대주라면 운이 꽤 좋아야만 중년 즈음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오카자키 다케시가 책에서 예로 드는 문인들은 하나같이 집구석에 들어앉아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업이었던 자들로, 월화수목금 출퇴근을 하며 주 52시간 꽉 채워 노동을 할 일도, 자기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을 일도 없었다. 나의 사정은 그들과 사뭇 다르다. 하다못해 배달 밥을 한 끼만 시켜봐도 상을 차리는 것부터 먹고 치우는 것까지, 삶을 연명한다는 것이 실은 얼마나 하찮고 구차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다. 커피 한 잔을 내려 책상 앞에 앉자마자 점심은 또 뭘 먹고 세탁기는 언제 돌릴지를 걱정해야 되는 처지에 명창정궤가 다 뭐냐. 현대인이 주말에 제 집을 놔두고 스타벅스로 도망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카자키는 자택과 작업실 중간에 위치한 그 방을 일주일에 한두 번가량 방문한다.
원고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대로 자는 모양이다. 거기엔 전화도 없다.
자신이 사는 집 이외에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자유로운 방이 있는 셈이다. 남자가 꿈꾸는 궁극의 이상향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는 특히 실소했는데, 쇼와 시대에 태어난 남자는 아마 잘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자기만의 방’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이 품는 로망이다. 수천 권 수만 권에 이르는 장서를 힘겹게 쌓아둔 집이든 창가에 빈 책상만 하나 덩그러니 있는 집이든, 전전긍긍하며 먹고살 것을 마련하고 생활을 돌보는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혐의를 거두기도 어렵다. 쉽게 말해 장서의 괴로움을 탄식하던 과거의 문인들에게는 밥 해주고 방 치워주는 아내가 있었을 거라는 뜻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장을 채우는 것부터 비우는 것까지, 안 읽는 책을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설 연휴에 갈아 마실 커피 콩을 사 오는 것까지 고스란히 내 일이어서 정작 한가로이 독서에만 몰두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

나도 생활의 하찮고 궁상맞은 부분을 남에게 외주 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그리한다 하더라도 내 사전에는 애시당초 궁상이란 게 없었다는 듯 홀로 표표한 것은 기만적인 삶의 자세다. 심플 라이프에도 당연히 코스트는 든다. 남이 나 대신 그것을 치러준다 해서 코스트 자체가 없는 게 되는 것은 아니다.


생활의 너절함을 외주 줄 처지는 아니지만 그것을 외면할 길은 도처에 있다는 게 또 현대 문명의 메리트다. 번잡스러운 집구석이 싫으면 카페나 찻집에 가면 그만이다. 최근에 그야말로 명창정궤를 형상화해 놓은 듯 고즈넉한 찻집을 한 곳 찾아 틈만 나면 거기 가 앉아 있는데, 정갈한 다구로 청차를 내려 마시며 좋아하는 책을 한없이 읽고 또 읽는 것만이 낙인 세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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