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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의미

서울공예박물관 | 특별기획전시, "공예로 짓는 집"

by 은이은



본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우리 뇌의 약 30% 정도는 보는 것에 할당되어 있다. 포유류의 눈은 도로 진화된 감각기관이다. 예를 들어 눈이 한 곳을 보고있는 것 같지만 중심시와 주변시로 나뉜다. 중심시는 해상도가 매우 높은 반면, 주변시는 매우 넓은 범위에서 작동한다. 갑자기 다가오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인식을 거의 못 하고 있지만 주변시는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현대 물리학은 우리가 보는(관찰하는) 행위에 대해 아주 희한한 말을 한다. Y가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관찰자 효과'라는 것인데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모든 입자는 두 가지의 가능태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중첩'상태에 있다가, 관찰자가 개입하는 순간 어느 한쪽으로 결정지어진다(함수가 붕괴된다). 비유로 말하자면 어떤 입자가, 고양이나 개가 될 수 있는 중첩상태에 있다가 사람이 보는 순간, 개가 되거나 고양이가 된다는 거다. 이해하기 힘든 역설이다.


수와 식을 도구로 삼지 않았지만 철학은 결국 우리가 보는 행위,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물리적 세계를 어떻게 규정할지를 놓고 고민한 역사이다. Y는 임마뉴엘 칸트를 처음 만났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놀라운 통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뇌과학(우리가 보는 행위 측면)이나 물리학(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 학문)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의 통찰이 놀라운 것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물리학에서는 좀 전에 언급한 관찰자효과에 따라, 입자와 나, 그리고 나를 관찰하는 타인이 있을 때 넘을 수 없는 역설에 빠진다. 즉 사고실험에 따르면 - 물론 약간 단순화 하자면 - 두 사람 사이에도 '일치된 관찰'이란 건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이 그러한가?


(C) 은이은


Y의 생각에, 과학은 이미 답이 나와있는 학문이 아니고, 언제까지나 진행형인 '과업'일 뿐이다. 그래서 Y는 그런 진행형인 과업으로서의 과학보다는 오히려 철학자 칸트의 설명이, 현상을 바라보며 '간주관성'으로 나아간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이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느꼈다. 너무 현학적이라고? 그런데 Y가 하루를 마감하며 떠올렸던 생각이 정말 그랬다. 눈 앞에 펼쳐진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서울 서촌의 한 골목길 (C) 은이은


날이 어두워질 무렵, Y는 서촌의 어느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신주가 섰고, 조명이 바닥을 비추고, 밥집 환기통에서 증기가 부풀어 새 나왔다. 어둠이 내린 먼 하늘은 아직 빛을 머금어 푸르다. 가까운 빛은 희지만 조금 떨어져, 건물 외벽에 반사되는 빛엔 붉은 기운이 감돈다. 프레임 안에 들어간 풍경 속에 얼마나 많은 물리적 법칙이 작용할까? 그런데 그게 중요할까? 이 골목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그 속에는 슬픔과 기쁨이 어떤 비율로 섞여있을까? 연인인 듯한 남녀가 골목길을 지나갔다. 왜 하필 이 좁은 골목을 통과했으며, 어떤 감정을 나누고 있었을까? 뜨거움이었을까? 아니면 차가운 권태였을까?


Y는 그날 지인들과 공예박물관에 갔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혼자였는데 동행이 생겨났다. 아마도 혼자 갔으면 보았을 것을 보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이여서, 보지 못했을 것들을 보았다. 두 개의 눈이 아니라, 연결된 여섯 개의 눈으로 보았으니까. 또 혼자서는 가지 않았을 곳을 같이라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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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박물관은 '공예'라는 키워드로 짚은 역사를 전시하는 게 중심 테마이다. 그런데, 기획전시물도 볼만한 것이 많았다.


(C) 은이은


세공을 한 조선시대 저고리를 보면서 문득 '공예'와 '미술'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얼까 생각했다. 감상 이상의 '쓸모'가 아닐까, 결론을 내리려다가 저고리 옆에 적힌 설명을 보고 추가해할 기준이 있다고 생각했다. '복식은 착용하는 사람의 위계와 신분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그렇다. 권력. 적어도 그 시절에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기획전시를 보면서, Y는 그 경계선이 다시 희미해졌다. 한 전시물 앞에서 젊은 커플이 나누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었다.


"이 작품 좋아?"

"응, 뭔가 배치가 예쁜 것 같아. 오빠는?"

"나는 저 사자가 눈에 끌리네."

"왜?"

"기억이 나, 옛날에 잘 사는 집 문에는 꼭 저 사자가 달려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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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은이은


Y는 사진을 찍으며 어떤 대상을 두고 말하는 건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사자가 고리를 물고 있는 것 같은 문고리. 옛날에 그 문고리가 철제 대문에 달려있던 기억도 솟아올랐다. 그런 대문은 적어도 대지 50평 이상은 되는 단독주택에 설치되어 있었다.


(C) 은이은


옛 기둥을 재해석한 설치물도 있었다. Y가 보기에는 조형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꼼꼼히 작품을 둘러보다가 기둥에 흰 페인트로 적어놓은 글을 읽게 되었다.


'기둥이 건축을 만들고 건축이 기둥을 만든다. 기둥이 건축의 구조물이 되기 위해서 기둥은 그 자신에 건축을 다시 내포한다. 전통이라는 기둥으로 만들어진 테두리 속 우리 생활은 여전히 현대와 관계를 주고받는다. 현대 문명과 마주한 나무기둥 표면은 자신의 물성을 지키기 위한 기제로 덮여있지만 그 내부에 새로운 탄생의 잠재력이 있다. (후략)'


(c) 은이은


공예가 기능하기에 미술과 구분된다면, 이 기둥들의 낯선 조합은 '설치미술'의 기능 외에 다른 어떤 쓸모로 기능하는 것일까? Y는 그러다가 골치 아픈 생각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냥, 바라보기에 좋지 않은가? 너무 낯선 미술의 이미지들과는 달리 공예박물관의 형상들은 친근하고, 최소한의 기능 단위를 실현하고 있었다. 빛을 색으로 분할하는 창, 벽을 장식하는 걸개들의 집단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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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은이은


Y는 벽에 늘어선 정 사각의 걸개들 가운데 농담을 던지고 있는 두 장을 찾아내고는 몹시 기뻐했다. 혹시 놓쳤을지 모를 나머지 동행들에게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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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은이은



공예박물관은 그전부터 와보고 싶은 공간이었다. 도심에 조성된 여유로운 터, 근대의 건축물과 현대적인 부속 건물의 조합은 기묘하지만, 그 '시간의 충돌'이 빚어내는 울림 때문에 아름답다.

마침 빛이 좋고 하늘이 높았다.


(C) 은이은


혼자라면 아니었겠지만 같이였기 때문에, 일행은 삼청동에서 수제비를 먹고 차를 마시고 넓은 창으로 해가 지는, 겨울의 풍경들을 만끽했다.



어스름은, 일행의 오후가 충만하게 마무리된 뒤, 충분히 적당한 때에 내렸다.


Y는 서촌 골목에 서서 관찰자 효과를 생각했다.


'관찰자 효과는 양자역학에서 측정 행위 자체가 대상 시스템에 영향을 미쳐, 그 상태를 변화시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입자가 중첩 상태(즉, 동시에 여러 경로를 갖는 상태)에 있을 때, 이를 관측하면 입자의 파동 함수가 특정 상태(반사되거나 통과하는 등)로 붕괴된다. 이 현상은 단순히 측정을 위한 상호작용 때문에 발생하며, 관측자가 의식적으로 개입했다기보다는 측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시스템과 상호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Y의 결론은 이랬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상은 같이 바라봄으로써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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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머서, 김소정 역,『우리를 방정식에 넣는다면』현암사, 2024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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