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 피에르 위그, 리미널
'방추상회(紡錘狀回)'라는 말이 있다. 무슨 채소 파는 가계 이름 같은데 아니다. 인간의 뇌에는 얼굴을 인식하기 위한 특정한 부분이 있다. 이걸 방추상회(fusiform gyrus)라고 부른다. 사람이 이곳을 다치게 되면 그 사람은 타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사고로 뇌 절반을 잃어버려도 정상인처럼 산다는 보고가 많은데, 뇌의 특정부위가 좀 손상된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
얼굴은 단순한 시각정보가 아니다. 뇌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고 처리되는 매우 중요한 신호다. 누가 내 편인지, 적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영장류, 개, 양 같은 동물도 뇌에 이런 특수 회로가 있다. 침팬지는 같은 집단 내 개체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개는 주인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는다. 양은 자기 무리의 개체를 얼굴로 구별할 수 있다.
이 능력이 하도 특별하게, 특이하게 고도로 진화된 것이어서 같은 얼굴을 뒤집어서 보여주는 경우엔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코끼리 그림이 바로 있건 거꾸로 있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반면, 얼굴은 거꾸로 세워놓으면 알아보지 못한다. 이걸 '안면 특이적 효과(face-specific effect)'라고 부른다. 인간의 뇌에서 얼굴인식 영역의 경우, 어른이 되어도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리움미술관이 피에르 위그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7월 6일까지 이어진다. 소설가 Y가 어두운 전시 공간을 조심조심 들어가서 처음 만났던 것은 얼굴 없는 '존재'였다.
얼굴 없는 존재는 구조물 하나 없는 황야 같은 공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서 있다. 걷다가 바닥에 눕기도 하고 새가 날아오르는 모양을 취하다가 격렬하게 발작한다.
Y는 기억을 더듬었다. 리들리 스콧의 SF 프로메테우스에서 '인간형' 존재를 보았다. 그것엔 얼굴이 있었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다른. 그런데 피에르 위그의 작품 '리미널'의 존재는 얼굴이 없다. 때문에, 그건 분명히 인간의 몸, 전형적인 여성의 몸을 가졌지만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 존재는 기쁨도, 슬픔도, 절망도, 분노도 어떤 감정도 전달할 수 없다. 어쩌면 그 존재는 원천적으로 그런 감각을 품을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고 Y는 생각했다. 애초에 표현할 수 없으니까. 표현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워진 인간 형태는 세계도, 뇌도, 얼굴도 없이, 공허에 둘러싸인 부산하고 평평한 연을 따라 이동합니다. 이 작품은 순수하게 사변적인 인간 조건에 관한 시뮬레이션으로, 작가에게는 실험의 일종입니다. 리미널은 과도기적 상태, 즉 우리의 감각적 현실과 비인간적 존재 사이의 통로이며 인간 형태를 통해 비인간과 인간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리움미술관 전시 리플릿 문구)
작가는 그 건너편의 전시 공간에서 문제를 정 반대로 뒤집는다.
영상 속에 나오는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 까지, Y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아마 작가의 의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물건들로 꽉 차있는 공간에 갇혀있다. 그 존재는 불안하다. 앉았다가 빠르게 좁은 물건들 사이를 지나다가 무언가를 집고 큰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런데 조금씩 이상하다. 긴 머리 소녀의 얼굴이라고 추정했던 것은 Y의 선입견이었다. 그 선입견이, 영상 속 클로즈업 된 그 존재의 손과 발을 봄으로써 깨어진다.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원숭이의 손과 발이었다.
여기서 Y의 인식은 물 위의 그림을 손으로 휘저어 흩어지게 만들듯 혼란스러워진다. 가면 안에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유 때문에 그 존재의 행동에 부여했던 그의 추정들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무너진다. 보인 행동과 연결시켜서, '인간 소녀'가 느꼈을 거라고 추정했던 외로움, 불안, 두려움 같은 감정들에 모두 물음표를 붙이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으로 느꼈을 외로움? 원숭이도 외롭나?' 이런 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뒤에 Y의 안에서 다시, 또 다른 변환이 일어났다.
저렇게 고립되었다면 원숭이라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는 건 인간의 오만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이고, 원숭이는 무엇일까? 차이가 있다면 '양의 차이'일까, '질의 차이'일까?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나오는 '다중안정성(Multistability)'같은 현상이었다.
버려진 식당에서 어린 소녀의 얼굴 가면을 쓴 원숭이가 자신이 배운 동작들을 인형처럼 끊임없이 반복하다가 때로는 끝없이 기다리는 듯 멈춰 서 있습니다. 이 원숭이는 지시와 본능,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갑니다. 재앙이 일어난 직후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순간, <휴먼 마스크>는 유일한 매개자인 무의식적 배우가 뒤집어쓴 인간 존재의 잔존하는 이미지를 보여 줍니다. 이 영상은 우리가 모두 쓰고 있는 ‘인간’이라는 가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리움미술관 전시 리플릿 문구)
전시에서 Y는 몇 개의 얼굴을 더 보았다. 해골이 된 얼굴과 수족관 속에 잠긴 얼굴,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든 눈, 코, 입이 사라져 버린 황금 얼굴.
리움미술관은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에서 내려 걸어가면 된다. 관람을 마치고 나와서 Y는 삼각지 쪽으로 조금 걸었다. 망설여졌던 곳이었다. 리움미술관에 가길 꺼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공간은 기억을 품고, 그 기억이 너무나 비극적인 것이니까.
2014년의 사건과 2022년의 사건은 작가 Y에게 닮은 꼴로 기억된다.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어떤 인간들의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얼굴을 통해 서로를 인식하고 신뢰를 구축하며 사회를 형성했다. 그런데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겪었으면서도 태연하게 다른 얼굴을 보인다면 그 존재는 얼굴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으로 분류될 수 없다고, Y는 생각했다.
피에르 위그의 질문은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