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의도하지 않을 결심

국립현대미술관 | 이강소, 風來水面時 · 김래오 등, 프로젝트 해시태그

by 은이은


Y는 썩 좋지 않은 습관이 하나 있다. 어느 곳에 가건 거기에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지, 그들은 어떤 대화를 하는지 관찰한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재료를 모으는 거라고 스스로 변명하지만,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그래서 눈이라도 마주치는 경우, Y는 비굴할 만큼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깐다.


국립현대미술관 1층 커피숍 한 구석에 앉아 메모를 하고 있는데 20대로 보이는 남자 3명의 대화가 들렸다.


"여기가 1층이야?"

"맞아. 그런데 꼭 지하처럼 느껴지지?"

"그렇네, 이 벽 때문인가?"

"맞아. 공간을 편집한 거라고나 할까. 여기 선 시점에서 보면, 벽이 수평으로 마당을 가르고 있으니까, 관찰자가 지면 아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거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보통 여성이다. Y의 눈대중이긴 하지만 두 명 이상의 여성이 함께 올 때가 가장 많고, 그다음은 여성 혼자인 경우다. 다음으로 남녀 커플, 마지막으로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가 가끔 보인다. 남자들이 함께 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남자 혼자 오는 건 Y밖에 없다. 안 그래도 Y는 '어떻게 남자 3명이 같이 왔지?'하고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예술 쪽을 전공하는 학생들인 것 같았다.


Y는 그들이 언급한 '공간 편집'이라는 개념을 신선하다 감탄하면서 음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물음표를 찍었다. 과연, 국군수도통합병원을 리모델링하면서 카페 공간에 창문을 달 때, 설계자는 '공간 편집'이라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 엉뚱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로비 (C)은이은


그런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Y가 막 이강소, 풍래수면시 風來水面時 전시를 보고 왔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Y는 미술에 대해서라면 문외한에 가깝다. 이강소 작가의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그런데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Y는 알 수 있었다. 아, 이 사람은 대가이구나. 유명한 사람이구나. 전시된 그의 작품에서, 작품들이 놓인 공간배치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두 개의 공간에 벌여놓은 작품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C)은이은


Y는 마르셀 뒤샹을 안다. 그는 모방(미메시스)으로서의 예술을 거부하고 창조(새롭게 보기)를 선언했던 사람이다. 그는 소변기를 새롭게 보았고, 소변기의 영혼을 거론하며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일 필요는 없고, 모든 사람이 유명인을 우러러보고 추종할 필요는 없다는 게 Y의 평소 생각이다. Y는 '위대한 작품'과 '낙서' 사이에는 종이 한 장 정도가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 종이 한 장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말솜씨이다. 마르셀 뒤샹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Y가 뒤샹을 떠올린 건 전시실 벽면, 작품 옆에 프린트된 안내문을 읽었을 때였다.


<페인팅 (이벤트 77-2)>(1977)은 그리는 행위를 통해 작가가 지워지거나, 작가의 몸에 묻은 물감을 지워내는 과정에서 회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작가 지우기' 노력은 실험미술 시기를 거친 후 작가 스스로 의도를 배제하고 그리거나, 지각하는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며 표현하는 추상과 구상 회화 단계로 이어집니다.


이강소, 페인팅 (이벤트 77-2) 부분 (C)은이은


작가인듯한 몸은 나체로 사각의 공간 위에 섰다. 페인트 통과 붓이 그의 손에 들려있다. 붓을 드리워 적시고 그걸 몸에 바른다. 반복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동안, 누군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만족할 만큼, 그것이 그의 몸에 도포되었다고 느꼈을 때, 작가는 바닥에 놓여있던 캔버스 천으로 그의 몸을 닦는다. 표면의 굴곡을 따라 접히긴 하지만 밀착하지 않는 두꺼운 천은 타월과는 달리 어떤 구겨진 선을 첨가하며 작가의 몸에 둘렀던 염료를 받아들인다.


Y가 재미있다고 느낀 건, 그 천이 그 사진 속에서 벗어나 전시장의 바닥에 놓였다는 점이었다. 작품 설명을 보고 Y는 새삼스레 웅얼거렸다. 천에 아크릴릭 물감. 그렇군, 작가가 몸에 바른 건 아크릴 물감이었네. 전시장 바닥에 놓인 천은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다. 작가의 땀, 작가의 솜털, 세포조각들이 끈적한 아크릴 물감에 포획되어 캔버스 천에 묻은 바로 그 이벤트 77의 결과물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Y는 생각했다.


작가가 이벤트를 통해 보이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Y는 다시 작가 이강소에 대한 소개 글을 떠올렸다.


이강소는 이미지의 인식과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 온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전시명 '풍래수면시'는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송나라의 성리학자 소옹의 시 청야음에서 따온 제목이다. 이 제목은 회화와 조각, 설치, 판화,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지 방식을 질문하고,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 온 작가의 예술세계를 함축한다.
작가는 창작자가 의도한 대로 감상자가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회화에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무엇을 그리거나 만들어내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 기억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작가적 태도로 발전했습니다.


의도하지 않으려는 의도라. Y는 그 말이 참으로 알쏭달쏭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거나 조각하는 행위가 미메시스가 아니라 창조 혹은 새롭게 보기라고 해도,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의도적인 것이다.


(C)은이은


작품 제목이 <허 虛 - 10072822>인 좌측 상단의 그림에서 꺾은선에 불과한 것을 오리로 보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감각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체계는 세계를 익숙한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선이 없는 곳에 선을 그려 넣고 구름을 보고도 거기서 익숙한 모양을 찾아낸다. 1976년 바이킹 1호가 찍은 '화성의 얼굴'(Face on Mars) 때문에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조금 전 언급한 인간의 인식체계의 경향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나중에 더 해상도가 높은 사진에서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걸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라고 부른다.


이강소, <무제> (C)은이은


이강소 작가는, 물 위에 떠있는 오리 군상을 그린 것이 분명한 그림에도 '무제'라는 제목을 붙였다. 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이름 없음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소설가 Y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알 것 같았다. 이강소 작가는 관객들과 게임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어떤 대상을 포착하면 우리는 대상을 보면서 어떤 것을 떠올린다.


"아 저건 호수 위를 떠다니는 오리떼이지."


그런데, 추상이 아닌 구상임에 분명한 저 그림 옆에는 '무제'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관객은, '뭐지?'하고 되묻는다.


소설가 Y는 추상이란 어느 좁은 틈으로 바라본 구상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면 특정한 시점을 택한 구상이다. 작가 이강소와 관객은 보는 것, 보려 하는 것, 보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게임을 한다. 작가 이강소는 게임 안에서 앞으로 보이게 될 것들의 구성요소를 제시한 뒤에, 그 요소들 가운데

선택권을 준다.


(C)은이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같은 시기에 전시되는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4'를 보면서, 소설가 Y는 그의 이른바 '게임론'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두 전시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었지만, Y가 보기에 '프로젝트 해시태그'는 이강소가 관람객들에게 보낸 신호의 일부 구간을 잘라서 현대적으로 증폭한 전시 같았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4 (C)은이은


대형 화면 두 개가 170도 정도의 둔각으로 놓여있다. 약 2~3미터 뒤에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는데 거기에 X박스 조이스틱이 놓여있다. 관람객은 그 조이스틱을 통해 화면 속 존재를 움직일 수 있다. 왼쪽은 3인칭, 오른쪽은 1인칭 시점이다. 4개의 공간을 탐험할 수 있다. 작품 안에 들어있는 장면 - 배경그림은 차가운 선과 면들로 만들어졌다. 색과 형태가 예사롭지 않다. Y는 그의 미감美感에 '좋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이강소가 철학적인 메시지라면 프로젝트 해시태그의 젊은 작가들은 직설적인 메시지를 구현했다.


"작품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 그저 반응할 뿐. 게임과 다르지 않아."


한 외국 관광객이 종아리가 아팠는지 팔걸이에 다리를 걸치고 앉았다. 창 밖에서 빛이 쏟아졌다. 봄이 오는 길목 따뜻한 광선을 즐기는 웃음소리들이, 소거되었음에도 창을 넘어 카페 안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C)은이은


그러고 보니, 소설가 Y가 이강소의 작품에서, '아 좋다.' 라고 느꼈던 건 딱 한 작품이었다. 다정하게 느껴졌던 작품, 마음이 머물렀던 작품은 아주 작고 소박한 것이었다.


이강소, <그녀> (C)은이은

언뜻 바라보면 추상화 같지만, 시점을 달리한 구상이었다.


바람부는 봄날, 방파제가 있는 해변에서 화가를 바라보는 한 여인. 그녀의 쓰다듬고 싶은 어깨선과 찰랑이며 흩날리는 머리카락. 화가는 그 여인을 사랑하고, 그 여인은 지금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어서 화가는 그녀의 얼굴 정면을 시야에 담지 못한다.


소설가 Y는,'무척이나 사랑이 고팠나보다.' 피식 쓴 웃음을 웃는다.


의도하지 않지만, 그가 쓰는 소설들에 언제나 사랑이 나온다. 그것도 무언가 결핍된 사랑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