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1코스 (삼릉 - 금오봉 - 포석정)
경주 남산에 대한 안내문은 이미 많다. 경주를 사랑하는 소설가 Y도『경주남산, 역사와 예술을 만나다』등 소책자나 팸플릿 등 여러 종류를 봤다. 그런데 막상 갈 생각을 하면서는 안내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너무 가파르지는 않은지, 그만큼 시간을 투자해서 과연 얻을만한 것이 있는 건지 등 망설이게 되는 요소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Y는 남산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첫 번째 탐방 결과, Y는 경주 남산이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한 번 가면, 'N차 방문'까지 해야 하는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Y는 취재 본능을 발휘해서 산행에서 마주친 것들을 상세하게 적었다. 주저하는 분들이 혹시 있을까 해서였다. 경주 남산에는 코스가 여러 개 있는데, Y는 방문했던 첫 번째 코스를 임의대로 '1코스'로 부르기로 했다. 삼릉에서 출발해 금오봉 정상을 찍고 포석정 쪽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기록하고 사진을 찍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해발 400m 정도라 아주 험하지도 않고, 왕복 3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되는 길이었다. (참고로 Y는 산 정상에서 초등 1년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를 봤다.)
Y는 앞으로도 계속 남산에 올라갈 계획인데, '2코스', '3코스' 이런 식으로 같은 형식의 기록을 남길 생각이다. 각 문화재에 대한 설명은 안내판에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살피고, 부족하면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발행한 『경주남산, 역사와 예술을 만나다』를 참고하기로 했다.
진작부터 별렀던 일이었다. 소설가 Y가 경주에 갈 때 자주 머무는 숙소 사장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주 남산에 가보는 게 좋을 거'라고 강조하셨다. 은근한 압박 같기도 했다. '좋기는 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엄두가 안 났다. 겨울엔 추워서 안 되고 여름엔 더워서 안 되고, 봄과 가을엔 "제가 머무는 기간이 짧아서요, 남산은 다음에 갈 께요." 이렇게 둘러댔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긴 연휴에 내려온 터라 여유도 있었고, 영상 10도까지 올라가는 완연한 봄기운에 춥거나 덥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마침 숙소의 넓은 창 앞에 있는 호야는 따뜻한 햇살을 받아 별묶음 같은 꽃을 활짝 피웠다.
슬쩍 자료를 훑어보니, 경주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산을 가봐야 하는 거구나 했다. 경주 남산은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 분지 남쪽에 있는데, 혹자는 '신라의 천년 역사가 응축된 공간'이라고 표현한다. 건국 설화를 비롯해 다양한 전설이 남산과 연결되고, 신라와 신라인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문화유적이 100여 개나 분포한다. 그래서 사장님이 '뚜껑 없는 박물관'이라는 표현을 쓰셨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도를 핸드폰으로 확대해 볼 수 있으면 편할 것 같아서, 입구 안내판에서 찍은 지도를 아래, JPG파일로 올려놓았다. 아래 링크를 누르면 사진 파일을 핸드폰에 저장할 수 있다.
'남산'이라고 하면 북쪽의 금오봉(해발 468m)과 남쪽의 고위봉(해발 494m)의 두 봉우리를 잇는 산과 계곡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다. 계곡은 63개, 봉우리는 180개나 된다. 동남산은 능선이 가파르고 짧은데, 서남산은 완만하고 골짜기가 길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적들이 서남산에 집중되어 있다.
경주 남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코스인데, Y는 지도에서 노란색 형광펜으로 원을 그려놓은 서남산 주차장(포석로 647) 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택했다.
서남산은 경주 시내 중심에서 멀지 않다. 걸어올 수도 있는 거리지만, 산에 오를 힘을 미리 소비하면 안 되니까 버스나 택시를 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면, 정확히 어디가 등산로 입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등산로가 긴 계곡을 따라서 형성된 길이다. 그러니까 길을 벗어날 가능성이 낮다는 얘기다. 어느 쪽으로 가도 삼릉 쪽에서 만난다. 한 1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길 오른쪽으로 삼릉이 보인다.
겨울의 마지막이어서 그런지, 삼릉은 나이 들어 머리가 센 것처럼 희끄무레한 빛이었다. 주변에 잘생긴 소나무들을 푸르게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런지 대왕릉 쪽에서 보았던 능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 있었다. 높지 않은 철제 울타리가 있어서 삼릉 바로 옆으로 다가갈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안내책자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구도로 사진을 찍기에 어려움은 없다.
'삼릉'이라는 이름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 씨 3 왕의 무덤이라는데, 확실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8대인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의 무덤이 약 700년 정도 시차를 두고 신덕왕, 경명왕과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삼국사기에는 아달라왕의 장지 기록은 없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신라 초기에는 이런 대형무덤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Y는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발간한 책자에 실린 '안내 지도'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램블러라는 앱을 켜서 위치를 확인하면서 올라갔다. 나중에 내려올 때, 올라올 때와 다른 길을 선택하면서 램블러가 큰 도움이 됐다.
안내 지도에는 삼릉에서 석조여래좌상까지 약 500미터라고 나와있다. 비교적 완만한 등산로로 올라가는 길이다. 긴 계곡을 따라 오르는 이 코스를 '삼릉계'라고 부른다. 입구에 삼릉이 있어서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데 '냉골'이란 이름이 따로 있다고 한다.
삼릉계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건 '제1 사지 탑재 및 석재'이다. 길 오른편에 있다. 사지(寺址)는 절이 있던 터, 즉 사찰의 옛터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첫 번째 사찰의 옛터에서 발견된 것들이란 뜻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서 있는 건 돌로 조각된 앉은 모습의 부처 상(石造如來坐像)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옛날, 아주 옛날 절 경내의 어느 곳에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갈림길 가운데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서 있다. 바위 위에 앉았는데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훼손되어서 볼 수 없다. 안내판을 보니 원래부터 이 장소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1964년 계곡 옆에서 발견되어서 지금의 위치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되어있다.
연구자들은 원래 이 불상의 받침대(대좌, 臺座)도 있었을 거라고 본다. 대좌는 연꽃모양의 '연화 대좌', 반원 형태의 '반구형 대좌' 등이 있는데 훼손이 심해서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고 안내판에 나와있었다.
이 불상이 있는 인근은 '경주 남산 삼릉계 제2 사지'로 불렸다. 설명문에 따르면, 석조여래좌상 앞 평평한 땅부터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는 곳까지를 절 터로 추정한다.
석조 여래좌상의 왼쪽으로 가팔라 보이는 길이 있다. 조금만 올라가면 아래 사진과 같은 마애관음보살상이 나온다. 큰 바위의 윗부분을 쪼아 새긴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이다. 가파른 건 한 1~2미터 밖에 안 되니 포기하지 말고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앞에 가던 50대 부부는 부인이 가자고 하는데 남편이 못 가겠다, 싫다고 버텨서 결국 지나쳐가고 말았다. 휴대폰 사진에 잘 담기지 않았지만, 실제로 보면 신비로우면서도 은은하고 포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전달된다.
전체 윤곽은 광배(光背, 불상이나 보살상 뒤쪽에 표현된 빛의 형상)로 마무리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서 정병(淨瓶, 목이 긴 형태의 물병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임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들었다. 얼굴과 몸의 윗부분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 놓았지만 허리 아래는 윤곽이 불분명하고 표면도 거칠게 표현되었다. 작은 입 끝을 살짝 오므려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길고 통통하여 자비로운 모습이다. 보살상이 입고 있는 천의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을 비스듬히 지나면서 넓게 도드라져 있다. 이 보살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더 앞으로 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이정표가 보인다. 등산로 방향과 직각으로 벗어난 길을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다.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벗어나야 선각 육존불, 선각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등을 만날 수 있다.
개울을 건너고, 약간 더 올라가면 선각 육존불을 만날 수 있다. Y가 남산에 오른 시점은 3월 1일이어서 개울은 말라있었다. 그러나 산을 오를수록 물을 흰 얼음으로 품고 있는 계곡을 많이 만나서 이제 며칠만 지나면 곧 돌돌돌 물이 흐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선각'(線刻)이란 입체감을 준 조각이 아니라 선을 파내 형태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바위나 금속, 나무 등에 선을 얕게 파서 불상이나 문양을 그리는 방식이 선각 기법이다.
선각육존불은 삼릉계곡의 두 바위 면에 새겨진 여섯 분의 부처와 보살을 선으로 새긴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져 우리나라 선각 마애불을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자연 암벽에 음각의 선으로만 새긴 것이어서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깝다. 중앙의 서 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이 앉아 있는 삼존과 앉아 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이 서 있는 삼존을 각각 구분되는 바위 면에 새겨 육존을 형성하고 있다. 약간 튀어나온 왼쪽 바위 면에는 두 보살이 무릎을 꿇고 꽃을 담은 쟁반을 받쳐 들고 있다. 조금 들어간 오른쪽 바위 면에는 두 보살이 중앙의 불상을 향하여 몸을 돌린 채 서 있다. 선각육존불은 모두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있고, 머리에 둥근 광배를 갖추었다. 선각육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윗면에는 지붕을 설치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사각형 홈과 빗물이 바위 면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얕은 배수로가 남아 있다.
연구자들은 이 선각육존불이 통일신라 말기, 그러니까 왕권이 약해지고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후삼국 시대로 넘어가는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9세기면, 벌써 천 년이 훨씬 넘은 과거에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이 100번 변할 시간을 바위 위에 선으로 새긴 마애불이 견뎌온 것이다.
선각육존불을 지나쳐 좀 더 올라가면 아래 사진과 같은 '선각 여래좌상'이 나온다고 책자는 안내한다.
그런데 Y의 사전 준비가 부족했던 탓인지, 보고자 하는 정성이 부족했던 건지… 그곳에서 여래좌상을 찾지 못했다. 남산의 다른 코스를 다 돌아야, 이 코스로 다시 와볼 수 있을 텐데 그게 언제일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지방유형문화재 159호)
선각육존불에서 바위 위 등성이로 200m쯤 올라가면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m쯤 되는 넓은 절벽바위가 서쪽을 향해 솟아 있다. 그 암벽 중앙에 지름 2.5m쯤 되는 연꽃 위에 전법륜인을 하고 앉아 계신 여래상이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나타내고 얼굴만 깎아 내어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두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텁고 커서 균형 잡힌 얼굴이라 할 수 없으나 소박한 위엄이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모두 표현하였다. 연화대와 광배 등은 굵은 선으로 그었고, 옷주름 같은 것은 가는 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상 전체에서 재주를 부리지 않은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데, 머리 위의 육계, 얼굴의 투박함, 귀부분 등 세련된 마무리가 안 되어 있어 미완성으로 보인다. 남산의 마애불 중 가장 늦은 10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래좌상 옆의 바위는 부부가 안고 있는 모습 같아 부부바위라 불리고 있다.
삼릉계 관람은 계곡을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길이다. 우리들 삶의 인연과 닮아있다. 계곡엔 얼음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쌓아놓은 조그만 돌들의 탑도 빼꼼히 서 있었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 물이 흐르면 저 앙증맞은 돌탑들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Y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좀 더 올라가다 보면 큰 표지판이 있다. 이제 탑을 보는 건가 심쿵했는데 내용을 보니 진짜 '삼층 석탑이 있다'는 게 아니고,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오른쪽 사진에 나오는 표시를 만나게 되면, 석조여래좌상이 멀지 않다는 신호라고 여기면 된다. 석조여래좌상은 남산 1코스, 삼릉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우람한 불상이다.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사연이 많았다. 파손되고 여기저기 흩어진 것을 복원했다고 한다.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은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자리한 석불로 불상의 몸과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불상의 얼굴 아래쪽이 부서지고 광배도 떨어져 흩어져 있던 것을 발굴, 조사한 후 복원하였다. 불상의 머리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상투 모양의 큰 육계가 있다. 처음부터 불상의 머리와 몸을 따로 제작해 조립한 것인데, 얼굴 아래쪽이 심하게 손상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왼쪽 어깨에만 걸친 옷은 옷의 주름이 간결하고 몸의 윤곽이 드러나게 밀착되었다. 손의 모양은 오른손을 펼쳐서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은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다른 돌로 만들어진 광배는 파손되어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복원한 것이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위와 아래를 연꽃무늬로 장식한 3단으로 되어 있다.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자세와 섬세한 조각 기법 등으로 보아 이 불상은 8~9세기에 만들어진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 주위에서는 건물을 지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부터 바람과 비를 맞게 놓아둔 노천불이었을 거라는 얘기다. 안내 자료에 따르면, 광배는 윗부분이 조금 깨진 채로 불상 후면에 세워졌으나 1963년 겨울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렸다고 한다. 이걸 복원한 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2008년 12월이다.
불상은 산을 뒤로하고 앞을 바라본다. 그 앞의 공간에 아주 조그만 탑 모형이 있다. '이건 또 뭔가' 했는데, 불상이 바라보는 그 위치에 같은 모양의 삼층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불상을 보고 개울을 건너면 선각 마애불이 있다고 지도에 나와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잘 보이지 않는다. 선각이라 그럴까? 그래도 눈비를 맞으며 천년을 견뎌온 것인데.... 아래, 안내 책자에 나온 모습도 아주 뚜렷하지는 않다. Y는 바위에 새겨진 선각불상은 아마도 불심을 가진 사람이, 좋은 기회를 만나야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안내판이 또 있다. 왼쪽의 그림은 잘 보이지 않는 마애불상을 사진에 담아놓은 것이고, 오른쪽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석조여래좌상의 모습이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인터넷 사이트로 들어가서 진짜 있는지 찾아봤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꽤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소개글에는 이 불상이 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게 되었는지가 나온다.
이 상이 발견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15년 무렵으로 『경주 남산의 불적(慶州南山の佛蹟)』에서는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경성으로 옮기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이 상을 입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상이 원래 있었던 곳은 경주 남산 서남쪽 삼릉곡의 작은 절터입니다. 삼릉곡 입구의 솔숲을 지나 1㎞ 남짓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이 상이 봉안되었던 장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불상은 절벽과 큰 바위 사이에 다진 자그마한 터 위에 안치되었습니다. 불상이 있었던 주변 바위에는 지름 30㎝ 가량의 반원형 기둥 자리가 남아 있고 기와편이 흩어져 있어 당초 이 상이 건물 안에 봉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은 보물 제666호 석조여래좌상에서 불과 4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 주변에 별도의 시설을 갖출만한 공간이 없어 삼릉곡을 따라 조성된 제6사지(寺址)의 일부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석조약사여래좌상을 지나 5-3 표지를 만나면 금오봉까지 거의 다 올라온 셈이다. 해발 262m라고 나온다. 안내 지도를 보면 선각 마애불에서 상선암까지 약 400미터이다.
'상선암'이라고 해서 나는 이렇게 높은 곳에 절이 있을까 했는데 민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소규모의 암자였다. 경북일보에 이종기 시민기자가 쓴 글을 보니, 이 암자는 일제 강점기 때 옛 절터에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말 맛이 좋아서 상선암에 대한 서술을 가져왔다.
경주 삼릉에서 금오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상선암’이 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쉬어가는 암자로 통한다. 8부 능선쯤인 이곳에 시원한 물이 있고, 멋진 산수미관(山樹美觀)이 둘러있기 때문이다. 고적한 산사보다 옆집처럼 편안해서인지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항상 시끌벅적하다. 일제강점기 때 옛 절터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조선 순조 때 임필대(1709-1773)가 지은 유동도록(遊東都錄·경주 유람기)에 ‘상선암에 오르면 앞쪽 하선암이 수석 사이에 있다’라고 썼다. 250여 년 전이니 그때도 옛 절 상선암이 있었던 모양이다. 스님들이 참선하던 곳으로, 산마루에 있다 하여 ‘상선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불사는 법당과 요사채 뿐인데, 등산길이 이 두 채를 갈라놓고 있다. 암자 뒤편에는 깎아지른 바위 군상과 틈새 멋진 소나무들이 조화를 이뤄 동양화 한 폭처럼 아름다운 산 풍경을 만들고 있다. 상사바위라고 부른다. 여기 남산 신(神)이 살고 있으며 남쪽엔 산신당(産神堂)이라 하여 아기 기도처가, 그리고 동쪽에 남근석과 감실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빌면 사랑과 자식을 얻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Y가 현장에서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무 한 그루가 암자 앞에 서 있다. 주변의 어떤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당당함이 척 보아도 느껴진다. 암자는 8부 능선에서 계곡 전체를 굽어본다. 탁 트인 절경이다. Y를 앞서가던 어머니와 딸이 있었는데 이들도 이 암자에서 만났다. 물 한 모금을 마시려고 들렸나 보다.
Y가 상선암 구경을 마치고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계단 옆에 안내판이 보였다. 뭐지? 그냥 지나치려고 하다가 읽어보니 계단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것이 선각된 불상이었다. 선각보살입상은 원래 있었던 자리는 알기 어렵지만, 처음 만들어질 때는 키가 5~6m에 달하는 대형 불상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남아있는 건 불상의 하반신으로 추정된다. 자세히 보면 옷주름이 보인다.
산행을 할 때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대개 계곡 길이다. 삼릉계 코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상선암에 이르러서는 탁 트인 정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들판에 봉긋봉긋 봉우리가 솟아있고, 가운데로 분지의 입구가 뚫려있다. 저쪽이 경주로 들어오는 경주 톨게이트이다.
가다가 보면 길 오른쪽에 통제 구간이 있다. 낙석위험 때문에 폐쇄된 길이라고 나와있다. 마애석가여래좌상 쪽으로 가는 길이다. 과거에는 여래좌상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갈 수 없다. 다만 폐쇄된 길을 돌아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볼 수 있다.
상선암에서 금오봉으로 가는 길에 몇 번 시원한 전망을 보게 되는데, 그중 최고는 역시 바둑바위이다.
냉골 암봉 바위산 꼭대기에는 금송정터라고 전해오는 건물터가 있다. 그 옆 바위 벌판에는 옛날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다고 하며, 『동경잡기』(1669년)에는 신라 때 옥보고가 거문고를 켜던 곳이라고 한다. 전망이 좋아 서라벌 벌판과 북남산이 모두 보인다.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면, 상사바위를 돌아보고 이곳에서 왔던 길을 돌아 내려가거나, 삼불사 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우리나라 지형 중, 저렇게 평지에 산들이 쑥 솟은 지형이 왜 없겠냐만, 평지가 거치적거리는 다른 인공 구조물 없이 저렇게 뚫려있는 곳은 드물 것이다. 넓은 평야 위, 산이 솟아 병풍을 펼치고 강이 흘러 땅을 적신다. 소설가 Y는 어디선가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지? 그래! 제주에서 오름에 올라 다른 오름들을 내려다봤던 기억이었다. 왼쪽이 경주이고 오른쪽이 제주이다. 사진을 찍었을 때가 2015년이라, 지금은 혹시 다른 풍경일까? 제주의 특성상 그렇진 않을 것 같았다.
Y는 정상에서 다양한 포즈로 인증샷을 찍는 부녀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절벽에 걸터앉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치는 포즈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바둑바위에서 조금 더 가면 상사바위가 나온다. 여기서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습이다. 머리와 어깨는 비교적 두꺼운데, 그 아래쪽 몸체는 바위에서 얼마 튀어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앉은자리는 2겹의 연꽃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하는데, 소나무에 가려 위에서는 볼 수 없다.
상선암에서 15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자연 암반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불상이 있다. 이 여래좌상은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다. 얼굴의 앞면과 귀 부분까지는 고부조로 원만하게 새겨진 반면, 머리 뒷부분은 투박하게 바위를 쪼아 내었다. 짧은 목에 삼도는 없고, 건장한 신체는 네모난 얼굴과 잘 어울린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을 짓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불상의 몸부분은 거칠고 억세게 선각하였고, 좌대 부분은 부드러워지다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린 듯한 모습이다. 대좌는 중대석이 생략된 채 앙련과 복련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앙련의 연잎 안에 다시 화문(花紋)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조각 수법은 불교가 바위신앙과 습합하여 바위 속에서 부처님이 나오시는 순간을 표현하였다고 생각된다. 입체감이 없는 신체표현, 힘이 빠진 옷주름 선 등으로 보아 9세기 불상양식을 반영하는 거대 불상이다.
여기까지 보면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봐야 할 것은 모두 본 셈이다.
이미 높은 곳까지 올랐기 때문에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보고 금오봉까지 가는 길은 거리가 좀 있어 보여도 전혀 힘들지 않다. 수평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상이니까 사진을 찍어야 할 것 같긴 했는데 다른 관광객들이 계속 포즈를 취하는 통에, 그냥 찍고 나중에 얼굴을 가리기로 했다.
금오봉은 해발 468m인데 냉골, 포석계, 지바위골, 비파골, 약수골 등의 분수령이다. 산 정상인데 넓은 터가 있고, 정상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배드민턴장이 있을 것 같은 동네 뒷산 분위기랄까? 그런데 아마도 옛날에는 이 정상에도 절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었다. Y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으니, '일단 정상까지 가보자'는 계획으로 출발했는데 어느 길로 내려갈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같은 길로 내려가는 건 너무 아까웠다. Y의 목표는 남산 완전정복이었고, 그러자면 다른 길로 가서 하나라도 더 보는 게 이득이었다.
안내 책자에 보니, 포석정 쪽으로 가는 길이 굉장히 넓게 표시가 돼 있었다. 어차피 포석정을 보고 싶었던 터라 잘 되었구나 싶었다. 금오봉 정상에서 화장실 표시를 보고 내려가면 상 정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굉장히 넓은 길이 나온다. '어쩌면 이런 길이 포석정까지 이어지는 건 아닌가?'하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다.
헬기장을 지나 큰길로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포석정으로 내려가는 길은 왼쪽이다. 150m만 내려가면 '금오정'이 나온다. 이건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의 건축물이다. 누구는 이 건축물을 두고 '남산 최악의 건축물'이라고 썼던데, 그렇게까지 힐난한 일인가 싶다. 일단 정자 안에 깨끗한 의자 등 너른 쉴 공간이 있어서 만약 포석정 쪽에서 올라온 탐방객이라면 팍팍해진 다리를 잠깐 쉬면서 경주를 내려다보는 시간을 갖기에 안성맞춤이다.
금오정에서는 가까이에 까치봉, 멀리로는 토함산이 보인다. 아까 바둑바위에서 봤던 것과는 다른 전망이다.
좀 더 노닥거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Y는 앉지 못했다. 서둘렀다. 늦은 오후였고, 그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에서 만나는 비, 어두움은 평지와 다를 테니까.
아까 올라온 길이 삼릉계라고 했다면, Y가 행로를 잡은 길은 '포석곡'으로 불렸다.
이쪽에도 사지, 즉 절터가 있는데 '포석곡 제7사지 큰능비절터'로 불린다. 폐허가 된 절터에 탑재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걸 모아서 한 곳에 두었다.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념갑석 등 8점의 석조 유물들은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의 부재로 추정된다. 유물들의 망실과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2013년 4월 현 위치에 받침대를 설치하고 정리하여 놓았다.
Y가 본 포석곡의 특징이 있었다. 가다가 문득, 느닷없이 대나무 숲이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침엽이 아닌 대나무 잎들이 포근하게 대지를 덮고 있었다.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득 이제 봄이 오면 이곳의 풍경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Y는 생각했다. 마음이 바빴는데도, 그를 멈춰 세우고 만 것이 있었다. 봄을 기다리는 "눈"(芽, bud)이었다.
나뭇가지에서 새롭게 돋아나려는 겨울눈(동아, 冬芽). 비늘처럼 덮인 저 속에서 꽃이나 잎이 숨을 쉬고 있고 이제 따뜻한 봄 햇살의 신호가 오면 터져 나오게 될 녀석들이었다. 흑백의 사진에 물감을 떨어뜨리듯 연녹색으로 피어나게 될 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놀라운 전경이 펼쳐졌다.
미친듯이 사진을 찍기는 했지만, 휴대폰 사진으로는 절대로 담아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돌 봉우리 늠비봉에 우뚝 솟은 5층 석탑.
탑은 높이 서서 그 아래 세상을 굽어본다. 그때도 지금도… 멀리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번뇌와 고통으로 뒤덮여 있어 참고 견뎌야 하는 세상. 사바세계(娑婆世界), 괴로움이 많은 인간 세계이다.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은 작은 늠비봉 정상부에 위치하여 늠비봉 오층석탑이라고도 불린다. 절터를 발굴조사하고 2002년에 석탑을 복원하였다. 이 탑은 경주 일대의 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다. 자연암반을 받침으로 삼아 암반의 요철에 따라 바닥돌을 세우거나 눕혀 쌓았다. 바닥돌 부재는 일반적인 가구식 기단과 달리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이다. 암반에 홈을 파서 바닥돌이 밀려나가지 않도록 고정하였으며, 1층 몸돌은 4개의 장방형 돌로 구성하여 모서리기둥 없이 세장한 형태이다. 나머지 몸돌은 각각 한 돌로 만들었는데, 2층부터 급격하게 높이가 낮아진다. 각 층마다 몸돌보다 넓은 몸돌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각 층마다 4매의 돌로 짜였고, 받침은 3단이다. 지붕돌 윗면에 두터운 내림마루(隅棟, 목조 건축에서 지붕의 모서리 부분에 기와를 몇 겹으로 높이 쌓아 솟아 있는 부분)를 새겼다.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경주 남산에 있는 백제 계통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예이다.
늠비봉은 100m 정도 높이의 바위산이다. 이 봉우리에 기단을 만들고 오층탑을 쌓았다. 자체 높이는 7m도 정도 된다는데 봉우리 위에 솟아 하늘과 닿아있다. Y는 내려가는 길에 만났지만, 포석곡으로 올라오다 보면 계곡 어디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위 설명에도 나오지만 연구자들은 이 탑을 신라 계통이 아니라 부여 정림사 5층 석탑처럼 백제 계통의 탑으로 분류한다.
소설가 Y의 상상력이 발동하였다. 통일신라 하대에 신라의 중심, 그리고 신라사람들이 신성시하는 남산에 백제의 탑이 선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백제 계통 석탑이라면 백제의 장인이 만들었을 터인데 그는 어떤 연유로 신라에 오게 된 것일까?
아마도, 처음 조성되었을 무렵 이 탑만 이렇게 덩그렇게 놓인 것이 아닐 것이다. 안내판에는 '제 6사지'라고 되어있었다. 아마도 여기에도 사찰이 있었다는 뜻이다.
Y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코스를 택한 것이 잘못인가 하고 잠깐 생각했었는데, 이 오층 석탑과 그 주변의 모습을 보고, 그 선택이 축복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래. 이 탑을 보려고 난 남산에 올랐던 거야'라고.
우리 삶은 대체로 우연인 듯 의지의 선택인 듯하다. 그러나 문득 지나온 모든 것이 필연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Y는 두 번째 대나무 숲을 지났다.
아직 얼어있는 계곡 아래로 물이 흐른다. 포석정을 앞두고 있어서였을까. 물 흐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이름 모를 새가 장단을 맞췄다. Y는 그 소리를 담아두고 싶어서 동영상을 찍었다.
그 길에는 Y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계곡에서 약간만 떨어져도 고요와 정적이 Y를 감쌌다. 그런데 어디선가, 속삭이듯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귀 기울였는데, 그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였다.
우산이나 우비를 가져오지 않은 터여서 덜컥 겁이 났다. 소설가 Y는 사실 겁쟁이였다. 쏟아질 비 같지는 않았다. 포석정으로 내려오는 길 또한 계곡과 인접한 코스다. 흰 얼음을 품고 있는 계곡을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 했다.
4-1의 표지를 보았다면, 포석정에 다 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포석정은 입장료가 있었다. 입구는 '포석정지 방문자센터'라고 쓰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있다.
돈을 받자는 취지라기보다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내부에는 읽어볼 만한 내용들이 많았다. '비운의 기록으로 남은 포석정'이라는 제목의 글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알려준다.
927년 9월(음력)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현 경북 영천)에서 신라 군사를 공격했다. 경애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태조가 보낸 군사 1만 명이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견훤은 갑자기 왕경(경주)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비빈, 종실 친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왕과 비는 후궁(後宮)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종실 친척과 공경대부와 부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왕은 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견훤군 진영으로 이끌려왔다. 경애왕은 곧 죽음을 맞이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2권의 경애왕 4년) 신라 하대의 역사는 55대 경애왕에 이어 56대 경순왕으로 이어졌으나 국력이 쇠락하여 고려에 귀부하기에 이른다. 포석정은 왕이 마지막으로 잔치를 베푸느라 적이 들어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여, 향후 이를 경계하며 여러 문헌에 비극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다른 자료의 다음 글을 읽어보자. Y의 기억에도 '포석정'은 타락한 신라의 상징처럼 들어있었는데, 실제의 역사는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경애왕은 위기를 당하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견훤은 구원병이 미쳐 이르기 전 겨울 11월 갑자기 서라벌로 쳐들어 왔다. 이때 왕과 왕비, 궁실의 종척들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즐겁게 놀고 있어, 적의 군사가 닥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왕은 붙잡혀 군영에 이끌려 나와 핍박당하여 자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신라를 타락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역사의 왜곡으로 보인다. 적군이 곧 들이닥칠 급박한 상황에서 이웃 나라에 구원요청을 하고, 겨울에 야외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1989년 발견된 『화랑세기』에 의하면,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포석사(鮑石祠)에 나아갔다는 일화, 문노가 죽자 포석사에 신으로 모셨다는 기사, 김춘추와 문희가 길례(吉禮)를 치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포석정은 호국신을 모시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경애왕도 이곳에서 호국신에게 제사지내고 기도하다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리라.
구불구불한 돌 홈 사이에 물을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술잔을 띄우는 '유상곡수'. 그 의미가 무엇이든, 실제의 역사가 어떤 것이든 포석정은 동양 삼국에 남은 유상곡수의 흔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포석정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에 서는 모든 버스는 황리단길을 거쳐 경주고속버스 터미널로 간다. 숙소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해졌다.
| 참고한 글
경주남산연구소, 『경주 남산 가이드북 ①』
경주남산연구소, 『경주남산, 역사와 예술을 만나다』
경주시사적공원관리사무소, 『경주문화재 길잡이』
경주국립공원사무소, '남산 문화재와 함께하는 탐방'
'경주 길라잡이'(Gyeongju Guide), 포석정지, 양산재, 나정
| 더 찾아볼 만한 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남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841#section-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