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원 | 사물에 매달린 그림자가 그려낸 그림들
경주에 오면, 언제나 고양되는 느낌이 있다.
자주 찾는 맥줏집 ㅎㅎㅎ 벽면에 붙어있는 구호, "Beer Makes Me High"에 세뇌된 탓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경주에 온다는 것은 내가 갇힌 우리를 열고 해방된 공간으로 나선다는 뜻이다. 그러니 고양될 수밖에.
KTX에서 내렸다. 날은 맑고 훈훈했다. 711번 버스를 타고 황리단길 인근에서 발을 딛자마자, 나는 굼주렸다는 듯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다음날 구름이 많고, 비가 올 수 있다는 예보를 봤기 때문이었을까? 태양이 우리에게 보내는 빛은 일 분 일 초도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빛, 그리고 그 빛으로 사물에 매달리는 그림자들은 매시각, 종잡을 수 없는 재미난 그림들을 그린다.
봄은 가까웠지만 아직이었다. 능은 노릇했다. 벌거벗은 나무 한 그루가 해시계처럼 능 위에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겨울에도 이파리를 떨어뜨리지 않는 소나무는 풍성한 그림자를 능의 어깨에 늘어뜨렸다. 가지들이 하늘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지만, 들을 수 있었다. 속삭이고 있었다. 준비하고 있는 걸.
"다가온 어느 날, 증거를 보게 될 거야.
시린 파랑이 아니라 따뜻함을 품은 연두색, 생명의 증거를 보게 될 거야."
대릉원에 갔다. 경주에 그렇게 여러 번 왔으면서도 왜 대릉원에 와볼 생각을 안 했을까.
버드나무는 이미 겨울에서 봄으로 성큼 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봄날의 나비를 기다리는 마음일까? 능의 경사면에 던져진 그림자가 날갯짓을 할 것 같았다.
빛을 마주하는 방향에 서면, 사물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는다.
나무 아래에 손을 잡은 그들은 해가 지는 서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주는, 하늘이 넓어서 빛이 그려내는 화폭도 더 크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겨우내 준비해 둔 희고 찬란한 옷을 꺼내 펼쳐 보이는 목련.
봉우리 안에 가둔 슬픔이 곧 터져 나오려 들끓고 있었다. 화려하지만 가장 슬픈 꽃이다.
아직 가을의 기억을 다 떨어뜨리지 못한 가지들도 이제 봄 비를 맞고 나면, 푸른 하늘에 다른 색깔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능은 땅을 품고, 배롱나무는 하늘을 품었다.
두 그루인 듯 한 몸인 듯 함께였다. 그래서 그림자도 한 줄인가 보다.
능의 선이, 봄나들이 차려입은 한복의 옷깃처럼 곱게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