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경주

세상을 등지고 그대, 세상을 굽어보았는가?

경주 남산 2코스 (용장골 - 봉화대능선 - 칠불암 - 남산동 삼층석탑)

by 은이은


소설가 Y는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지도로 파악하기로도 남족(용장골)에서 시작해 동쪽(남산동)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상당히 길어 보였기 때문이다. 용장사지를 보고 같은 길로 돌아 내려가는 게 아니라, 칠불암을 보고 말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시간이 짧고 찬 날씨에 비를 걱정해야 했던 1코스 여행과 비교할 때, 훨씬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출출해지면 까먹을 요량으로 출발하면서 빵집에 들러 요기거리도 챙겼다.


남산 제2코스


경주 남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김시습이다. 그는 신라시대 인물은 아니다. 조선 초기의 사람이다. 그러나 경주 남산이 어디 신라인의 것이기만 할까.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제목은 바로 남산의 금오봉(金鰲峰, 468m)에서 따온 것이며, 집필 장소가 용장사였다. 남산 2코스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다.


용장골 산행의 시작은 '달작'이라는 찻집부터이다. (C)은이은


날씨가 산행을 하기에 알맞게 찼다. 코스의 시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서부터이다. 용장골은 설잠교에 닿을 때까지, 돌돌돌 커다란 바위를 타고 고이며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상쾌하게 걷는 길이다. 경사가 완만했다. 이렇게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즐기며 갈 수 있겠다며 여유를 즐겼다. 지난번 산행 때는 아직 겨울에 가까웠던 터라, 그때 보지 못했던 초록의 기운들이 반갑고 고마웠다.


(C)은이은


겨우내 흙속에, 뿌리 곁에, 돌틈에 얼어있었던 물이 몸 햇살에 놓여나면서 계곡에는 제법 물이 모였다. 진짜 전문가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소설가 Y는 그 색감과 느낌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신록과 계곡과, 물 위에 반사되는 풍경과 새소리, 물소리, 숲의 향기까지 어우러진 향연이라니.


용장골 (C)은이은


Y가 목이 달아난 불상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건 아마 그런 봄의 밝고 흐뭇한 에너지에 취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내려와서 안내 책자를 다시 보니,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출발지점-설잠교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다. 계곡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약 150m를 들어가면 된다는데, 소설가 Y는 가는 길에 이정표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석조여래좌상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약 150m 정도 올라가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무너진 축대가 2곳이 있고 좀 더 올라가면 큰 축대가 나타난다. 법당터 한가운데 남향으로 앉으신 이 불상은 산에서 흘러온 모래와 자갈돌에 묻혀있던 것을 1940년에 발굴 조사한 것인데, 머리와 광배는 찾지 못하고 대좌와 몸체만 발견되었다. 불상은 결과부좌로 앉아 왼손에 약 그릇을 들고 오른손은 촉지인상을 나타내어 약사여래임을 나타내고 있다. 조각의 선은 부드럽고도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신체에 탄력이 없는 것으로 보아 9세기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삼단으로 된 이 불상의 대좌는 불상 아래에 묻혀있으며, 남산에서 셋 밖에 없는 희귀한 네모난 대좌이다. 주변에 석탑 옥개석 1점과 하층 기단석이 남아있다.


우리 역사에 아주 비극적인 왕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세종대왕의 장손, 문종의 장남, 단종 이야기다. 태어나자마자 엄마(현덕왕후)가 죽었고, 어릴 적 할아버지(세종)와 할머니(소현왕후)를 잃었다. 단종이 만 10살이 되었을 때, 아빠(문종)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그는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1년 만에,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쿠데타, 계유정난이다.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17살 꽃다운 나이에 그곳에서 살해됐다. 권력을 찬탈한 세력은 언제나 살상을 모의하는가 보다.


Y가 갑자기 단종을 떠올린 건 김시습 때문이다. 김시습은 천재였다. 역사의 주목을 받은 인물의 생은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그의 이름이 '시습'인 건 그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놀라서 지어준 이름이 바로 시습(時習), 논어의 첫대목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의 바로 그 '시습'이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대왕도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를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했다.


그랬던 김시습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21세에 머리를 깎고 방랑의 길에 들어섰다. 전국의 여러 곳을 떠돌았는데, 그가 31세에 도착한 곳이 경주 남산(금오산)이고, 그가 머물렀던 곳이 용장사다. 그러니까 용장사는 조선 전기 때까지만 해도 절이 있었다. 용장곡은 그 용장사 터로 향하는 길이다.


설잠교. 왼쪽은 계곡 아래에서 올려다본 모습. (C)은이은


완만하고 다소곳한 산책길 같은 계곡길은 김시습의 법명, '설잠(雪岑)'과 함께 끝난다. 오르다 보면 아담하게 굽은 다리 하나가 계곡의 이쪽과 저쪽을 잇고 있다. 김시습은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을 맹세하기 북향화(北向花,목련)를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그래, 불의에 저항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 소설가 Y는 생각했다.


속세를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는 걸 말하기라도 하는 걸까? 다리를 건너면 45도 이상이 되는 경사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가파른데도 그 길에 선 소나무들이 하나같이 곧고 잘 생겼다.


용장사지 가는 길의 소나무, 돌획 (C)은이은


소설가 Y는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힘을 주고 오르다가 원래 약한 오른쪽 무릎에 무리가 오는 듯해서 왼쪽에 힘을 줬더니 십자인대가 약간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다. '시간은 많지만 이러면 곤란한데'라고 걱정이 될 때쯤, 대나무 숲이 나왔다. 제1코스에서도 경험했지만 남산에서 대나무 숲을 만나는 건 가까운 곳에 절터(사지)가 있거나 있었다는 뜻인 거다. 아니나 다를까, 곧 용정사지를 만난다.


용정사지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길 오른쪽 위에 있다.


용정사지. 왼편 사진처럼 '출입금지'라고 되어있으나 용정사지 안내판과 터는 출입금지 간판 위로 가야 볼 수 있다. (C)은이은


조용하고 아늑한 터다. 대나무가 그 터를 두르고 있고 쌓여있는 돌무더기가 그곳이 절터였음을 증명해 준다. 소설가 Y는 그곳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스스로도 일찍(15세) 어머니를 여의고 불운한 삶을 살던 김시습. 성군 세종대왕으로부터 비단을 받았던 기억이 선명한데, 당시의 사회 규약과 정의(왕은 적자가 잇는다. 적자가 없다면 논의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된 자가 잇는다.)를 짓밟고 쿠데타를 일으킨 자가 정권을 잡고 휘두른다. 그리고 그는 후일의 화가 될지도 모르는 폐위된 왕, 단종을 사살한다.


세상을 뒤로하고 10년째 전국을 떠돌다가 용정사에 선 그는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용장사는 이 계곡의 주인격일뿐 아니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대가람이었다. 용장골의 남쪽 면은 수리산을 정상으로 하여 흘러내린 여러 갈래의 계곡들로 되었는데 열반골의 기암과 괴암들이며 은적암 부근의 삼각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해 금오산에서 뻗어 내린 여러 산맥들로 구성된 북쪽 면에는 이렇다 할 잘생긴 봉우리들이 별로 없다. 하지만 용장사가 자리 잡은 이 봉우리는 거대한 바위들로 첩첩이 솟아 있다. 용장사는 어느 때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초 설잠스님(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니 조선 중기까지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은 절터 축대들과 기와 조각들만이 폐허를 뒹굴고 있다.


절터를 보고 올라오던 길 바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탑재와 탁 트인 전망을 먼저 보게 된다. 탑의 기단 덮개 돌인데, 9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C)은이은


조금만 더 오르면 석조여래좌상을 만나게 된다. 불상보다 기단이 눈에 들어온다. Y가 신라시대 유물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였다. 기단이 아니라 탑 같다. 그것도 꼬치에 떡을 꿰듯 동그란 돌들이 엮여있는 형태라니.


이 불상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특이한 이야기가 나온다. <현유가해화엄(賢瑜伽海華嚴)>조에 있다. 옛날 용장사에 대현스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절에 미륵장륙석상이 있어서, 대현스님이 기도하면서 돌면, 미륵부처님 또한 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석조여래좌상이 고개를 돌렸던 미륵부처님이라고 추정한다.


석조여래좌상 (C)은이은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삼륜의 대좌에 머리가 없는 좌불이 있다. 지대석은 자연석의 윗면만 고르게 가공하여 쓰고 있는데 지대석이자 곧 기단으로 보인다. 높이 1m 남짓한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북 모양의 중대석을 업 고, 그 위에 쟁반 모양의 둥근 반석을 놓았다. 다시 그 위에 중대석과 반석을 놓았 고, 세 번째의 중대석을 결구시키고 앙련의 둥근 반석대좌를 마련한 위에 화려한 연꽃방석을 얹고 결가부좌로 앉은 불상을 모셔 놓았다. 불상의 높이는 연꽃방석 밑에서 목까지가 141cm이고 대좌의 총높이는 3m에 달한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 고, 오른손은 선정인, 왼손은 무릎 위에 얹어 땅을 가리키는 인상을 취하고 있는 것 이 특이하다. 양어깨를 덮고 흘러내린 가사 깃 사이엔 승기지가 비스듬히 가슴을 가리고 매듭이 맵시 있게 조각되어 있다. 또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가사끈의 수실 때문에 이 불상을 승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흘러내린 가사의 자락들이 물결처 럼 출렁이며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사진은 불상의 앞이 아니라 뒤쪽에서 찍은 것이다. 불상은 1코스에 본 탑처럼 계곡 아래에서도 보이는 위치가 아니다. 반대로 높은 기단 위에 오른 불상이 산 아래에 펼쳐진 세상,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바라보고 있다. 사바세계는 고통이 가득 찬 세계이다. 정토(淨土), 번뇌와 고통이 없는 깨끗하고 평화로운 세계와 대척점에 있는 세계이다. 보통 소설가 Y가 보아왔던 불상은 세상과 격리된 곳에 서서 세상을 외면한 채 신도들을 만난다. 그런데 석조여래좌상의 시선은 고통 가운데 허덕이는 세속을 향한다.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사바(娑婆) 산스크리트어 사하(Saha)를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사하(Saha)는 "견딘다", "참는다"는 뜻을 가진다. 뜻으로만 말하자면 사바세계는 '참는 세계', '인내의 세계'인 것이다. Y는 속으로 반문했다. 도대체 얼마나 참고 견뎌야 한다는 말인가?


그 말을 듣기라도 했을까? 몇 미터 되지 않는 곳에 인자한 얼굴 하나가 양각되어 있다. 차분하게 결과부좌를 하고 Y를 바라본다.


마애여래좌상 (C)은이은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뒤편 동쪽으로 높이 5.5m, 폭 3.6m가량 되는 바위면이 남향을 하고 있다. 그 바위면에 고운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상이 있다. 이 마애불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되어있는데 대좌의 연꽃을 보면 가운데 꽃잎은 비교적 크게 나타나고 양 가장자리로 가면서 차츰차츰 작게 하여 끝에서는 구름처럼 사라지도록 하였다. 불상은 풍만하고 건강한 위엄을 느끼게 하고 결과부좌로 앉은 두 무릎과 넓은 두 어깨는 당당하다. 상호는 머리를 반의 1/3쯤에서 고운 코를 형성하였다. 굳게 다문 입술은 양가에 힘을 주어 긴장된 표정인데 풍성한 두 뺨과 군살 어린 턱의 부드러움은 자비롭기 그지없다. 육계는 얼굴과 조화롭게 덩실 솟았고 머리카락은 나발로 표현되어 있다. 옷자락은 속이 다 비칠 것 같은 얇은 느낌으로 잘게 주름을 잡아놓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이 두 겹의 원으로 표현되었고 신광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광 좌측에 명문이 2줄로 10여 자 있으나 판독이 어렵다.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높이 오른 만큼 길은 더는 몰아붙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산 위에 솟은 탑을 만난다. 1코스에서 만났던 늠비봉 5층 석탑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조금 아담하지만, 산 위에 솟아 계곡과 그 아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굽어보는 자세는 다르지 않다.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용장사곡 3층 석탑 (C)은이은


용장사지 동쪽 능선 위에 자리하여 이 계곡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3층 옥개석까지 남아있으며, 높이 4.5m 이다. 멀리서 보면 350m 높이의 바위 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듯 하여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 탑을 세운 듯하다. 바위에 홈을 파고 6cm 정도 되는 괴임을 2단으로 마련하였다. 기단의 한 면은 1장의 큰 석재로, 나머지 3면은 2매의 석재로 결구시켰다. 탱주는 한 개 이다. 위에는 탐신괴임 2단이 마련되었고, 기단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다. 탐신과 옥개석은 가각 1매의 석재로 되어있고, 2층 탑신은 1층에 비해 체감 효과를 크게 주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꾀했다. 옥개받침은 모두 4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의 상면에는 탐신괴임이 2단씩 마련되어 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탑 기단석으로 추정되는 돌이 있다. 여기까지 보면 용장사지의 유물들은 모두 본 것이 된다.


탑기단석. 용장사지 최상부에 있는 석재 기단인데 탑의 기단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제단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C)은이은


처음 보았던 지도와 달리 아래 위가 뒤집혀있다. 용장과 금오봉, 이영재 세 방향의 갈림길이다.


경주 남산은 특이한 점이 하나 또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들 가까이 차가 지날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있다는 점이다. 안내판에 그런 건 없는데, 1코스에서 뵈었던 한 지역 어른 말씀으로는 '임도는 아니고, 1960년대에 관련 유물 등을 정리하기 위해 길을 낸 것'이라고 했다.


용장 쪽에서 삼층석탑을 보고 조금만 더 가면 갑자기 동네 뒷산 같은 넓은 길이 나온다. 용장과 금오봉, 이영재 이렇게 세 방향으로 나뉘는 갈림길이다.


(C)은이은


지난번처럼 그 넓은 길에서 지역 어른을 만났다. '이영재 쪽으로 간다.'라고 했더니 그렇게 이정표가 나오지 않으니 '칠불사'로 되어있는 안내를 따르라고 말씀해 주셨다. 넓은 길로 더 내려가면 우측으로 칠불사 이정표가 나올 거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한 마디를 더 보태셨다.


"길이 좀 험한데 … 험한 거리는 한 300미터 밖에 안 되어요.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는 말씀에 오히려 바싹 긴장이 되었다. 시간이 긴 건 상관이 없는데 무릎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먼저 언급해 두고 넘어가는데, 지난번 1코스와 달리 이번 2코스는 노약자에게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용장골을 목표로 한다면, 금오봉을 지나 삼릉계곡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추천한다. )


내려가다 보면 길 왼편으로 지나치기 쉬운 안내판이 있다. 지나치면 안 될 대연화대가 있는 곳을 안내하는 표식이다.


대연화대 (C)은이은
대연화대 (C)은이은


용장골 정상에 있는 높은 암반 위에 거대한 연화대좌가 있다. 그 위에는 웅려무비한 솜씨로 큰 연꽃이 새겨져 있다. 본래는 그 위에 석불이 안치되었을 것이다. 이 봉우리는 용장사 쪽으로 뻗어내린 장엄한 산맥과 남으로 뻗어내려 고위산에 연결되는 산맥, 금오산정에서 굽이쳐오는 세 갈래의 큰 산맥을 모아 꽃송이처럼 솟아오른 봉우리이기 때문에 심화령이라고 한다. 이 봉우리에 올라서면 앞으로는 고위산이, 동쪽으로는 토함산 불국사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단석준령이 바라보인다. 대좌 앞으로도 한 단의 계단이 더 마련되어 있지만 몇 걸음 아래가 낭떠러지라 겨우 참배가 허락될 정도의 여유만 있는 곳이다. 아마도 이곳을 천혜의 성스러운 부처님 땅으로 여겨 불상과 연화대를 새겨 그대로 예참 정진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생의스님이 찾아내고, 35대 경덕왕 때 충담스님이 차공양을 올리고 안민가를 노래하던 심화령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누군가 진달래 꽃송이 하나를 꺾어 삼화령 대연화대에 올려놓았다. 만약 소설가 Y가 지나온 그 넓은 길이 없던 시절에는 거대한 연화대좌가 더 신비하게 보였을 것 같았다. '


굽이쳐오는 세 갈래의 큰 산맥을 모아 꽃송이처럼 솟아오른' 연화대좌가 있고 그 위에 석불이 앉았던 거라면. 어스름 새벽과 해가 떠오르는 아침, 해가 머리 위로 높이 솟는 정오와 서쪽으로 비끼는 오후, 그리고 붉고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 하늘이 물드는 석양까지. 그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리보이는 거대한 불상. 이곳과 관련해 어찌 전설이 없을 수가 있을까.


남산의 봉우리인 금오봉, 고위봉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는 이곳을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 때 생의(生義)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로 데리고 갔다.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나를 파내어 고개 위에 옮겨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 골짜기를 찾아가니 꿈속에서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스님이 땅을 파내자 미륵불이 나타나 삼화령 위에 모셔놓고 절을 지었다. 경덕왕 때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 스님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부처님이다.


칠불암이 표시된 갈림길 표지판 (C)은이은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른쪽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가파른 구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Y는 등산용 스틱이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훌륭한 벗을 만났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기도 하고 바싹 말라있기도 한 나뭇가지가 있었다. 그 벗이 아니었다면 내려가는 길을 Y의 약한 무릎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대부분은 능선을 따라 길 옆으로 소나무가 섰고, 그 앞에 한 가족처럼 진달래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산 아래 복잡 거리는 생로병사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숨을 고르는 나그네의 땀을 식혔고, 마침 만개한 진달래들은 그 바람을 타고 유혹하듯 진분홍빛으로 흔들렸다.


칠불암 가는 길에 만나는 능선 길 (C)은이은


산행 시간이 길어서였을까? 상황 때문이었을까? Y는 지난번 보다 생각이 훨씬 더 많았다. 사람들을 생각했다. 신라시대의 고승들은 이 길을 걸었을까? 적삼을 입고 뒷짐을 지고 가지마다 푸르게 솟아오르는 이 생명들의 에너지를 보며 무어라 말했을까? 조선 시대, 쿠데타를 목격하고 속세와 이별한 김시습도 이 길을 걸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분홍빛 진달래를 보았을까? 그가 이곳에서 집필한 <금오신화>에 나오는 애달픈 사랑 이야기는 이 진달래를 닮았을까?


그러고 보면, 목련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4월의 경주를 환히 밝히는 벚꽃도 잎이 나오기 전 꽃이 맹렬하게 터져 나온다. 겨우내 죽은 듯 잠들어있던 나무는 그 어디쯤에 에너지를 축적했다가 계절이 바뀌면 약속했던 그 순간에 맞춰 한꺼번에 꽃들을 피워내는 것일까? 선사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던 벗 나무지팡이를 쿡쿡 땅에 짚으며 진달래꽃이 만발한 그 능선길을 걸으며 Y는 생각했다. 감사한 일이다. 이런 근사한 생명의 잔치를 구경할 수 있어서.



가는 길에 봐야 할 탑이 하나 더 있다. 어느 정도 지친 시점이라 맘 속에는 '꼭 들러야 하나'하는 게으른 변명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러나 언제 또 이 길을 걸을 것이며, 그때에 또 지금처럼 여유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탑을 구경하러 들어가는 길은 지금까지 만나봤던 어떤 길과도 달랐다.


절터는 무언가 비밀을 품은 듯했다. '제 3사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기록이나 그 밖의 유물에서 아마도 거기 있던 절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들어가는 길에 커다란 나무 하나가 껍질이 벗겨진 채 누워있었는데 커다란 이무기 한 마리가 허물을 벗고 있는 장면 같다고 Y는 생각했다.


제 3사지 3층석탑으로 가는 길 (C)은이은


Y가 사전에 참고서로 삼았던 <경주남산>이란 책에는 나오지 않은 탑이었는데, 표지를 읽고 보니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 남산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은 남산 용장 계곡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절터에 있다. 무너져 있던 것을 발굴 조사하여 200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지붕돌이 윗면까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그 모양이 벽돌탑의 형태를 닮았다. 8개의 직사각형 돌을 2단으로 쌓아 바닥돌을 구성하고, 그 위에 3단의 몸돌 받침을 놓았다. 1층 몸돌과 지붕돌, 2층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지만,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 3층 지붕돌이 하나로 이어진 점이 특이하다. 각 층의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고, 처마의 모서리마다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1개씩 남아 있다.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져서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과 머리장식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이 탑은 남산동 동삼층석탑, 서악동 삼층석탑과 함께 경주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탑 형태로 신라 석탑사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제 3사지 3층 석탑 (C)은이은


다시 되짚어 능선길로 들어섰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깎아지른 듯 급하게 내려가는 경사가 있었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그 아래 세상이 그만큼 넓게 보인다는 장소라는 거다. 사진을 왜곡된 각도로 찍어도 보고 파노라마로 찍어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Y의 앞에 펼쳐진 가슴이 웅장해지는 그 장면을 담아낼 방법이 없었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가기 전 능선길 끝에서 본 경주 (C)은이은


칠불암으로 내려가기 직전 옆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마애보살반가상을 보러 가는 길이다. 가파르지만 몇 미터 안 된다. 깎아지른 바위에 양각으로 불상이 새겨져 있다. 그날 신자 한 분이 그 앞에서 경서를 펴놓고 읽고 있었다. 관광객인 Y가 사진을 찍고 돌아다녔지만 개의치 않으셨다.


마애보살반가상 (C)은이은
마애보살반가상 (C)은이은


서라벌 벌판이 한눈에 펼쳐져 가슴이 확 트이는가 싶더니, 뒤돌아서 보살상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보살상의 모습 또한 신비롭다. 보리수 잎 모양의 감실을 파고 구름 위에 의자를 놓고 의자 위에 편안히 앉아 계신다. 오른손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도솔천 하늘을 유 유히 노니시는 모습이다. 표정 또한 미소를 머금은 듯, 아닌 듯 초연한 모습이다. 잠시 앉아 보살상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면 나도 또한 도솔천에 있는 듯하다. 이곳이 바로 서라벌 남산의 도솔천이다.(중략) 이 보살상은 보통 관세음보살로 보고 있으나, 도솔천의 미륵보살로 보는 것이 주변 모습과 더 어울릴 것 같다. 신라불교미술의 전성기인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그 절벽 아래에는 칠불암이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였다. 능선길이 끝나는 곳에서 급한 경사를 타고 내려가면 다시 대나무 숲이 보인다. 이젠 자동이다. '아, 사찰이 있는 곳에 다 왔구나.'


좌, 칠불암 가는 길. 우, 칠불암 전경(와이드로 찍어서 약간 왜곡이 있습니다.) (C)은이은


칠불암에 가서 가장 처음 드는 생각은, 이 암자가 정말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았구나 하는 점이었다. 빛 때문에 아주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데 칠불암을 마주 보고 서서 왼쪽 위를 보면 깎아지른 돌의 절벽이 마치 잘 다듬은 병풍처럼 서있다. 불상은 동쪽을 보고 있지만 암자 터가 워낙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탓에 걸리적거리는 것 하나 없이 한낮의 태양이 온전히 암자를 비췄다.



높이 5m, 너비 8m로 병풍처럼 솟아 있는 절벽 바위 면에 거의 입체상만큼이나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삼존불은 규모와 솜씨 모두 남산불상 중 으뜸이다. 석굴암 불상보다 이른 통일신라 불교미술 발전기의 불상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이 불상들은 신라불교미술의 발전기로 꼽히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조 성된 것으로 그 시대 최고의 걸작이다. 지금까지 이 불상들은 중심주굴(中心柱窟굴의 중심에 불상을 새긴 기둥이 있는 석굴)의 형식으로 보아 왔으나, 앞의 사방불은 부 근에 쌓여져 있는 석탑 옥개석과 함께 1층 사방불탑이었으나, 절이 폐사가 된 후 어느 때인가 마애삼존상 앞에 축대를 쌓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자세히 관찰하면 마애 삼존상과 사방불의 조각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양식적 특징이 보인다.


인용한 글에서도 보는 것처럼 '사방불'은 지금 놓인 자리가 원래 있던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불상이 겹쳐 놓여있다 보니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불상들을 제대로 보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칠불암에는 이 불상들 말고도 과거 절의 흔적들이 여럿 있다. 마당에 아주 거대한 탑의 부품이 놓여있는데, 이 탑이 온전했다면 얼마나 컸을까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신라시절 이곳에 있던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C)은이은

칠불암에서 10여 미터 정도 내려가면 맑고 단 물이 나는 샘이 있다.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진 Y는 거기서 목을 축였다.


칠불암 아래 샘 (C)은이은


칠불암까지 구경하고 단 물을 마시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이제 내려가는 길만 남은 거였다. 칠불암에서 남산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나무를 구경하는 길이다. 유난히 쭉쭉 뻗은 적송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듯 서 있었다. 용정골로 올라올 때도 소나무를 보았지만 칠불암에서 내려가면서 본 소나무가 그중 가장 아름다웠다. 병충해를 막기 위한 조치인지 곳곳에 배어낸 나무들이 있었다. 나이테를 드러내고 누운 소나무의 연령을 한 번 헤아려보았다. 최소한 60년은 넘게 산 나무였다.


칠불암에서 남산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만나는 소나무들 (C)은이은


다리를 건너며 시작된 산길은 다시 다리를 건너며 끝난다. 그다음엔 개인이 농장을 이용하는 사도를 지나 마을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 위치에 써먹기에 아주 좋은 지도가 붙어있어서 카메라에 담았다. 경주 국립공원 남산지구 탐방코스와 각 코스에 붙어있는 위치번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지도였다. 파일로 첨부한다.


아침에 싸왔던 간식은 정오 전에 이미 비웠다. 이미 17,000보를 걸은 뒤라 기력이 없는데 고픈 배를 채울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신라의 탑이 나왔다. 남산만 생각하고, 평지에는 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찾아볼 생각을 못했을까. Y는 탄식을 했다. 쪼르륵 소리가 나서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멈춰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의 자태는 고왔다.


염물사지 3층석탑 (C)은이은


이 두 삼층석탑은 염불사 터로 전하는 남산 동쪽 봉구곡 자락에 무너져 있던 것이다. 두 탑을 복원하기 전에 동탑은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 1층 지붕돌과 합쳐져 불국사역 앞에 세워져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염불사지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를 하였으며, 역 앞의 탑을 해체해서 2009년 1월 이곳에 두 삼층석탑을 복원하였다. 두 탑은 비슷한 규모로 2층 바닥돌에 3층으로 몸돌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형태이다.


<삼국유사>에는 이 탑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염불사조에 의하면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동네에는 피리사라는 절 이 있었다. 절의 스님은 늘 아미타불을 염하는데 그 소리가 성안에까지 들려 360방 17만 호에 들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소리는 한결같이 낭랑하여 모두가 그를 공경하 여 염불스님이라 불렀다. 그가 죽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 리사를 염불사로 고쳐 불렀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마을 이름을 따서 양피사라 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탑이 또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소설가 Y는 지치고 곤한 몸을 이끌고 또 다른 두 탑을 만나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장이라도 택시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양피사지 동서 3층석탑 (C)은이은


서탑은 이중기단으로 된 일반적인 양식으로, 석가탑에 버금가는 조화와 균형미를 갖춘 아름다운 탑이다. 상층 기단에는 팔부중상을 조각했다. 팔부중은 본래 힌두의 신들이었지만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었다. (중략) 동탑은 광대한 이중의 지대석 위에 세운 전탑의 양식을 띠고 있는 모전석탑이다. 동탑은 꿋꿋하고 힘차게 솟아있어 남성답고 서탑은 부드럽고 화려하여 여성스럽다.
이 탑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으로 알려져 왔으나, 양쪽 탑의 지면의 높이가 다르고, 동서축이 달라서 별도의 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양피사지, 염불사지 탑도 아름다웠지만 남산마을 얘기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중에 현지 분들에게 들어보니 남산 주변 일정 범위 이내에는 한옥 외에는 지을 수 없게 되어있다고 한다. 재산권의 침해일 수는 있겠으나, 그런 규정 덕분인지 남산마을은 꼭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내린 조선시대 양반 동네 같은 느낌이 났다.


(C)은이은
(C)은이은


지도에는 뭐가 더 나왔지만, 더는 못 할 것 같았다. 마침 만나게 된 남산마을 남산식당에서 파전과 들깨칼국수를 흡입했다. 맛이 깊고 풍부했고, 양도 푸짐했다. 다만 나는 제피(산초)를 꺼리지 않는데, 그 향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반찬으로 나오는 부추무침은 먹지 않는 게 좋다. 듬뿍 들어간다.


남산동 남산식당 (C)은이은


제법 긴 코스여서인지, 생각이 많았던 산행이어서였는지 글도 너무 길어졌다.


힘든 길이란 걸 알았다면 코스를 그렇게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도하지 않았다면, Y는 진달래 가득한 그 길을 영영 못 걸었을지도 모른다.


"Isn't it nice to think that tomorrow is a new day with no mistakes in it yet?"
루시 모드 몽고메리(L. M. Montgomery), 『빨강머리 앤』



길에서 만나 친절하고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던 나무


| 참고한 글

경주남산연구소, 『경주남산, 역사와 예술을 만나다』

경주시사적공원관리사무소, 『경주문화재 길잡이』


| 더 찾아볼 만한 곳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남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841#section-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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