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마나베 히데오
소설가 Y는 매일 아침 30분씩 산책을 한다. 이혼을 하고 지금 집으로 이사를 온 뒤로 꽤나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루틴이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름다움이다. 인천과 김포의 경계에 있는 그의 집은 산과 마을의 경계에 놓여있기도 하다. 아침마다 길을 걸으며 '오길 정말 잘했다.'라고 느낀다. 아주 작은 동네 뒷산이지만 생명들이 그득하다. 새소리를 들으며 하는 산책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그 길에 서 있는 나무들에 감사한다. 겨울이 오기 전 나뭇잎을 떨궈 추운 날들에 햇빛을 쪼일 수 있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계절에 화려한 꽃을 피우며, 좀 뜨겁다 싶은 시점이 오기도 전에 푸르고 커다란 잎을 키워내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친절하고 사려 깊은지.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지나면서 만약 그 길이 없었더라면 그냥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고 Y는 생각하곤 한다.
덕수궁으로 가는 길도 초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무성한 이파리들을 얹은 늦은 봄의 나무들은 탄력 있는 근육을 장착한 청년을 보는 듯했다. 600년 가까이된 고목도 수액을 맞고 있긴 했지만 파랗게 빛나는 계절을 한몫 거들고 있었다.
덕수궁에 갈 때마다 Y는 슬픔? 쓸쓸함 같은 걸 느끼곤 한다. 근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서지고 말았던 제국의 꿈.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의 과거와 여전한 현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역사 이야기를 심각하게 할 공간은 아니라서, 한 가지 사실만 언급하고자 한다.
궁의 터는 이렇게 저렇게 잘려나갔고, 잘려나간 그 한 편, 아주 넓은 공간에 주한미국대사의 공관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건 그래서 Y에겐 공교롭게 느껴졌다. 초현실과 한국의 근대를 연결시킨 것도.
이들의 작품은 작가 생전에는 일종의 시대착오나 오리지널의 모방으로 간주되었고, 사후에는 점차 잊혔다. (중략) 어떤 구심점도 갖지 못했고 집단을 이루어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이들은 추상, 실험미술, 민중미술 등 당대의 전위를 뒤쫓는 후위가 되는 대신 차라리 주변에 머물기를 택했고, 광복 이후 현대성 모색과 함께 한국 미술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로 주어진 전통의 재발견, 민족적 정체성 추구에 구속되지 않고 알아주는 이 없는 외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2,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여러 작품들이 있었는데, Y가 가장 유심히 봤던 건 '마나베 히데오'라는 작가의 그림들이었다. 그의 한국 이름은 '김종남'이다. 그런데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일본 마나베 집안의 양자가 되었다. 일본인과 결혼했다. 그의 아들들에게, 임종 직전까지, 자신이 한국인임을 숨겼다. Y가 생각하기에 그의 이름은 '마나베 히데오'라고 부르는 게 맞다. 어떤 가치판단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떤 이름을 부를 때 그의 고국에서 발음하는 방식으로 불러주는 게 옳은 것처럼 그가 작품활동을 할 당시에 그가 내놓은 이름이 그 작품에 붙어야 할 이름이라서 그렇다.
마나베 히데오의 그림은 채도가 높은 녹색으로 무성하다. 언뜻 보기에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까워진 때의 이파리들 같은 색이다. 그런데 한 발 더 가까이 가면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화폭 전체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채게 된다. 여러 존재들이, 보호색을 띠고, 곳곳에 숨어있다. 그림의 제목은 <새들의 산아제한>이다.
<마른 꽃의 환상>은 정 반대다. 가까이에서 파악한 부분들은 그저 풀들이지만, 그 부분들이 얼기설기 엮여 어떤 존재를 형상화한다. 부분은 디테일이 강조된 가치중립적인 마른 꽃들일뿐이다. 그러나 그 전체에선 추하고 흉한 낫을 든 사신(死神, Grim Reaper)으로 보인다. 서양 문화에서 죽음을 의인화한, 검은 망토를 입고 해골 얼굴에 긴 낫(scythe)을 들고 있는 죽음의 사자 말이다.
<은자의 유혹>에서도 화폭 안에는 존재들이 가득하다. 붉은색, 초록색, 푸른색, 주황색 같은 원색들이 쓰였는데 그림은 추하고 어둡다.
전쟁의 불길이 거세질 무렵 그는 육군 항공 정비부대에 징용되어 항공병을 위한 교육자료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고, 전후에는 미군부대에서 영자신문 디자인과 편집 일을 하면서 작업을 병행했다.
그 시대는 어두웠다. 징용되었다면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벌인 일본의 군대에 징용되었다는 걸 뜻할 테고 일본패망 뒤에는 미군부대로 취업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그의 말은 이렇다.
"전후에는 급여를 받는 생활을 오랫동안 이어가느라 그림 방면에서는 완전히 시간을 낭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최근에야 겨우 제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날은 저물고 길은 멀게 느껴지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마나베 히데오의 언급이다.
<초록의 감시자들>(1982)에서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화면 우측 아래에 등장시킨다. 몹시 당황스럽다. 초록 색조와 대비되는 갈색 색조의 옷을 입은 인물이다. 그는 왜 그의 모습을 등장시켰을까.
그에게 직접 물을 수 없는 Y는 '뇌피셜'을 동원할 수밖에. <나의 풍경>이라는 작품을 안내자로 삼았다. 그는 외눈박이다. 화폭 오른쪽 하단에 다른 두 개의 눈이 있다. 거기에 돈이 있다. 머릿속에 역시 돈이 있다. 그리고 볼품없이 마른풀들이 있다. 화면 왼쪽에는 먹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있다. 후경에는 상처들이 있다.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 일장기가 그려진 찌그러진 동체. 하늘에는 벌레들과 함께 영혼들이 날아다닌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마귀가 꽃을 든 신부처럼 숨어있다.
문득 질문들이 떠올랐다. 작가가 그를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것이 요즘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 수 있을까?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마나베 히데오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다음에 이어진 궁금증은 이랬다. 아름다움으로 추함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그의 책「Aesthetic Theory」(미학이론)에서 예술에서의 추함의 표현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모순과 고통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봤다. 즉 추함을 표현하는 예술이 단순히 심미적 불쾌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고통과 부조리를 직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적 공포와 비인간성 이후에 조화롭고 아름다운 예술을 만드는 것은 오히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봤다.
작가 자신의 모습이 등장하는 '제목 미상'의 또 다른 작품은 소실점 구도 위에 얹혀있다.
달이 빛나는 푸른 밤하늘은 평화로운데, 첨탑 위에는 흰 깃발이 나부끼고 거리는 비정상의 존재들로 넘쳐난다. 모나리자의 손 모양을 한 여인은 하나였다가 머리 두 개, 팔 두 개, 다리 네 개의 존재로 변신한다. 존재들은 모두 얼굴 크기의 리본을 달고 있다. 지팡이를 짚은 존재의 가슴엔 황금빛 훈장이 달려있다. 몸통만큼 긴 푸른 넥타이를 맨 남자는 목줄을 단 동물처럼 돈 가방에 매여있다.
커트 J. 듀카스(Curt J. Ducasse)는 그의 저서 「예술의 철학」(The Philosophy of Art, 1966)에서 예술과 아름다움 사이의 필연적 연결을 부정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을 감정의 표현으로 보았으며, 이 감정이 반드시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관통하는 주제는 보호색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의 이름처럼 보호색으로 가려진 자신의 내면의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그려내려했던 것이 아닐까?
동그란 1집, '오후 2시의 공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https://view.mmca.go.kr/streamdocs/view/sd;streamdocsId=0g9Vo7IcDeiYrR6YOM0y5l-pFBocR77ypT4zYuKArLU
1.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Theodor W. Adorno](https://plato.stanford.edu/entries/adorno/)
2.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Theodor Adorno](https://iep.utm.edu/adorno/)
3. [The Brooklyn Rail - On Adorno's Aesthetic Theory](https://brooklynrail.org/2017/12/criticspage/On-the-Aesthetic-Theory)
4. [Encyclopedia.com - Beauty and Ugliness](https://www.encyclopedia.com/history/dictionaries-thesauruses-pictures-and-press-releases/beauty-and-ugliness)
5. [Brown University - The Philosophy of Art by Curt J. Ducasse](https://library.brown.edu/cds/repository2/repoman.php?verb=render&id=1303310930640625&view=pageturner)
6. [Journal of Aesthetics and Art Criticism - Curt John Ducasse](https://onlinelibrary.wiley.com/doi/abs/10.1111/1540_6245.jaac12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