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기울인 몸들 :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무시무시한 햇살이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Y의 메모장에는 그날의 기록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그 메모가 지난 6월 22일, 일요일에 작성되었던 걸 생각하면서 Y는 "아, 그때는 더위가 애교였지!"라고 기억을 바로잡았다. 지금은 양산을 써도 그 강한 광선의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 모든 것은 그렇게 상대적이다.
Y의 다음 메모는 "그러나 정말 무서운 것은 '생각'이다."였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담에 바짝 붙어서 걷다가 문득 떠올렸던 것 같다. 경복궁을 가리고 섰던 중앙청 건물을, 그리고 창경궁에서 '껙껙' 소리를 내던 원숭이들을. 한 나라의 상징적 건물들을 짓밟는 방식, 그 잔인한 생각에 그 뜨거운 더위에도 몸서리를 쳤다.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의 자태가 고왔다. 외국인들도 많았다. 행복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복은 상대적으로 짧은 저고리와 올려 입는 치마 덕분에 다리가 길어 보인다. 인체의 비례를 아름답게 해 주고, 복잡하지 않은 의복.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고유의 의상이 있다는 건 문화적으로 행복한 일이라고 Y는 생각했다.
Y의 처음 기획은 여러 미술관들을 쏘다니겠다는 것이었는데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전시의 기간이 길었다. 그래서 매주 일요일 미술관을 하고 매주 한 번 글을 올리겠다던 원대한 목표는 이미 멀어져 버렸다.
'기울인 몸들 :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라는 제목의 전시는 확 끌리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Y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 누군가로부터 생각을 강요받는 것이 무척 싫다. 그 제목은 꼭 '내가 너에게 뭔가 말해야겠어. 너는 닥치고 듣는 게 좋을 거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Y는 "아니지, 아니야."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취약함'은 곧 그에게 다가올 '미래'이기 때문이다.
전시실로 들어가면서 Y는 그 입구에서 잠시 멈춰 생각에 잠겼다. 전시를 보기도 전에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전시실 입구에서 Y는 '점자 유도선'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보았던 전시 중, 이런 점자 유도선을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았다. 작품들에는 점자 설명이 모두 붙어있었고, '만져볼 수 있다'는 안내도 나와있었다. 소리로 설명을 해주는 장치도 곳곳에 달려있었다. 실제의 의도가 그러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시는 전시의 내용을 떠나 일반적인 전시가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멀리 있는지 웅변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보았던 건 호스를 꽂은 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아이의 몸을 보조하는 기구를 닮은 작품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것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상태였다. 절망적인 몸짓이었다. 통제되지 않는 몸을 말하고 있었다.
두 번째 보았던 건 장애를 가진 사람이 생활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들이었다. Y는 '이게 뭘까?'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신체 기능 일부의 상실일뿐이지만, 그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불능이다. 부분적 상실의 효과는 한 인간을 한 순간에 가장 바닥으로 떨어지게 한다.
Y는 한 기억을 떠올렸다. 봄이었다. 부모님께 경주 여행을 권했었다. Y는 경주를 좋아하니까. 그리 넓지 않은 구역에 오밀조밀 많은 문화유산들이 널려있으니까. 그런데 잠깐 생각을 해보고는 문득 겁이 났었다. '아, 내가 했던 것처럼 걸어서 그 모든 것들을 구경할 수는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의 몸 상태가 경주라는 공간의 특수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냥 감각의 일부 상실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세계가 달라지는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 Y가 지금 겪고 있는 세상, 인지하는 세상보다 훨씬 더 흉포한 세계일 것이다.
여인이 불투명하고 표면이 울퉁불퉁한 벽 안에 있다. 어쩌면 그 여인은 아름다운 모델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우리와 다른 시야를 가진 사람에게, 혹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아름다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전시물들은 계속 Y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전시실 중앙. Y는 '이건 뭐지?' 생각했다. 작품 설명을 보기 전까지 도무지 이게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리처드 도허티는 손과 표정, 몸짓으로 말하는 수어를 사용하는 건축가다. 농인이 편하게 대화하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연구한다. <농인공간: 이중원형>은 둥근 공간으로 농인들이 대화를 위해 모인 모습을 따라서 만들었다. 이곳은 반투명 벽과 거울로 이루어져 있어서 어디서든 다른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공간 안에 다섯 가지 색의 받침대가 있다. 수어를 할 때 손에 든 물건을 잠시 올려둘 수 있다.
두 얼굴 사이에 손을 맞잡은 사진이 모로 붙어있다. Y는 저게 뭔가 했는데 설명을 보니 손을 잡고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작품이었다. 입체적이지만 평면적이고, 서로 다른 시간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Y는 그런데 그 사진들 안에서 외로움과 공감을 읽었다. 얼마 전 독서 모임에 갔다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임에는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환갑을 넘긴 여성이 들여준 이야기였다.
"아파트 단지에서 굉장히 단아한 어른을 뵈었어. 옷도 곱게 입고 흐트러짐이 없었어. 그런데 항상 혼자 다니시더라고. 남편이랑은 사별했구나 싶었지. 그냥 좀 걱정이 되기도 해서 집으로 한 번 찾아뵈었어. 그 어른이 넓은 아파트에 혼자 사시더라고. 4개나 되는 방을 놔두고 거실에서 생활하셨어. 침대가 거실 한가운데 있었지. 그게 편하시다면서. 경계를 푸시고는 훌륭한 자식 얘기, 과거에 돈을 얼마나 갖고 있었다는 얘기, 세상 떠난 남편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등등 오래 말씀을 하시더라고. 아무래도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으니 그런가 계속 듣기만 했어. 나도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라서 어르신께 말씀드렸지. '혹시 무거운 걸 들어야 하거나 손이 필요하시면 경비실로 연락하시라.'면서, '경비실에 그런 연락이 오면 나에게 연락하라고 말해두었으니 부담 가지실 것 없이 연락하면 된다.'라고. 어르신이 고맙다면서 꼭 손을 잡으시더라고. 눈이 맑으셨어. 그런데 그다음 날인가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는데 아파트가 굉장히 소란하더라고. 경찰차가 오고 구급차가 오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뭔 일이 있나 했지. 그런데, 그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전날 멀쩡히 뵈었던 그분이. 마음이 굉장히 이상했어."
그 여성은 자기가 아는 어떤 사람이 남편 먼저 보내고 지금은 동성의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줬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왔다. 그리고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레이 커즈와일은 그의 신작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의 머리말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인류의 대장정은 이제 전력 질주 구간에 이르렀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우리가 '사회생물학', '진화생물학'에서 규정하던 여러 원칙에서 너무 멀어져 있고, 더 가파른 기울기로 점점 더 빨리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쩌면 인간성,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던 것들을 전부 폐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효율에 입각한 무시무시한 생각들이 그 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
'서로의 취약함'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친애하는 나에게
시간은 쏜살 같이 흐르고, 굽이굽이 험난한
돌봄의 길을 걷는 자는 다시금 기운을 얻는다.
나는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내가 진 짐이
참으로 무거워
무릎에 멍이 들어도
내 힘과 의지는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아
희망이 있기에
너는 혼자가 아니기에
- 진심을 담아, 프랭크
작가 : 구나, 김영옥×조미경×이진희, 김원영×정지혜, 김은설, 김 크리스틴 선, 데이비드 기슨, 리처드 도허티, 사라 헨드렌×케이트린 린치, 알레시아 네오, 윤충근, 윤상은, 조영주, 천경우, 최태윤×연 나탈리 미크, 판테하 아바레시 (총 15인(팀))
전시 연계 웹 도록:
https://looking-after-each-other.neociti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