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그리고 가죽

발렌어스 브랜드 다이어리 04

by 장재현입니다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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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을 쉬기로 했다.

직무에서 벗어난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동호회 활동도 꾸준히 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다른 삶은 완전 다른 세상 같았다. 마찬가지로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를 신기해했다. 요리사들이 동호회 활동을 안 하는 것도 신기해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직업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도 신기한 이유였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삶에 비해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없었다.


취미로 코딩을 배우러 다녔다. 코딩을 배우고 책을 읽고 운동을 했다.


언젠가 써먹지 않을까 싶어 웹 개발을 3개월 과정으로 배웠는데, 배우다 보니 흥미로워서 C언어를 따로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로직을 짜고 배우다 보니 사고방식도 직렬화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세상 모든 답이 0과 1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스크린샷 2020-10-05 오후 8.29.19.png 이 정도는 아니다. 출처:오늘의 유머

웃기는 건 이제 코딩하는 법은 기억나질 않는다. 사고방식만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도 언젠가 불러와서 쓸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발을 만든다는 것



신발을 만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만드는 원리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서 난이도 높다는 남성 수제화를 만드는 곳을 찾았다.

공방들이 생기기 시작할 때라 수제화 공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요리사로서 재료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가죽을 다양하게 만지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법은 내 경험에 기대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했다.




공장이라는 단어는 Product의 과정을 간단하게 축약한다.
과정을 전부 건너뛰게 만들지만, 나는 그곳에서 어떤 디테일들이 어떤 형태의 자존심을 만나 더 나은 제품을 완성시키는지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다.
과정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주방에서 생산자로써 자존심이 무엇인지 배웠기에 판매를 할 제품의 생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신발 만드는 법을 배우기로 한 이유다.



애석하게도 신발을 만드는 것엔 소질이 없었다.

신발을 만들기 위한 연습과 과정은 나와 맞질 않았다.

미싱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다.

한번 잘못 밟으면 걷잡을 수 없었다.

두 달쯤 경험한 수제화 만들기는 손재주 없음을 깨닫게 했다.


막상 신발을 만들어보니 사업화하기엔 현실적인 문제가 많았다.

신발은 사이즈 별로 재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처음 시작하는 사업의 방향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경험도 없이 재고를 책임질 수 없었다. 가죽은 불변의 소재도 아니라서 영원히 쌓아놓고 팔 수도 없었다.


첫 번째 제품으로 맞지 않았다. 첫 발을 들이는 제품으로는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게 내가 주방을 나와 첫 번째로 깨달은 해보기 전엔 몰랐던 일이었다.




가죽공방


프로토를 만들고 수정 후 제품을 만든다.

가죽 공방은 수제화에 비해 비교적 쉬웠다.

흥미 있는 제품을 만들고, 제품에 따라 다르지만 과정도 단순한 편이었다.


그래서 작업 기술이나 가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과정을 숙달하기에 좋았다.


가죽을 배운 덕분에 직접 가죽을 사러 다니고, 신설동에 가방 부자재 시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공방 선생님의 커리큘럼에 맞춰서 지갑 등의 제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배려해주신 덕분에 칼집이나 가위 집, 기타 주방 도구에 다양한 기술을 사용한 가죽제품을 만들면서 숙련도를 키워갔다.




제품 제작방식은 간결했다. 도안을 그리고, 프로토 타입을 안 쓰는 가죽(도꼬)으로 만들어 보고 수정할 내용을 정하고 제품을 완성한다.
새로운 메뉴를 만들 때도 그랬다. 업종에 상관없이 시제품을 만들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나 보다.


첫 번째 아이템의 아이디어를 여기서 얻었다.

다양한 가죽을 사용하면서, 기존 요리사 제품 시장에 없던 재질과 디자인이 떠올랐다.

요리사 제품이 가진 몰개성을 땅속에 묻어 버리고, 개성을 살아나게 할 방법을 찾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을 사용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상상되기도 했다.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