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어스 브랜드 다이어리 05
공방에서 다양한 기술을 배우면서 상상하고 있던 제품의 구현을 시작했다.
아직 세상에 없으면서, 기존 시장에 나와있는 것들보다 질 좋고 개성 있는 소재, 그리고 활용도 높을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가진 칼 가방 사용 경험을 돌이켜 보았다.
해외에 있을 땐 항상 칼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이게 정말 무겁다.
가방에 들어 있다면 필요한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도구들도 매일 전부 들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한 손으로 들고 다니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손이 자유롭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칼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다.
오롯이 내 칼을 한 자루를 위한 칼집은 존재하기 어렵다.
적당히 맞는 사이즈의 디스펜서를 대충 끼워 다니거나, 나무로 된 칼집을 구하면 그걸 들고 다니고, 사용하고 남은 가죽을 기워 만든 것 같이 생긴 칼집을 끼워 놓고 으스대기도 했다.
한 자루만 필요할 땐 신문지나 랩에 싸서 들고 다닐 때도 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한 자루의 칼.
요리사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훈련받는 그 칼에 집중하는 거다.
필수적으로 사용하고, 가장 먼저 익숙해지는 자신의 칼에 대한 마음을 브랜딩 할 순 없을까?
거기에 내가 필요한 칼만 들고 다니는 게 자유롭고, 일상에서 어색하지 않은 디자인이라면?
전문가용 제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용 시 효율성, 필요에 맞는 배치 등이 있다.
그래서일까, 사용했던 제품의 디자인엔 전문가의 일상생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중요했다.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 기존 제품엔 일상과 일터를 이어 줄 연결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요리사가 사용하는 제품들은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보단 생산자 중심 디자인인 경우가 태반이다.
적당하게 가격에 맞춘 재질의 원단,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설계된 디자인.
신경 쓰지 않은 마감 등 제품 자체에 하자가 있어도 불평할 수 없는 시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집단주의 성질의 시스템을 가진 주방에서 개인의 개성이 돌출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집단주의 내에서도 개성이 드러나는 사람들이 생존한다.
개성이 드러낼 줄 아는 요리사들이 자신의 브랜딩을 할 수 있다.
이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선택했는지를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내가 같이 일했던 요리사들은 호불호가 명확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사용할 제품을 선택할만한 시장은 존재하고 있을까?
이 사람들이 진짜 요리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서포트해줄 수 있는 브랜드. 그것을 원했다.
호주에서 근무할 때, 대량생산 브랜드에서 찍어낸 저품질의 칼 가방을 자랑하던 호주인 친구가 있었다.
부러워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정말 저게 부러운 디자인인가??라는 의문이었다.
취향 차이라고 결론 지었던 그 일은, 이 일을 시작하고서야 그게 이 시장에서의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원하는 것을 정리하고 나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7년 가까이 사용했던 제품들의 불편함을 집요하게 들여다 보고, 한정된 시장에 대한 의문을 표현하게 된 이유. 그리고 그 익숙한 불편함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을 내가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냥 스쳐 지나갈 불편함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꾸준히 질문하는 것.
남들은 하지 않을 생각을 굳이 하고 지나치는 것.
그냥 넘어가도 될지 모를,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그리고 능력 밖의 일을 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이유. 모든 것은 지금 내가 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습관처럼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도 있다.
마침 사이버 대학에서 플랫폼 서비스에 대한 이해를 배우던 시기였다.
플랫폼의 특징은, 생산자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정보를 사용자가 재생산해서 활성화시키는 과정을 겪는다.
니즈를 확인하고 타깃이 원하는 서비스를 구현해서 제공하는 것을 플랫폼 서비스의 본질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시스템 그대로 제품을 만들어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방이라는 플랫폼을 사용하되, 내부의 사용 방식은 사용자가 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다양한 칼을 다양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플레이트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게 하면서, 외관은 일반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디자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칼집과 칼 가방의 결착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게 출발이었다. 흔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익숙한 일들을 끊임없이 의심해서 내놓은 질문들은,
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었다.
내가 찾지 않으면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 질문들 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인가? 내 주제에 해도 되는 것인가? 에 대한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와 내 동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질 좋은 제품을 세상에 꺼내놓는 것은
이제 전적으로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불확실하지만 출발선에 설 방법을 찾았다.
Why는 이미 대답을 했다. 내겐 How to가 필요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