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의 기억, 20권의 일기장
일기를 써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날을 기억한다.
나를 생각이 많고 감정에 예민한 성격으로 만들어준 사람이 한 명 있다. 아니, 나의 그런 면을 처음 발견해 준 게 그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타인에게서 무조건적인 애정을 받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 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틀로는 모든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애정을 더 이상 당연하다는 듯 받을 수 없게 된 날에 나는 뭐라도 기억하자는 의지 하나로 다이어리 맨 뒷장에 일기를 썼다. 자발적으로 글을 쓰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학교 때도 2년간 일기를 쓰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강제와 형식이라는 원고지에 글자를 채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 사진첩과 연락 기록까지 동원해서 적어둔 그 글을 나는 이따금씩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이제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하는 건지 기록을 기억하는 건지 헷갈려질 때쯤 더 이상 그를 일상에서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배웠다. 사람은 언젠가 잊히고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는 거. 그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은 특별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머리로는 알고 있는 사실을 직접 경험해보게 해 주었을 뿐이다. 경험에 결부된 깨달음이 얼마나 깊이 각인되는지도.
"너 수능 끝나면 책장 두 개 중에 하나는 버릴 거야. 그러니까 안 읽는 책은 미리미리 비워놔. 일기장이랑 편지도 좀 싹 다 갖다 버리고."
"뭐? 그걸 왜 버려. 다 추억인데."
버리려는 자에게 대항하는 지키려는 자의 투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 모든 기억을 영원히 끌어안고 있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내가 한 장의 도화지라면 나를 스쳐간 모든 사람들은 눈 결정처럼 내려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경험을 나와 함께해 준다.
눈을 맞은 자리는 잠시 젖어 있다가 서서히 마르면서 약간의 주름을 남긴다. 그 주름이 절대로 처음처럼 반듯해지지는 않듯이, 추억은 내가 잊어버린다 한들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8살 때부터 적어온 일기장들을 쌓아 올려보니 9.3cm 남짓의 높이가 되었다. 그 숫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기장마다 제각기 종이의 두께와 면적이 다르고, 그 안에 담긴 기억들이 내 키의 9.3cm만큼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기억을 물질로 환산해서 남겨둘 필요는 굳이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 나는 이 일기들을 딱 한 번만 읽을 것이다. 다 읽은 후에는 버리려는 자에게 항복을 고할 예정이다.
연필을 주먹 쥐듯 감싸 쥐고 큼직한 글씨를 그려가던 아이는 이제 만년필을 들고 잉크를 말려가며 작고 작은 글씨를 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