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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Feb 01. 2023

재밌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스포츠 문외한의 외침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꽁꽁 얼 것처럼 추운 날씨


공은 바닥을 향해서만 날아갔다. 선생님께서 상대방이 잘 받지 못하게 주는 게 좋은 서브라고 하셨는데, 그 말대로면 우리는 최고의 서브를 하고 있었다. 경기 내내 공이 받기 좋게 날아온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국가대표가 될 것도 아니고 이건 그저 여가일 뿐이니 주고받고가 되어야 재밌을 텐데....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 모두 지루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다음 시간에는 즐길 수 있는 경기를 하고 싶다.


열두 살 체육시간에 배드민턴을 치고 쓴 일기를 7년 만에 다시 읽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을 싫어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나마 흥미를 붙였던 게 배드민턴이었다. 가족들과 취미로 종종 치다가 처음으로 학교 방과 후에서 정식으로 배워본 후, 실망을 금치 못하고 일기장에 주저리주저리 투덜거렸다. 열아홉 살의 체육 수행평가 종목은 배드민턴이었고, 그때도 나는 같은 지적을 받았다. 나와 친구가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께서 한 마디 하셨다. 너희 지금 경로당에서 배드민턴 치는 거냐고. 그렇게 치면 안 되고, 상대방이 받지 못하게 쳐야 한다고.


어쩐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반항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공을 받아치기 위해 노력하는 자와 상대가 공을 받지 못하도록 넘겨주는 자의 대결.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칼과 어떤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의 조합만큼이나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경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누군가의 우위에 서는 데에 흥미가 없는 성격 탓일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종목을 체험해 봤고,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경기에 참여했지만 언제 이기고 졌는지는 머릿속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 당시에는 점수 1점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나에게 오래도록 남는 추억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2016년의 일기장을 보아도 어이없을 정도로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제일 골치 아팠던 종목은 배구였다. 다른 구기종목은 존재감이 별로 없는 역할을 맡으면 적어도 내 실력 때문에 팀 전체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배구는 로테이션을 통해 코트의 모든 포지션에 한 번씩 서게 되어서 내 부족한 실력을 감출 방법이 없었다.


연습할수록 실력이 늘어가는 친구들과는 다르게 운동 신경을 조금도 타고나지 못한 나는 해도 안 해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렇게 기초 연습이 끝나고 곧이어 실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수행평가 점수는 개인별 기량과 팀별 득점 횟수를 종합하여 계산되었다.


내가 받아치지 못한 공들을 다른 친구들이 리시브해 주며 얼레벌레 경기가 흘러가는 듯했다. 미안함과 무력함, 긴장감이 섞여서 머릿속이 팽글팽글 돌았다. 어느덧 내가 서브를 넣을 순서가 되었다. 기가 막히게도 내가 치는 공은 상대편 코트까지 제대로 넘어가지도 못했다. 두 번의 기회를 날려버렸고 이번에도 실패하면 공격권이 넘어가든, 아니면 실점이든 우리 팀에게 불리할 것만이 분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해 팔을 휘둘렀다.


어찌어찌 네트는 넘겼지만 이번에도 공이 날아간 거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받아치지 않아도 되는 구역으로 향했기 때문에 다들 미동 없이 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자책하며 작게 한숨을 쉬던 순간 상대편에서 한 명이 네트 가까이 나오더니 공을 받아쳐 주었다. 졸업할 때까지 인사조차 나눠보지 않은 사이였기에 더더욱 선명하게 기억한다. 다들 잠시 당황한 눈치였지만 곧 부지런히 움직이며 경기를 진행해 나갔다. 공이 네트 위에서 끊임없이 오갔다.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듯한 그때의 기분은 어이없고 따뜻했다.


체육 시간마다 눈에 띄게 뒤쳐지면서도 실력으로 비난받은 기억이 한 번도 없는 건 순전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체육 시간을 아주 가끔 좋아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몸이 안 좋아서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을 때 구석에 앉아있는 내 앞으로 굳이 굳이 팀원들을 데려와 작전 회의를 진행해 준 친구가 있었고, 개별 수행평가 때 내가 공을 한 번도 받아치지 못해도 본인이 살살 던져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되려 사과하는 친구가 있었다. 배려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염치없게도 그 고마운 순간들을 좋아했다.


내가 자주 듣는 앨범 중에 'Living the moment of love'라는 이름이 있다. 이 구절을 되뇌이게 되는 순간들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감정에 있어서 다소 단순한 편이어서 그런지 내가 사는 매일이 사랑의 순간이라고 느낀다. 한 사람만을 위하고 바라보는 거창한 감정 말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는 약간의 조각. 바닷물을 두 손으로 퍼 올렸을 때 손끝에 조금 남아 있는 모래알 정도의 사랑. 그 모래알들을 손바닥 위에서 조심스레 굴려보며 그래도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저 스포츠 문외한으로서 한 말씀 올리자면, 학창 시절 체육시간에는 그냥 즐깁시다. 아, 점수를 따는 순간이 제일 재미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럼 제일 뒤처지고 제일 힘들어 보이는 친구 한 번만 뒤돌아봐 주세요. 여유가 있다면 그 친구 살짝 도와주시고, 어쩌다 잘하면 칭찬 한 마디만 건네주세요. 저처럼 득점보다 과정을 기억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서,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따스하게 오래 남는지 알아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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