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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Nov 25. 2024

쏟아지는 계절

미틈달 일기 모음

1.

겉옷 대신 두꺼운 목도리를 담요처럼 두르고 돌담길을 걸었다. 맨투맨 위에 목도리를, 반바지 아래에 롱부츠를 신은 차림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다. 유난히 따뜻했던 올해의 초겨울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단풍나무가 나란히 선 기이한 풍경이 종종 보인다던데, 나의 차림새도 그만큼이나 괴상했다.


이 목도리를 선물 받던 겨울에 생각했다. 나중에 내가 죽으면 이 목도리로 둘러서 태워달라고 해야지. 나는 왜 더 예쁘게 생각하는 법을 모를까. 하지만 그건 나의 가장 솔직한 감정이었다. 반쯤 펼쳐 둔 동화책 같은 감정.



2.

낙엽은 언제나 하늘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감정도 그만큼 자유로워졌다. 비를 바라볼 때와 같은 애잔함이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동정은 섣부른 감정이지만 나는 이따금씩 비가 안쓰러웠다. 모두가 피하려고만 하는데 슬프지 않을까. 우산 밖으로 튕겨지고 튕겨져 버리는 감각은 장마철 내내 겪어도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3.

커피를 마실 겸 친구가 추천해 준 카페로 들어가 통창 옆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 강아지와 한 남성분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한참이나 투닥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법인데, 서로를 비슷하게 아끼나 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 주인분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강아지를 데리고 성큼성큼 창문 앞으로 걸어왔다. 나에게 인사시켜 주려는 듯이.


안녕, 유리창 너머로 소리 없이 손을 흔들자 강아지는 발을 덥석 가져다 대었다. 흠칫 놀랐지만 그 위에 가만히 내 손을 겹쳐 올렸고, 그 소란 없는 악수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를 조용히 바라보던 주인분은 조금 뒤 나에게 눈인사를 한 뒤 결국 강아지가 원하는 방향대로 질질 걸어갔다. 나는 그 속 없는 다정함이 가끔씩 좋다.



4.

진동벨이 울렸고, 카라멜 크림 라떼와 바질 소금빵이 나왔다. 이윽고 내 바로 앞자리에서도 진동벨이 울렸다. 친구로 보이는 여자분 세 명이 재잘재잘 수다를 떨다가, 한 분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걸어가다 휙 뒤를 돌아보는 표정은 조금 구겨져 있었다. 아니, 잔이 세 잔인데, 나 혼자 다 들고 오라는 거야? 한 명은 와서 좀 도와주라. 볼멘소리로 외친 후 다시 카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 그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다 주섬주섬 일어나는 뒤의 모습. 순식간에 공기는 조금쯤 차가워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번도 혼자서 음식을 가지러 간 적이 없네. 내가 쟁반을 들더라도 늘 누군가가 옆에서 무겁지는 않냐고 걱정하며 따라와 주었다. 반대로 나 역시도 혼자 가만히 앉아있기 미안해서 항상 옆에서 휴지나 빨대라도 챙기곤 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러워서 친구에게 타닥타닥 방금의 생각들을 메시지로 보내 두었다. 비교에서 오는 행복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네가 만들어준 상냥함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게 고마웠다고.



5.

요즘에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내가 자꾸만 자꾸만 쏟아지고 있는데 그게 장맛비인지 낙엽인지, 그도 아니면 벚꽃인지 눈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생각. 그래서 오늘 같은 하루가 필요했다. 내가 아닌 것들로 채울 수 있는 하루가.


사계절은 쏟아지는 계절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쏟아지는지, 그걸 좋아할 수 있는지가 다를 뿐.



6.

있잖아,

네가 나한테 목도리를 건네주던 겨울날이 끝이 날 때

어딜 가도 잘할 테니 내 걱정은 안 하겠다고 했잖아.

사실 나는 내 걱정 좀 해주면 안 되나 하고 바랐거든.


나 그래도 지금은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괜찮게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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