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me to me
스무 살 생일 전날에 숏컷을 했던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우연히 본 모델분의 짧은 머리가 계속 생각날 정도로 예뻤고, 가장 큰 이유는 긴 머리를 관리하는 게 귀찮아서였다. 나는 평소 머리 말리는 걸 유독 지겨워했고, 피곤했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긴 머리카락을 5분 이상 말린 적 없이 물기만 대충 털고 잠에 들곤 했다.
짧은 머리가 어울리지 않을까 봐 고민하고 미루던 중 재수를 하게 되었다. 분명 불행이었지만 뜻밖에도 도전의 명분이 되어 주었다. 독서실에서 숨어 지낼 일 년이면 머리를 다시 기를 시간도 충분하니까, 내가 나에게 주는 올해의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잘라버리자. 가슴까지 닿던 굵은 히피펌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걷어내는 가위질은 그 자체만으로 확실히 기분전환이 되었다.
의외로 숏컷은 내가 시도해 본 헤어 스타일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역시나 머리 말리는 시간이 단축되었다는 점. 아무리 짧아도 5분은 말려야 할 텐데, 3분 이상 말리는 법이 없는 쪽으로 퇴화해 버렸지만 머리카락들은 그런대로 귀찮음 많은 주인에게 적응해서 잘 지내주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볼 때마다 다시는 머리를 어깨 아래로 기르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곤 했다.
2년 정도 짧은 머리를 유지해 보니 숏컷은 절대 관리하기 편한 머리가 아니었다. 머리가 삐죽삐죽할 때 묶을 수라도 있는 장발에 비해 손이 많이 가고 불편했다. 아침에 머리를 감아야 눌린 자국이 없고 손질하기 편하다고 모든 미용사분들이 입을 모아 말했지만, 온몸을 씻지 않은 채로는 잠들 수 없는 미약한 결벽증을 가진 나는 꿋꿋이 머리를 밤에 감아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내 헤어 스타일은 잠을 어떻게 잤느냐에 따라 매일매일이 복불복이다. 푹 잠든 날에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중요한 일정이 있는 전날에는 잠을 적게 잔다는 이상한 신념만 유지한 채.
한 달에 한 번은 머리를 다듬으러 미용실에 가야 한다는 점도 큰 변화이자 은근한 스트레스였다. 그전에는 반년에 한 번으로도 충분했는데, 대체 머리카락은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건지. 아니면 조금 자라는 데도 티가 많이 나는 건가?
미용실은 어쩐지 고민이 많아지는 공간이었다. 머리카락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거의 없다 보니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라달라고 말해야 할지부터 어려웠다. 나는 그저 한 달 전 상태로 기장을 되돌리고 싶을 뿐인데. 그 외에도 부가적으로도 갖은 신경이 쓰였는데, 이를테면 열심히 머리를 잘라주시는 동안 휴대폰만 들여다봐도 괜찮은가 하는 고민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눈앞의 거울을 보기에는 날것에 가까운 내 얼굴을 굳이 크게 보고 싶지 않은데, 어디로도 시선을 처리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멍을 때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미용사님과의 스몰토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반년에 한 번 정도야 기꺼이 할 수 있지만, 매달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말들로 빈 시간을 채우는 과정은 찝찝한 기분만을 남겼다. 결국 나는 미용사님이 점점 많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마다 미용실을 옮겨 다녔다. 세 번 정도 재방문한 미용사님은 쾌활하고 좋은 분이셨지만, 그분이 퇴근 후에 복싱장에 다니고 취미가 요리이며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신다는 사실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커트 실력을 가진 데다 과묵하시던 미용사님을 두어 번 발견했지만 소리 소문 없이 일을 그만두시는 바람에 나는 영락없는 미용실 유목민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는 오빠가 미용실에 다녀온 어느 날에는 같이 지하철을 기다리며 실없는 대화를 했다.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아, 그러고 보니 머리 엄청 짧아졌네. 군대 다시 가게?
나의 놀림 섞인 대답에 티격태격하다 이야기 소재는 어느덧 미용실로 흘러갔다. 남자분들은 대부분 머리 짧으니까 미용실 엄청 자주 갈 거 아니야. 새삼 대단하더라. 나한테는, 뭐랄까, 돈 내고 불편해지는 공간이야.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살짝 찌푸리자 그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머리 자르고 오면 가볍고 산뜻하니 기분 좋지 않아? 나는 내가 나한테 주는 선물 같아서 좋더라. 스스로를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신경 쓰고 아껴주는 방법이잖아.
일상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말은 늘 특별하게 들렸다. 미용실을 고르는 것조차 싫증이 나서 대충 제일 가까운 곳을 드나들던 생활을 반복하다 이번에는 그 말을 좀 닮아보기로 했다. 평소에는 시술이 어떻게 끝나든 대충 좋다고만 대답했는데 이번에는 꼼꼼하게 부탁을 드렸다. 뒷머리 조금만 더 짧게 잘라주시고, 질감처리 해서 무거운 느낌 줄여주시고, 앞머리는 자르지 말아 주세요. 이번에 처음 뵌 미용사님은 느리고 꼼꼼하게 가위질을 하는 분이셨고 내가 무언가 요청할 때마다 활짝 웃으며 그럼요, 하고 대답해 주셨다.
머리 모양에 영 눈썰미가 없는 편이라 드라이까지 끝난 내 모습을 보면서도 괜찮게 자른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게 선물이 맞나, 갈팡질팡하며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순간 목도리를 두르지 않은 뒷목 위로 시원한 바람이 스쳤다.
그게 그렇게도 상쾌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맞다, 내가 이 감각을 좋아했었지. 숏컷을 처음 하던 날에도 목이 서늘하던 그 온도가 기분 좋게 남았고, 십 대의 유일했던 단발 시절에도 그네를 타며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의 가벼움을 좋아했다. 목에 아무것도 닿지 않는 선선한 여백이 주는 자유로움을 아주 오랜만에 만끽했다.
그 바람을 조금 더 맞고 싶어서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서 조금 더 걸었다. 익숙한 프랜차이즈 카페가 눈에 들어왔고, 친구가 내가 좋아할 것 같은 신메뉴가 나왔다며 며칠 전에 기프티콘을 선물해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바닐라와 카라멜 시럽이 섞인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다. 평소에는 기프티콘을 받아도 별생각 없이 다른 메뉴로 바꿔 먹곤 했는데, 선물을 순순히 선물대로 받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살짝 녹은 휘핑크림과 함께 라떼를 마시자 손과 혈액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 되게 갖기 쉬운 거였네. 멍하니 입김을 불며 생각했다. 겨울에는 추워서 짧은 거리도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오랜만에 음료잔을 감싼 채로 천천히 동네를 걸어갔다.
오늘의 기분은 지하철 정거장에서 선물 받은 말로 시작했고, 미용사님의 친절이 살짝 더해졌고, 겨울 공기의 차가움이 화사했고, 친구가 선물해 준 단맛이 났고,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나에게로 반사시킨,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