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톤 Sep 30. 2024

Dry flower

시들기 전에 말리기

친구가 한 달 전쯤에 수국을 한 다발 선물해 주었다. 내가 푸른 꽃을 좋아한다는 걸 몇 년째 기억해 주는 게 고마웠다. 늘 그랬듯이 물병에 일주일 정도 꽂아두고, 시들어갈 즈음에 물을 비우고 꽃을 말렸다.


드라이플라워는 대개 오래가지 못하고 금세 가루로 바스러졌다. 그래서 나는 이 수국이 한 달 동안이나 예쁘게 말라갈 거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파란색에서 하늘색으로 물이 빠진 꽃잎은 오래도록 창백하게 청초했다.


그러던 중 최근에 메리골드 다발을 선물 받았다. 이참에 병을 비우고 새로운 꽃을 담아야겠다고,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수국 줄기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나는 하얗게 썩어 들어간 줄기를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았던 게 아니라 그저 그동안 내가 미처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제멋대로 가장 예쁜 부분만 보느라.


삶의 시작점은 씨앗일지 꽃일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갓난아이에서 시작해 어느 순간 피어나는 것인지, 최상의 상태로 태어나 점차 시들어가는 인생을 사는 것인지. 당시에 내린 결론은 후자에 가까웠다. 나는 내 삶의 하이라이트가 찾아와도 그 시점에는 깨닫지 못할 것 같은데,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꽃이 피었다 지면 그건 좀 슬프지 않을까. 내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과거의 순간은 늘 그리웠기에, 만개한 꽃에서 시작해 천천히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시들어가는 것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가 좋아한 것들은 어떠한 장면이었다. 단 한 가지를 좋아했다고 말하기에는 날씨와 시간과 사람과, 순간을 채우는 모든 요소들을 좋아했다. 감각 하나하나를 사랑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는 늘 어려운 고민이었다. 자연스럽게 시들어가도록 두어야 할지, 썩기 전에 물을 비워버리고 말려야 할지. 또 말린 꽃은 부서지기 쉬우니까 손끝조차 대지 말고 바라만 보아야 할지.


대부분의 경우 나는 시들다 못해 물곰팡이가 필 때까지 눈물로라도 물병을 채웠다. 열아홉 살 겨울부터 스물한 살 봄까지 다니다 그만둔 체육센터로 다시 돌아간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지금껏 해본 경험 중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때 배운 줌바 댄스일 것이다. 등록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체력은 유지해야 했고, 그렇지만 경쟁은 싫고, 어려운 것도 싫고, 그러다 보니 남은 선택지가 줌바댄스뿐이었다.


몸치 막내 생활은 기대보다 즐거웠다. 한겨울에도 여름을 몰고 오는 듯한 강사님과, 늘 맨 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에이스분과, 딸처럼 나를 아껴주시던 회원님. 그곳에서 보는 모든 뒷모습을 좋아했다.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불행하다는 재수 생활 당시의 유일한 낙이었기에 더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


그 저녁시간이 끝이 난 이유는 간단했다. 저녁 약속이 늘어났고, 아르바이트랑 시간이 겹쳐서. 그리 대단치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이유였다. 나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고 등록을 취소하는 간단한 클릭 몇 번만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그럼에도 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 손에 물병을 쥔 채 포옹으로 인사를 대신하던 시간과, 늦은 시간에 마중을 나온 남편분과 투닥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시간을 이어 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반년 만에 다시 체육센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익숙한 얼굴들은 여느 때처럼 반겨주셨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마침 내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고, 훨씬 더 건강해 보인다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나는 왜 예전에는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던 벽시계를 자꾸만 돌아볼까. 환한 조명과 음악이 왜 이제는 지치고 피곤할까. 아직도 그 이유를 뚜렷하게 건져 내지는 못했다. 많이 좋아하던 영화의 속편을 보았을 때 기대만큼 즐겁지 않던 마음과 비슷했다.


그래서 완전히 시들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저 추억으로 말려두어도 좋았을 마음이 가루로 바스러져 잊힐 때까지. 그 두 달의 시간은 의미 없지 않았고 나는 미련 없는 이별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최근에도 비슷하게 끝을 내야만 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절대로 내가 받은 것 이상의 마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 장면만큼은 비참하거나 초라할 틈도 없이 좋아하고 좋아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끝이 있겠지만 그 끝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때문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굳이 따지자면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원인이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구를 위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눈물이 나온다는 이유로 한 달 가까이 울었다. 아주 많은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미안함과 죄책감과, 슬픔과, 그 와중에도 나를 위한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이 지독하게 이기적이어서 나는 이렇게나 스스로가 싫어진 적이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 새롭게 보였다. 이번에는 내 안에서도 곰팡이가 피어났구나. 나는 내 기억보다 무리하고 있었고, 서러웠고, 그럼에도 그저 같이 있고 싶어서 내 손등이 썩어가는 것조차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나는 원래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고,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참는 데에 훨씬 더 능숙한데도.


그걸 발견한 순간 꽃병에서 줄기를 건져내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감정도 마음껏 시드려면 물병부터 비워줘야겠지. 드디어 슬픔조차 남지 않아 말라비틀어지는 순간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사랑하던 장면에서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선물 받은 꽃이 하나 둘 말라갈 때마다 이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


네가 줬던 마음이

아주 예쁘게 시들어가고 있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