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good girl gone bad

go bad의 뜻은, 상하다

by 레톤

첫 중간고사 때 받아온 성적은 들쑥날쑥했다. 국어와 영어는 상위권, 통합과학과 한국사는 하위권, 평균을 내면 중위권 정도의 성적. 종합해 보면 205명 중 100등이 조금 넘어가는 등수를 받았으니 정말이지 딱 중간에 위치한 점수였다.


성적표 위로 어질러진 숫자들의 말을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어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한국사 평균은 왜 52점밖에 되지 않는 것이며, 일본어는 왜 95점인데도 내 위로 열다섯 명이나 더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이 학교에서 중간이면 잘한 거야 못한 거야? 숫자를 처음 배우는 사람의 얼굴로 멀건히 앉아있자니 담임 선생님께서 상담실로 들어오셨다.


늘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수학을 가르쳐주시던 나의 첫 담임 선생님은 내가 받아 온 성적을 하나하나 친절히 분석해 주셨다. 정리해 보자면 나의 점수들은 대부분 등급의 시작점에 있었다. 1등급을 놓쳤지만 2등급 중에서는 제일 높은 성적을 기록하는 식의, 이를테면 뱀의 머리와도 같은 위치였다.


선생님께서는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환하게 격려해 주셨고, 내가 기말고사 때 받아야 할 점수까지 계산해 주셨다. 이렇듯 세밀한 분석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라 벙벙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상담 시간을 떠나보냈다. 선생님은 필기로 가득한 노트 한 장을 보물섬으로 가는 약도인 마냥 꼭 쥐여주셨지만, 사실 나는 성적을 올릴 자신이 조금도 없었다.


내 인생은 늘 시작이 고점이었거든.


우리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공부에 있어 크게 간섭하신 적이 없다. 한글과 숫자조차 따로 가르쳐주신 적이 없었는데, 내가 세 살 무렵에 엄마 품에 안겨 사방의 간판과 자동차 번호판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몇 번이고 귀찮은 기색 없이 읽어주시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한글과 숫자를 익혔다는 건 우리 집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나는 뭐든지 시작할 즈음이 가장 뛰어났다. 피아노도 그림도 처음 배울 때에는 찬사를 받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피아노는 어려운 곡을 배울수록 미스터치를 극복하지 못했고, 그림 실력은 점점 평범한 수준으로 묻혀갔다. 내 재능은 언제나 일찍 시드는 꽃이었다. 그나마 오래 피어 있던 건 공부밖에 없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학생 때도 등수로는 늘 전교 1등을 유지했지만 최고점을 받은 건 1학년 1학기 때가 아니었던가.


다만 과거의 나를 이기지 못했을 뿐 공부에 있어 객관적인 점수는 압도적이었기에, 그러한 결점은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내 기말고사는 절대로 나의 중간고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비밀. 누군가는 이르게 배운 패배의식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십 년 넘게 되풀이되고 쌓여온 경험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첫 성적표를 부모님께 내밀 때에도 정말이지 두려웠다. 이 형편없는 결과가 내 3년 동안의 최고점수가 될까 봐. 크게 싫은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선명하게 흘러나오는 실망의 기색이 느껴져 오히려 더 갑갑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늘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셨지만, 내가 모범생으로 자라날수록 점점 기대를 거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 자체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실

나는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었어. 엄마 내가 시험 성적 때문에 딱 한 번 울었던 날 기억해? 중학교 2학년 때였고 국어 시험 망쳤다고 집에 와서 펑펑 울었잖아. 망친 점수는 그래봤자 90점대 초반이었는데, 그 점수를 받고도 딸이 세상 무너진 것처럼 우는데, 나를 내내 안쓰러워하면서도 어떻게 괜찮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해주지를 않을 수가 있어? 다음에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잖아, 그래봤자 중학교 시험인데.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정말로 괜찮지 않은 줄 알았어.


그게 나한테는 두고두고 돌아볼 상처였어.


이번에도 역시나 괜찮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중학생 때와는 달리 위로받을 자격이 없어서 그때만큼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이 3년에 걸쳐 서서히 드러날 것이 긴장되고 걱정될 뿐이었다.


엄마,

엄마 딸이 상해가기 시작한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내 유효 기간은 과연 언제까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