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지키기
코로나로 인해 등교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져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그즈음 우리 학교는 개학 연기 과제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읽고 쓰고 공부할 것을 요구했고, 온갖 행사들을 화상 회의를 통해 빠짐없이 진행했다.
그때마다 나는 고역을 겪었다. 통합과학 과제로 읽어야 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도통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독후감부터 썼고, 한글로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리포트는 심포지엄을 위해 영어로 쓰는 법부터 배웠다. 파이썬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음악 시간에는 어설프게나마 작곡을 했다. 고등학생보다 중학교 졸업생에 가까웠던 나는 그저 듣고 배운 것을 흉내내기에 바빴다.
그 과정이 숨 막혔던 건 누구에게도 모른다거나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영어 수업을 같이 듣던 친구는 공휴일마다 수학 문제를 직접 만드는 것이 취미였던 수학 천재였고, 정보 시간에 같은 조가 된 친구는 만우절 장난이랍시고 학교 인트라넷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대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고작 열일곱 살의 삶이 저렇게 반짝거릴 수 있는 건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주위에 평범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사월부터는 동아리 면접이 이어졌다. 동아리가 생활기록부에서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만큼 홍보부터 면접까지 치열하고 치밀한 과정이었다. 아직 학교에 발도 들여보지 못한 신입생이었음에도, 유일했던 직속 선배의 조언과 무성한 소문들을 통해 어떤 동아리가 인기 있고 명성이 높은지는 대강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동아리라는 소속이 내 이미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지원한 곳은 교내 유일의 화학 동아리와 자율 동아리 세 곳이었다. 많고 많은 과학 동아리들 중 화학을 골랐던 이유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들을 좋아하던 취향 때문이기도 했고, 중학생 때 소꿉장난처럼 해 본 약품 실험이 즐거웠다는 단순한 선호 때문이기도 했다. 모두 경쟁이 꽤 치열했던 곳들이었음에도 나는 왜인지 서류부터 면접까지 단번에 전부 합격했다.
동아리에 불합격하면 지원자가 부족했던 곳들을 전전하며 2차, 3차 추가 모집에 계속해서 임해야 했다. 어릴 때는 가위바위보나 선착순으로도 정하던 동아리가 이곳에서는 우리들 사이의 첫 번째 경쟁이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합격한 동아리들 중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는 여유를 가지며 아주 오랜만에 꼭대기에 선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업이 어렵다며 기죽어 있던 마음을 단번에 다림질해 주는 작은 성취였다. 내 삶은 어쩐 일인지 그렇게도 중간이 없었다.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후 우리는 화상 회의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소속 동아리가 어디인지 묻는 것이 하나의 스몰 토크가 되었다. 그 대답으로 서로의 첫인상이 단번에 정해졌고, 내가 가진 동아리의 이름은 꽤나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렇게 나에게 걸려오는 기대를 절대로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즈음에는 슬슬 자존심에 상처 입지 않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영미 문학 수업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번역본이라도 찾아 읽으며 줄거리를 파악하면 됐다. 수학 시간에 기습적인 문제 풀이에 지목당하는 것이 두렵다면 미리 답지를 다 외워두면 됐다.
내 겉껍데기가 그럴듯하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뮤지컬 ‘그리스’의 소년들이 머리에 기름을 잔뜩 발라 세워 스스로를 과시하듯이 나는 내 주위에 방패를 두르는데 급급했다. 수업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공부를 해서 깨달을 생각을 하기보다 그럴듯하게 넘겨버리는 방법을 고민했다. 뒤늦은 변명을 하자면 겉이 아닌 속까지 채워낼 시간이 없었다. 매일같이 토론하고 회의하고 발표하는 와중에 나는 기초를 다지기보다 모자란 학생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쌓은 탑 위로 첫 번째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