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자기만의 방

기숙사라는 또 다른 집

by 레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네 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는 기숙사 학교였다. 서울에 있는 학교이고 서울에 사는 학생들만 모아두었음에도 전교생이 필수적으로 기숙사에서 지내야 했다. 제각기 다른 성장환경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 조화의 의미를 배운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지만, 우리끼리는 그저 공부를 오래 시키려고 학교에 가둬두는 게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로 떠들곤 했다. 통학 시간이 확연하게 줄어들기도 했고, 기숙사가 열리는 밤 11시 30분까지 강제적으로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으니까. 한 달에 한 번씩 2-3일 정도만 집으로 돌아가는, 일명 "귀가"가 허용되었고 우리는 목이 빠져라 한 달 내내 귀가일만 기다렸다. 아, 집 가고 싶다.


나는 성적보다도 기숙사 생활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이 학교에 지원하기를 주저해 왔다. 청결도, 소음, 조광, 온도 그 모든 것에 있어 기질이 과도하게 예민했기에. 초중학생 때 모두가 고대하는 수련회나 수학여행을 나는 단 한 번도 기다려본 적이 없는데, 집이 아닌 곳에서는 잠을 제대로 자 본 기억이 없어서였다. 가족 여행으로 고급 호텔에서 묵어도 나는 그저 내 작은 방의 새하얀 침대와 암막 커튼만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그런 내가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 달씩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을까?


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에서 용감해지는 법이고 나는 일단 감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로. 처음 입소를 하던 날 나는 무려 캐리어 세 개에 이불 가방 두 개, 쇼핑백 세 개를 챙겨 학교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조차 닿지 않던 9층의 맨 바깥방. 코로나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당분간은 2인 1실로 운영된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볍게 노크한 후 방문을 여니 자신보다 큰 키의 매트리스를 세운 채 커버를 끼우느라 낑낑거리던 룸메이트가 보였다.


첫 룸메이트와는 그렇게 친해졌다.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서로 매트리스 커버 끼우는 걸 도와주면서.


방의 구조는 정말이지 비좁고 단순했다. 나에게 주어진 가구는 책상과 침대, 옷장이 전부였고 유독 방의 크기가 작았던 9층에서는 옷장 문조차 활짝 열 수 없었다. 네 명 중 두 명은 화장실 바로 앞에 책상이 맞붙어있는 찝찝함을 감수해야 했고, 나머지 두 명은 환기를 위해 수시로 창문을 여닫아야 하는 귀찮음이 있었기에 모두가 공평하도록 불편한 환경이었다. 수건은 하루에 인당 두 장씩 지급되고, 빨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정해진 날짜에 문 밖에 내놓고. 매일 간단한 방 청소와 분리수거, 도어스토퍼 등을 신경 써야 했으며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벌점이 매겨졌다. 오전 6시 50분에는 기상송이 울려 퍼졌고 밤 1시에는 무조건 소등 후 취침해야 하는 규칙적인 규칙들. 코로나 때문에 아침 산책과 점호가 생략된 점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길고 긴 정규 교육 과정을 어찌저찌 지나온 게 신기할 정도로 나는 단체 생활에 그다지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취향이나 입맛도 까탈스럽고, 별로 사교성 있는 성격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기숙사 내에서도 어떻게든 나에게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 냈다. 방 안에서 호텔용 슬리퍼를 신고, 잘 때는 암막 안대를 쓰고, 수시로 룸스프레이를 뿌렸다. 유난이 맞지만 그 유난이라도 내게는 필요했다. 그리고 서너 달쯤 지난 시점에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듣기로는 기숙사에 샤워 가운 들고 온 애도 있대. 하여간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어.


내가 나에 대한 소문을 직접 들은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거 나야, 씻은 직후에 습기 차는 거 싫어서 가지고 왔어. 조금 머쓱해하며 대답하자 친구는 별안간 웃기 시작하며 세상에, 그게 내 친구였다니, 하고 중얼거렸다. 샤워가운이 여름용과 겨울용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까지 듣고서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 정수기 물맛도 싫다고 보리차 사다 두고 마시잖아. 3년 버틸 수 있겠어?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그 속에서 늘 간절하게 고립을 꿈꿔왔다. 혼자만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1인용 방을. 방안에서도 어느 정도의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하게도 피로하고, 생리현상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니까.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런 마음이 전부였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고등학교 시절 룸메이트 중 한 명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내 인생이 엑스트라 같았거든. 공부도 예술도 뭐 하나 자신있는 게 없었는데 우리 학교에는 워낙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잖아. 그래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어. 나도 벌써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름들이 사실 꽤 있거든.


그런데 네가 나를 글에 쓰니까 내가 조금은 비중 있는 엑스트라가 된 것 같았어. 너만이 나를 특별하게 봐주고 나를 기억해 주고. 네 글은 나한테 그런 힘이 있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처음 나한테 보여줬던 날부터.


그 이야기는 아직도 고등학교 기억을 에세이로 쓰는 게 너무 구질구질하지는 않을까, 하던 내 고민에 대한 고마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단순한 1인용 방이 아니라, '나'로 온전히 채워질 수 있는 내 방이 필요했다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해 읽은 책들과 취향에 맞는 엽서들로 장식된, 내 체향을 머금은 '내 방'이. 아무 향 없이 세탁된 옷이 어쩐지 몸에 버석거리고, 눅눅한 기숙사의 기운이 나에게는 스며들지 않기를 바랐던 이유는 단순히 깐깐한 위생 기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마음껏 나일 수 있는 공간이, 하루의 시간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기숙사에서의 나는 꽤나 부지런한 편이었다. 주말에도 기상송이 울리면 재깍재깍 일어났고 방에서 제일 먼저 나와 등교했으며 샤워 시간도 20분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타고나길 아침형 인간인줄 알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를 벗어나보니 그렇지 않았다. 일정이 없는 아침에 누리는 늦잠은 피로 회복을 도왔고, 오래도록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은 체온이 낮은 나에게 종종 필요한 여유가 되었다. 친구들끼리 기숙사에서 살다 보면 강제로 계획형이 되어버린다는 말을 별 생각 없이 주고받곤 했는데, 우리는 편리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각자가 쌓아온 17년 중 일부를 조금씩 버려갔다. 기숙사 생활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형태로.


물론 단체 생활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과정이고, 나 역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학교에 동화되었다. 매일 아침 학교 이름이 새겨진 회색 후드집업을 입고 안경을 낀 채 부시시하게 등교하다 보면 나와 비슷한 외형의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내가 내내 부딪혀온 다툼은 갑갑한 학교 체제와 나라는 개인의 싸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옷장 문에 샤워가운을 걸어두면서까지, 내 이름 세 글자를 내건 열일곱 살 여자아이가 00고 1학년 학생으로 흐려지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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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흐름상 적지 못했지만 기숙사는 학창 시절 동안 가장 힘들었던 기억도, 가장 즐거웠던 기억도 공존하는 애증의 공간이다. 특히 나름의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면 아침마다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기상송이었다. 학생 자치회 측에서 우리의 추천과 투표를 받아 요일별 기상송을 결정했는데, 인기 많은 곡들이 선정되었음에도 다들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진절머리 내느라 바빴다.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데에는 역시 공동의 적이 제일인 건지, 아침이 너무나도 싫었던 고등학생들의 그 웃음 섞인 야유는 어쩐지 즐거웠다. 윤종신의 '오르막길'이 나오던 주간에는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라는 첫 소절 때문에 대체 저 곡을 누가 골랐냐며 대대적으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나의 경우 아직까지도 아이유의 '비밀의 화원'은 아침에 듣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카더가든의 'home sweet home'은 여전히 즐겨 듣는다. 나에게 기숙사는 홈 스윗 홈까지는 될 수 없겠지만, 비터 스윗 홈(bitter-sweet home) 정도로는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