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가르닉

미완성 효과

by 레톤

그거 알아? 명부에 적힌 사자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육체와 넋이 분리된대. 그래서 네 이름은 딱 두 번까지만 불러보고 마지막 한 번은 끝까지 아껴뒀어. 영혼의 무게는 고작 21g이라지만 나는 너를 잃는 순간 살이 좌르륵 빠져버릴 것 같았거든.


네 이름은 흔하지 않고 그래서 가끔은 동명이인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그런 생각마저 빛바랠 즈음에 네 이름 중 두 글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마주쳤어. 처음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가, 그 사람의 입모양을 따라 이름을 적어보았을 때 문득. 앞에서부터 두 자리밖에 채우지 못한 미완의 이름이 나에게는 기시감을 주었거든. 하지만 이후로는 그 사람에게서 너를 떠올린 적은 없어.


미안해 거짓말이야 사실 딱 한 번 겹쳐본 적이 있어.


나는 네 뒷자리에 앉는 날을 제일 좋아했어. 너는 늘 온몸을 돌려 프린트를 넘겨주는 사람이잖아. 다들 손만 건성으로 넘겨서 종이를 파닥파닥 흔들기 마련인데, 정말 딱 너만. 뒷사람이 받기 편하도록 뒤를 돌아봐주는 게, 가위는 꼭 손잡이 부분으로 돌려주던 너의 습관만큼 좋았어. 그런데 그 사람도 그러더라고. 심지어 내가 가져가기 편하도록 맨 윗 장은 살짝 비틀어주더라.


내 취향이 너무 유구하지? 그렇지만 그날부터 조금씩 신경이 쓰였는걸. 그 사람 손 위에서 반짝거리는 은색 실금들이 몇 번째 손가락을 지나는지. 다행히도 약지는 아니었지만 그게 내 자리가 될 수 있다는 뜻도 아니었어.


그 사람은 너와 달랐거든.

그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교실 문 앞에 떨어진 에어팟을 고민도 없이 나에게 전해줬을 때는 조금 가망을 느꼈는데 말이야. 내 소지품을 한 번은 눈에 담은 적 있다는 뜻이니까. 너랑 비슷한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내 평생의 기대였는데. 그날 이후로 이름도 트고 대화도 몇 번 해봤지만 나는 번번이 미술용 연필로 필기하는 그 사람의 손만 바라보다 하루를 끝냈어.


아, 딱 한 번 용기 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로맨틱한 질문은 아니었고, 수업 시간에 다루었던 주제에 대해 그 사람 생각이 궁금했어. 인생 전체가 흔들릴만한 일을 겪고 나서, 상처든 행복이든 모든 것을 잠재우고 나면 과연 그 일 이전의 나로 되돌아갈 수 있는지.


나한테는 꽤 어려운 주제였는데 그 사람은 대답이 너무 쉽더라고. 절대로 처음과 같을 수 없다고 하더라.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도 다시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누구든 너만큼 좋아하지는 못하겠지.


그런데 있잖아,

그 누군가에는 지금의 너도 포함이야.


내가 가끔씩 떠올리는 날들은 절대로 재현될 수 없거든. 교과서 여덟 권이 들어있는 가방을 네가 대신 들어준다며 가져갔을 때 기억나? 무거울까 봐 전속력으로 뒤쫓아 달리던 나, 겨우 따라잡은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미안하다고 웃으며 닫힘 버튼을 눌러버리던 너. 나는 신호등이 눈앞에서 바뀌어도 평생 뛰지 않는 사람이었고, 너는 나한테 이길 생각 없이 늘 양보만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날의 예외가 어리고 귀엽고 아린 거겠지. 너는 내가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는 유일한 증명이기도 했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네 팔만 잡아도 좋다고 웃던 소녀가 아니잖아?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 앞머리를 끊어 부름으로써 삼혼(三魂)을 완성해 보려고.


넘어갈 때까지 열 번 찍는 건 나무에게 못 할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오래 좋아하지는 않았어. 이제 비슷한 감정은 6년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그게 참 웃기다? 나는 내 불안이 재발할 미래는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사랑이 재발할 미래는 절대로 믿지 않아.


너를 지우면 내게 팔아먹을 감정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내가 쓰는 사랑글은 점점 바닥을 보이고 있어. 나랑 우연히 만난 척하려고 복도에서 몇십 분이고 기다리던 일, 내가 화내며 먼저 가버려도 늘 뒤에서 의기소침하게 잘 가라고 인사해 주던 목소리, 운동장에서 날아오는 공을 대신 맞아주고서도 웃던 얼굴,


전부 미완의 장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아도 내가 울면 무조건 날 안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정말로 너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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