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갈피 독서 모임 후기: 오만과 편견을 읽고
⚠️ 스포일러 주의
이 글에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주요 사건 및 결말, 그리고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핵심 딜레마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품을 감상하지 않으셨다면, 먼저 즐기신 뒤에 돌아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번 결갈피 모임의 선정 도서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었다.
1813년에 출판되었으니, 무려 200년이 훌쩍 넘은 영국 로맨스 소설이다. 아마 대부분 학창 시절에 필독 도서로 읽어봤거나, 최소한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오는 영화나 BBC 드라마로 스치듯 접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중학생 때였나?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 같다. 그때 내 감상평은 아주 단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아시 멋있다", "결국 둘이 결혼해서 다행이다" 정도? 그 시절 나에게 이 책은 그저 두꺼운 19세기 하이틴 로맨스였다.
어른이 되어 다시 펼친 이 책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다가온다.
지루했을법한 대사들이 이제는 눈에 꽂힌다. 엘리자베스가 왜 그렇게 다아시를 싫어했는지, 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실패했는지, 그 심리의 결이 읽힌다. 사람 사이의 오해가 어떻게 쌓이고, 어떻게 풀리는지. 200년 전 영국 시골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익숙하다. 인간은 별로 안 변했구나 싶어서 오히려 더 재밌게 읽었다.
모임에서도 반응이 비슷했다. 처음 읽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예전에 한 번쯤 읽어본 케이스였다. 그런데 다들 "다시 읽으니까 새롭다"고 했다. 어릴 때는 몰랐던 것들이 지금은 보인다고. 아마 그 사이에 우리가 연애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하고, 사람한테 데이기도 하면서 눈이 트인 거겠지.
그런데 그 '트인 눈'으로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니, 맙소사. 이건 우아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하나씩 고장 난 사람들의 대환장 파티에 가까웠다.
낭만의 콩깍지를 벗고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에서 얻은 '현실의 잣대'를 들이대자, 등장인물들의 치명적인 결함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감상은 점차 "와, 너무 낭만적이다"에서 "아니, 근데 현실에서 저런 사람이랑 엮이면 진짜 피곤하지 않아?"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탄식으로 변해갔다.
토론이 한창 무르익을 때쯤, 누군가 던졌다.
"야, 이 소설에서 정상인이 누구야?"
테이블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이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들 손가락을 꼽기 시작한다.
베넷 부인? 히스테리의 화신이다. 딸들 시집보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주변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 베넷 씨? 지적 우월감에 취해 육아를 방치한 회피형 아버지다. 똑똑한 건 맞는데, 그 똑똑함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리디아? 15살 욕망 폭주 기관차. 위컴? 매력으로 포장된 사기꾼. 콜린스? 아부의 끝판왕. 빙리 누나들? 속물. 캐서린 드 버그? 오만함의 최종 보스.
그렇다면 주인공들은 어떨까?
엘리자베스는 편견에 눈이 멀어 소설 절반을 삽질했다. 위컴 말만 듣고 다아시를 나쁜 놈으로 단정 짓고, 확인 한 번 안 해봤다. 다아시는 표현력 바닥의 사회성 제로 인간이다. 좋아한다면서 "네 집안이 별로야"를 청혼이랍시고 내뱉는다. 심지어 천사 같은 제인조차 "너무 착해서 현실 파악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제인은 그냥 바보같이 착한 거 아니에요? 선악 분별을 못 하는 것 같아요."
신랄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등장인물 수십 명을 도마 위에 올리고 난도질(?)한 끝에, 우리의 결론은 의외로 빠르게 합의되었다.
"정상인은 가디너 부부밖에 없는 것 같아요."
재밌는 건, 가디너 부부가 이 소설에서 신분이 가장 낮다는 사실이다. 런던 Cheapside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빙리 누나들한테 "저런 친척이 있으면 결혼 시장에서 마이너스지"라고 대놓고 무시당하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품성은 가장 높다. 분별력 있고, 감정 조절 잘 되고, 판단력 좋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안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들.
제인 오스틴은 이미 200년 전에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스펙'이 곧 '실력'은 아니며, '교양 있는 척'이 곧 '품위'는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높은 계급에 있는 캐서린 드 버그는 오만함의 끝판왕이고, 가장 낮은 계급에 있는 가디너 부부가 가장 건강한 인간이다. 신분과 품성의 역설. 이 소설의 숨은 주제다.
이번 모임에서 우리는 고전의 껍데기를 벗기고, 꽤나 날것의 질문들을 던져보았다.
다아시는 정말로 오만하기만 했을까? 아니면 우리가 오해한 걸까?
그의 '사과 한마디 없는 편지'는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27살 샬럿의 속물적인 결혼 선택은 비극일까, 아니면 현명한 생존 전략일까?
그리고 결국, 서로의 결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숙한 연애'란 무엇인가?
다아시는 첫 등장부터 인상이 나쁘다.
동네 무도회에 나타나서 아무하고도 춤을 안 춘다. 구석에 서서 인상만 쓰고 있다. 친구 빙리가 "저기 예쁜 애 있는데 춤춰봐"라고 권하자, 엘리자베스를 흘깃 보고 이렇게 내뱉는다.
"그냥 괜찮은 정도지, 내 관심 끌 만큼은 아니야."
하필 엘리자베스가 이걸 듣는다. 당연히 열받는다. 여기서 다아시에 대한 첫인상은 끝났다. "재수 없고 오만한 놈." 이후 엘리자베스가 다아시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에는 이 강력한 프레임이 깔린다.
그런데 토론 중에 재밌는 의견이 나왔다.
"다아시가 처음에 오만하다는 것도 사실은 좀 엘리자베스의 관점이 많지 않나 싶어. 개인적으로 그렇게 오만할 만한 행동인가?"
반론도 바로 붙었다.
"에이, 그래도 저건 오만하죠. 초면에 사람 얼굴 평가하고 등급 매기는 건데."
여기서 의견이 갈렸다. 다아시는 태생이 오만한 귀족인가, 아니면 그저 사회성이 결여된 '뚝딱이'인가?
소설을 좀 더 읽어보면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다아시 집안의 선임 가정부인 레이놀즈 부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 주인님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천사 같았어요. 하인들한테 나쁜 말 한 번 한 적 없고요."
동네 소작농들도 그를 칭송한다. 세입자들 살뜰히 챙기고, 여동생 조지아나를 끔찍이 아끼는 따뜻한 오빠.
무도회에서 인상 쓰던 그 '재수 없는 남자'랑 같은 사람 맞아?
나는 다아시가 "선택적 오만(Selective Arrogance)" 상태였다고 본다. 가족, 친구, 내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하다. 하지만 낯선 사람, 익숙하지 않은 사교계, 시끄러운 무도회 같은 상황에서는 방어기제가 작동해 벽을 친다. 훗날 다아시 본인도 이렇게 인정하지 않는가.
"나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편하게 대화하는 재주를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질이 악한 게 아니라, 표현이 서툰 거다. 내성적인 성격(I)에 높은 자존심이 결합되면, 남들 눈에는 영락없이 "오만함"으로 읽힌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있지 않나? 친해지면 진국인데, 처음에는 차갑고 건방져 보여서 오해받는 사람들.
토론 멤버 중 한 명이 무릎을 치며 경험담을 풀었다.
"와, 저도 회사에 그런 분 있었어요. 첫인상은 말투도 틱틱거리고 진짜 별로였거든요? 근데 사이드 프로젝트 같이 하면서 보니까 책임감이 장난 아닌 거예요. 그때 알았죠. 아, 이 사람은 오만한 게 아니라 그냥 말주변이 없는 거구나."
다아시와 똑같은 패턴이다. 첫인상으로 단정 짓고, 나중에 겪어보고 뒤집어지는 경험. 즉, 편견에서 시작한 장면이 해상도가 짙어지면서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다.
그렇다고 정말 다아시가 오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첫 번째 청혼 장면을 보자. 엘리자베스한테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 집안도 별로고, 장모님도 교양 없고, 내 격에 안 맞지만... 그래도 내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미치겠소."
이게 청혼인가, 아니면 선전포고인가. 대놓고 "내가 이렇게 격이 낮은 너를 좋아해 주는 거야"라는 뉘앙스가 뚝뚝 묻어난다. 이건 실드 불가다.
이 지점에서 토론의 한 멤버가 명언을 남겼다.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다(I'm OK, You're OK)'는 존중이지만, '나는 괜찮은데 너는 별로다(I'm OK, You're Not OK)'는 오만인 거죠."
명쾌했다. 다아시의 문제는 바로 이거다. 본인이 높은 건 사실이다. 돈도 많고, 집안도 좋고, 능력도 있다. 그건 명제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기준으로 상대방을 "너는 별로"라고 깎아내리는 순간, 그건 오만이 된다.
더 재밌는 건, 피해자인 척했던 엘리자베스도 오만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이것도 일종의 지적 오만이다. 자기 판단력에 대한 과신. 위컴 말만 듣고 다아시를 단정 지은 것도, 확인 한 번 안 해본 것도, 다 이 오만함에서 나온다.
책 제목《오만과 편견》이 절묘하다. 둘 다 오만했고, 둘 다 편견에 갇혀 있었다. 한쪽이 나쁜 놈인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저화질'로 보고 있었던 셈이다.
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은 처참하게 실패한다.
엘리자베스는 거절하면서 두 가지를 쏘아붙인다. 첫째, "당신이 내 언니 제인과 빙리를 떼어놓았잖아요." 둘째, "위컴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었으면서 무슨 낯으로 저한테 청혼해요?" 다아시는 충격을 받고 물러난다.
다음 날, 다아시는 긴 편지를 써서 엘리자베스에게 건넨다.
이 편지는 소설의 전환점이자, 엘리자베스의 세계관이 박살 나는 결정적 계기다.
편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빙리-제인 건. "제인의 표정이 너무 평온해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빙리가 상처받을까 봐 말린 겁니다. 만약 제 판단이 틀렸다면, 그건 전적으로 제 실수입니다."
둘째, 위컴 건. "위컴은 제 아버지의 유산을 받고도 방탕하게 탕진했습니다. 그리고 제 여동생 조지아나(당시 15세)를 유혹해 야반도주를 시도했습니다."
가문의 가장 치명적인 치부를 털어놓은 것이다.
이 편지에 대한 해석은 우리 토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핵심은 이거다. 다아시는 '해명'은 했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빙리 건에 대해서도 "내 판단 근거는 이랬다"고 소명할 뿐, "미안하다"는 말은 없다. 베넷 가족에 대한 날 선 비판도 철회하지 않는다. "당신 어머니와 동생들의 경박한 행동이 문제라고 생각한 건,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누군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 편지 좀 재수 없지 않아요? 팩트는 맞는데, 사과 한마디 없는 게 너무 다아시스럽달까."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요, 저는 오히려 이게 최고의 배려라고 봐요. 억지로 설득하려 들지 않잖아요. 감정에 호소하면서 '내가 잘못했어, 제발 믿어줘' 하고 매달리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만 딱 전달하고 판단은 상대방에게 온전히 맡기는 거니까요."
개인적으로 이 의견에 공감했다.
생각해 보면 다아시는 엘리자베스를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나를 다시 봐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 그냥 네가 오해하고 있는 사실관계가 있으니,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엘리자베스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거는 이 사람에 대한 어떤 면에서 보면 전적인 신뢰라고 보거든요. 상대방이 팩트를 보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우리가 갈등 상황에서 흔히 하는 실수가 있다. 상대방을 내 편으로 끌어오려고 감정에 호소하고, 설득하려 들고, 때로는 억지로 사과를 구걸한다. "너 왜 미안하다고 안 해?"
하지만 진심이 결여된 사과는 독이다. 억지 사과는 당장의 싸움을 멈출지는 몰라도, 관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다아시는 자기 소신을 꺾지 않았다. 베넷 가족에 대한 솔직한 시선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동시에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비굴해지지도, 공격하지도 않은 채 자기가 줄 수 있는 진실만을 건네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것이야말로 '지적 예의(Intellectual Courtesy)'가 아닐까.
"다아시가 멋있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소신을 끝까지 지키면서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편지를 받고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밀어붙였다면? 다아시는 지조 없이 굽히거나, 아니면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렸을 거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그러지 않았다. 편지를 읽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했다.
소설에서 엘리자베스가 편지를 읽고 나서 하는 말이 있다.
"Till this moment I never knew myself." "이 순간까지 나는 나 자신을 몰랐다."
이 소설의 명문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그러니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 첫 문장, "재산 꽤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보다 더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문장을 꼽을 것이다.
첫 문장이 소설의 문을 여는 재치 있는 농담이라면, 이 문장은 단단했던 한 인간의 껍질이 깨지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자기 판단력을 과신했던 사람이,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순간. 첫인상을 믿었던 자신, 위컴의 말만 듣고 다아시를 단죄했던 자신,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라고 자부했던 자신. 그 모든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성장한다.
다아시의 편지가 강력했던 이유는, 그게 "나 좀 봐줘"라는 지질한 호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진실을 던져놓고,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린 것. 설득하지 않는 것. 강요하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존중과 함께 건네는 것.
상대를 바꾸려 들지 않는 태도. 어쩌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가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한 직후, 친구 샬럿 루카스가 그 콜린스와 약혼한다.
엘리자베스는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랑?"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독자 입장에서도 당혹스럽다. 콜린스는 이 소설에서 가장 답답한 캐릭터 중 하나다. 말이 끝도 없이 많고, 후원자 캐서린 드 버그 자랑을 입에 달고 살며, 상대방 말은 듣지도 않는다. 청혼하면서도 "내가 결혼해 주겠다"는 태도다. 이런 남자랑 평생을 산다고?
그런데 토론에서 샬럿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샬럿이 그렇게 낮은 티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되게 현명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중요한 맥락이 나왔다. 샬럿의 나이. 소설에서 샬럿은 27살이다.
"27살이면 그 시대 기준으로 거의 45살이에요. 여성으로서."
당시 영국 사회에서 여성의 결혼 적령기는 16~18살이었다. 23살인 제인도 "슬슬 늦어지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샬럿은 27살. 예쁘지도 않고, 집안이 부자도 아니다. 결혼 시장에서 경쟁력이 거의 바닥인 상황이다.
이 시대 여성에게 결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직업을 가질 수 없고, 재산을 상속받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독립할 방법이 없다. 결혼하지 않으면? 평생 친정에 얹혀살면서 천덕꾸러기 노처녀로 늙어가는 거다.
샬럿이 콜린스를 선택한 건,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사랑 없는 결혼이지만, 안정적인 집과 생활을 얻은 거죠. 전략적인 선택이에요."
샬럿은 멍청하지 않다. 콜린스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안다. 그래서 결혼 후에 어떻게 하냐? 남편을 "수납"한다. 토론에서 누군가 이 표현을 썼는데,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나서 응접실도 큰 방으로 할 수 있는데, 본인은 일부러 뒤쪽 작은 방을 썼대요. 큰 방을 쓰면 남편이 거기 더 자주 올 것 같아서."
콜린스가 자기 방에 덜 오게 만드는 거다. 물리적으로 남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전략. 웃프지만 현실적이다. 샬럿은 환상이 없다.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통제한다. 그게 이 시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수도 있다.
토론 중에 이런 의견도 나왔다.
"샬럿 같은 성격이면 콜린스 같은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해도 괜찮지 않을까?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으니까."
일리가 있다. 반대로 엘리자베스 같은 성격이었다면? 콜린스랑 결혼했다가 미쳐버렸을 거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샬럿의 선택이 "현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시대의 제약 안에서다. 여성에게 선택지가 거의 없었던 시대. 사랑과 생존 사이에서 생존을 택해야 했던 시대. 샬럿은 그 제약 안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 최선이라는 게 "답답한 남편을 어떻게 피해 다닐까"인 거다.
제인 오스틴은 샬럿을 비난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가 처음에는 충격받지만, 나중에 샬럿 집에 방문해서 보니까 나름 잘 살고 있다. 평화롭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스틴은 그냥 보여준다. 이런 선택도 있다고. 이게 현실이라고.
토론이 여기서 자연스럽게 현대의 결혼 조건 이야기로 넘어갔다.
"연애와 결혼을 구분해서 조건을 보는 관점이 있잖아요. 연애할 때는 괜찮은데, 결혼은 다르다고."
"가정 배경이 진짜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님 노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솔직히 좀 힘들죠."
200년이 지났는데, 결혼과 조건의 문제는 여전하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흥미로운 건 이 토론이 "도덕적 딜레마" 이야기로까지 확장됐다는 거다. 누군가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 예시를 꺼냈다.
"주인공이 폐암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요. 가족한테 남겨줄 돈이 없어서, 화학 선생님 전공을 살려서 마약을 만들어 팔아요. 가족을 위해서요.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
테이블이 갈렸다. "가족을 위한 거니까 이해할 수 있다" vs "그래도 마약은 안 되지." 누군가는 "마약은 봐줄 수 있는데, 거기서 살인까지 가면 안 된다"고 했고, 누군가는 "애초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했다.
결론은 안 났다. 대신 이런 정리가 나왔다.
"도덕적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는지가 다 달라요."
샬럿의 선택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현명한 생존 전략"이고, 누군가에게는 "영혼을 판 거래"다. 정답은 없다. 다만 그 선택을 하게 만든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샬럿을 심판하지 않았다. 우리도 쉽게 심판할 수 없다. 그 시대에, 그 조건에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토론 후반부에 연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터졌다. 요즘 소개팅 시장에서 자주 보이는 '안티 패턴'에 대한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건, 그 패턴이 성별에 따라 묘하게 비대칭적이라는 거다.
"회피형 남자가 싫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근데 남자들은 회피형 여자가 싫다는 말 잘 안 해요. 대신 불안형 여자가 싫다고 하죠."
예를 들어, 여성들의 프로필에는 "회피형 남자 사절"이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반면 "불안형 남자 사절"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남성들 쪽은 어떨까? "불안형 여자는 힘들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회피형 여자 사절"은 드물다.
여자들은 "회피형 남자"를 경계하고, 남자들은 "불안형 여자"를 경계한다. 같은 현상을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는 거다.
왜 이런 비대칭이 생길까?
"근데 그거 서로가 만드는 거 아니에요? 여자가 남자를 회피형으로 만들고, 남자가 여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거."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남자가 감정 표현을 서툴게 하면, 여자는 불안해진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게 맞아?" 확인받고 싶어서 자꾸 묻고, 자꾸 확인하려 든다. 남자는 그게 부담스러워서 더 움츠러든다. 회피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더 불안해지고, 남자는 더 회피하고. 악순환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사사건건 감정적으로 몰아붙이면, 남자는 "뭘 해도 안 되겠네" 싶어서 입을 닫는다. 말해봤자 싸움이 되니까. 그러면 여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은 왜 대화가 안 되지?" 싶어지고. 결국 둘 다 지친다.
연애가 끝나면 여자는 "회피형 남자 지긋지긋해"가 되고, 남자는 "불안형 여자 힘들어"가 된다. 서로가 서로의 트라우마가 되는 셈이다.
왜 이런 악순환이 생기는 걸까?
칼 융의 이론을 빌려와 보자.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남성의 무의식 속에는 여성적 이미지(아니마)가, 여성의 무의식 속에는 남성적 이미지(아니무스)가 존재한다는 거다. 우리가 이성에게 끌릴 때, 사실 상대방 그 자체가 아니라 내 안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
쉽게 말하면 이렇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보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상대방"을 보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니마를—포용적이고, 감정적으로 지지해 주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이상적 여성상을—투사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아니무스를—주관이 뚜렷하고, 흔들리지 않고, 나를 이끌어주는 이상적 남성상을—투사한다.
문제는 상대방이 그 환상에 부합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왜 내 감정을 몰라줘?" "왜 그렇게 우유부단해?" 이런 불만의 이면에는 내가 투사한 이미지와 실제 상대방 사이의 괴리가 있다. 그 괴리를 못 견디고 상대방을 내 환상에 맞추려고 밀어붙일 때, 악순환이 시작된다.
융은 이 투사를 거두는 것이 성숙의 과정이라고 봤다. 상대방에게 투사한 환상을 거두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보는 것. 내 안의 아니마/아니무스를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통합하는 것. 그래야 비로소 상대방을 "내 환상의 스크린"이 아니라 "독립된 한 인간"으로 만날 수 있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이 악순환에 빠지지 않았다. 왜일까?
3장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둘 다 상대방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다아시는 편지에서 자기 입장을 솔직하게 전달하고, 판단은 엘리자베스에게 맡겼다. 엘리자베스도 "그래도 사과는 해야지"라고 밀어붙이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인정했다.
핵심은 이거라고 생각한다. 둘 다 상대방의 소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다아시가 거기서 굽혔으면, 지조 없는 사람이 된 거예요. 여자한테 맞춰주려고 자기 소신을 꺾는 사람. 그건 멋있는 게 아니잖아요."
동의한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주관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자기 소신이 뚜렷하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런데 정작 연애에서는 "왜 내 말을 안 들어?" "왜 내 기분을 안 맞춰줘?"라고 요구한다. 모순이다.
상대방의 소신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나도 내 소신을 지키는 것.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결국 성숙한 연애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 아닐까요.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지 않는 것."
토론 끝자락에 나온 말이다. 쓸데없는 자존심. 이게 뭘까?
"내가 먼저 연락하면 지는 거야." "내가 먼저 사과하면 약해 보여." "저 사람이 먼저 다가와야 해." 이런 것들이다. 상대방을 시험하고, 눈치 보고, 밀당하는 것. 다아시와 엘리자베스한테는 이런 게 없다.
다아시는 첫 번째 청혼에서 거절당하고, 창피하고 자존심 상했을 거다. 그래도 편지를 썼다. 자기 진심을 전달하는 게 체면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나중에 리디아 사건이 터졌을 때도, 뒤에서 돈 써가며 수습했다. 자기가 나서면 엘리자베스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까, 비밀로 해달라고까지 했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편지를 읽고 자기가 틀렸다는 걸 알았을 때, "그래도 저 사람이 먼저 무도회에서 그랬잖아"라고 버틸 수 있었다. 자존심 세우려면 얼마든지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솔직하게 인정했다.
성숙함이란 이런 것일까?
상대방을 내 입맛대로 바꾸려 들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동시에 나도 상대방한테 맞추려고 나를 버리지 않는 것. 둘 다 자기 자신으로 남으면서, 그래도 함께하는 것.
"맛집 갈 때 실패 없는 단골집만 가는 사람이 있고, 리스크 있어도 새로운 곳 뚫는 사람이 있잖아요. 연애도 비슷한 것 같아요."
나랑 100% 취향 맞는 사람. 나랑 100% 생각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은 편하다. 갈등이 없다. 그런데 그게 성장일까?
오히려 나랑 다른 사람, 이해 안 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편함을 견디면서 대화하고, 조율하고, 때로는 내가 틀렸음을 인정할 때. 그때 관계도 나도 확장되는 거 아닐까.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처음부터 잘 맞는 커플이 아니었다. 서로 오해하고, 상처 주고, 멀어졌다가, 다시 마주 보고, 인정하고, 변화했다. 이 둘의 결합에 몰입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 '과정의 서사' 때문이다.
토론을 정리하면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왔다.
"이 소설에서 정상인이 누구야?"
우리의 결론은 가디너 부부였다. 런던 Cheapside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빙리 누나 캐롤라인이 "저런 친척이 있으면 결혼 시장에서 마이너스"라고 코웃음 치던 인물들. 다아시조차 처음에는 그들의 존재를 엘리자베스의 "약점"으로 봤다.
그런데 소설이 끝날 때쯤, 다아시는 가디너 부부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 펨벌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들을 "people of fashion", 상류층으로 착각했다. 그만큼 품위가 있었다는 거다. 장사꾼이라는 선입견과 실제 인물 사이의 괴리.
제인 오스틴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가디너 부부에게 할애한다.
"가디너 부부와는 늘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다아시도 엘리자베스도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했고, 더비셔로 데려와 준 사람들에게 늘 깊은 감사를 느꼈다."
200년 전 소설의 마지막이 화려한 결혼식도, 로맨틱한 고백도 아니다. "장사꾼" 부부에 대한 감사다. 이게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높은 교육받은 사람들이 가장 오만하고, 가장 낮은 신분인 사람들이 가장 품위 있어요. 역설이죠."
캐서린 드 버그를 보자. 귀족이다. 최고급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어떤가? 남의 일에 참견하고, 자기 의견이 곧 진리라고 생각하고, 엘리자베스한테 "신분이 낮은 주제에 다아시한테 눈독 들이지 마라"고 협박까지 한다. 교양의 끝판왕인데, 품위는 바닥이다.
빙리 누나들도 마찬가지다. 런던 사교계의 세련됨을 갖췄지만, 속은 속물이다. 제인한테 친한 척하다가 쓸모없어지니까 칼같이 자른다. 가디너 부부가 사는 동네를 "냄새나는 곳"처럼 취급하면서, 정작 본인들 집안도 한 세대 전만 해도 장사로 돈 번 집안이다.
반면 가디너 부부는 어떤가?
분별력 있다. 제인이 상처받았을 때 런던으로 데려와서 돌봐준다. 엘리자베스한테 위컴 조심하라고 조언한다. 리디아 사건이 터졌을 때, 가디너 씨가 직접 발 벗고 나서서 수습한다. 무책임하게 서재에 틀어박혀 있던 베넷 씨 대신.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어른 노릇"을 하는 인물들이다.
스펙이 좋다고 좋은 사람이 아니다. 교양이 있다고 품위가 있는 게 아니다. 200년 전에 제인 오스틴이 던진 메시지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 시대에도 똑같은 착각이 있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높은 연봉. 이런 스펙이 곧 그 사람의 가치라는 착각. "저 사람은 어디 출신이니까 괜찮겠지."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니까 믿을 만하겠지."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면? 스펙과 인성은 별개인 경우가 허다하다.
누군가 말했다.
"스펙이 곧 실력이 아니고, 지표화될 수 있는 것과 지표화될 수 없는 것의 차이가 분명히 있어요."
경력 10년 차라고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명문대 나왔다고 판단력이 좋은 게 아니다. 반대로 이력서에 한 줄도 안 되는 사람이 놀라운 통찰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가디너 부부처럼.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을 볼 때 무엇을 보느냐는 거다.
조건을 보는가, 사람을 보는가. 스펙을 보는가, 품성을 보는가. 첫인상을 보는가, 행동의 축적을 보는가.
엘리자베스는 처음에 조건과 첫인상에 속았다. 다아시는 "오만한 부자"로 보였고, 위컴은 "매력적인 피해자"로 보였다. 둘 다 틀렸다. 시간이 지나고, 행동이 쌓이면서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
다아시의 진짜 모습은 화려한 무도회에서가 아니라, 리디아 사건을 뒤에서 수습할 때 드러났다. 위컴의 진짜 모습은 매력적인 첫 만남에서가 아니라, 돈 많은 여자가 나타나자마자 갈아타는 순간 드러났다.
"행동이 쌓여야 사람이 보인다."
이게 이 소설이 200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인 것 같다. 인간에 대한 통찰이 시대를 초월한다. 오만과 편견, 첫인상의 함정, 스펙과 품성의 괴리. 1813년이나 2025년이나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같은 착각에 빠지고, 같은 후회를 한다.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누군가 던진 말이 계속 맴돈다.
"좋은 관계란 서로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 같아요."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 내 상식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편하다. 하지만 거기엔 성장이 없다. 그건 관계가 아니라 '자아의 반복'일뿐이다.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도저히 이해 안 되는 타인을 견디며 조율해 나갈 때, 비로소 나의 세계는 상대방의 우주만큼 넓어진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이 위대한 건, 그들이 서로에게 '가장 불편한 거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200년 전의 이 소설이 묻는다. 당신은 편안한 고인 물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불편함을 견디며 바다로 나아갈 것인가.
그렇게 치열하게 부딪히고 깨지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가디너 부부처럼 넉넉한 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그들처럼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이 '멀쩡한 어른'이며, 스펙과 허세를 거두고 사람의 향기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성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