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달래준 달달한 그대
김치 같은 거 필요 없어.
난 여행자가 아니니까.
처음엔 그랬다. '난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니까, 한국음식쯤이야 안 먹어도 돼.' 평소 김치도 안 먹고 양식을 더 좋아했던 나. 이런 묘한 자신감이 자만으로 흘러갈 무렵, 뜬금없이 습격을 받았다.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였다면 차라리 짠하기라도 할 텐데, 일 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약과'가 엄청 먹고 싶어 졌다. 기억도 잘 안나는 약과의 향까지 더듬어 보고 심지어 '약과 만드는 법'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약과 생각에 시름시름 앓고 있던 중, 때마침 아프리카로 신혼여행을 온다는 동생네에게 부탁해 약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난 진짜 이상한 시누이였다. 허니문을 오는데 약과 심부름이라니.
'향수병'은 생각만 해도 목이 매이는 아련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막역한 허기짐으로 오니 참 당황스러웠다. 특히 옛스러운 맛이 당겼다. 약과, 한과, 강정, 식혜, 다식… 나도 몰랐다. 내 마음 한구석, 이토록 한국 사람인 줄. 게다가 완전 할머니 입맛.
처음엔 그저 달달한 게 당긴 건 아니었을까 하고 다른 주전부리에 열을 올렸다. 탄자니아에는 한국에서 못 먹어봤던 남아공, 아랍에미레이트, 영국 등지에서 온 수입 과자들이 많아 고르는 재미도 있었다. 초콜릿을 바른 과자도, 넣은 과자도, 섞은 과자도 먹었다. 하지만 내 향수병은 영 가시질 않았다.
동생네가 가져다준 약과의 맛을 잊지 못하고 향수병에 퉁실퉁실 살만 찌우던 어느 날, 습관적으로 가던 과자 코너에 무언가 눈에 띄었다. 엽서 만한 크기에 두께는 0.5센티미터, 투명한 플라스틱 봉지에 싸인 네모난 황토색 물체. 혹시 내가 아는 그것이 맞을까? 혹시 타일은 아니겠지? 라며 하나를 집어 보니 이런…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깨가 촘촘하게 박힌 넓적한 '깨강정'이었다. 그래도 확인차 가정부에게 먹는 것 맞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한다. 인도 사람들의 간식이란다. 탄자니아에는 인도 사람들도 많이 살아 알록달록한 향신료, 오일, 대추야자 등을 아루샤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인도 사람들도 깨강정을 만든다니.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와서 투명한 봉지를 찢으니 고소한 냄새가 난다. 떡집을 지나 칠 때 은은히 났던, 비빔밥을 먹을 때 빠지면 안 되는 그 냄새. 참기름이 다 떨어져 한동안 잊었던 그 냄새다. 손으로 마구 뿌신다음 한 조각을 먹었다. 아, 반갑다. 눈물 나게.... 정신 차려 보니 어느덧 한판을 다 먹었다. 두 개 사 오길 참 잘했다.
인도 깨강정을 발견한 다음부터 나의 할머니 입맛이 발동될 때면 지체 없이 깨강정을 사러 나갔다. 아루샤에서 파는 깨강정 브랜드는 서너 개 정도 되는데 맛은 대부분 비슷하다. 한국 깨강정보다는 단맛이 진하고 더 뻑뻑하다. 엽서만 한 크기가 2000 탄자니아 실링, 한국돈으로 1000원도 안된다. 간혹 땅콩으로 만든 편편한 강정도 있다.
포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그냥 투명한 비닐에 깨강정을 넣어 파는데, 허접해 보여도 종이 라벨에 브랜드명, 전화번호, 그리고 유통기한까지 있다. 탄자니아 가게에는 어떤 물건이든 악성 재고가 많은 편이니 유통기한을 꼭 확인하고 사는 것이 좋다. 나는 큰 슈퍼마켓보다는 작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을 선호한다. 작은 가게는 소량으로 들여놓고 빨리 팔고 또 물건을 받아오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넉넉하게 남은 게 많다. 유통기한을 확인한 후엔 ‘두께’를 확인해야 한다. 탄자니아는 아직 표준화, 정량화 개념이 없다. 깨강정의 브랜드, 크기, 유통기한이 똑같아도 두께가 두배나 차이나기도 한다. 어차피 같은 가격이니 두꺼운 걸 고르는 게 남는 거다.
참깨의 원산지는 인도 혹은 아프리카라고 한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영국인들은 또 다른 식민지인 탄자니아의 현지인 관리를 위해 인도 사람들을 탄자니아로 보냈다. 본국에서 지배받은 것도 서러운데 타국에 강제로 보내진 인도 사람들, 위로는 영국인들에게 구박받고 아래로는 말 안 듣는 현지인들을 상대했다. 고향과 똑같이 생긴 참깨가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인도 사람들도 나처럼 잠시나마 기뻤을까?
커버 이미지 : 카라투 근처 @2015
큰 이미지 1: 사키나 슈퍼마켓에 진열된 깨강정 @2016
작은 이미지 1~3 : 향수병을 달래주는 깨강정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