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 Sep 26. 2016

위대한 대이동의 마지막 후예들

경이로운 누우떼의 여정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잖아?


맞는 말이다. 동물은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다. 사자도 기린도 코끼리도 그리고 희귀한 코뿔소도 내가 원할때에 몇시간이고 볼 수 있다. 오는데 이틀이나 걸리는 지겨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고, 덜컹덜컹 낡은 차에서 엉치뼈를 부딫히며 7시간을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렝게티에 가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야생에 살고 있는 사자가 진짜 사자다, 우리에 갇힌 사자는 사자가 아니다...라며 동물원의 생명을 폄하하고 싶진 않다. 대신 "못생긴 누우를 보러 오세요" 라고 하고 싶다.


이목구비가 자유분방한 누우의 얼굴. @2015 세렝게티 그루메티 지역.


애호박처럼 긴 얼굴, 툭 튀어 나온 작은 눈, 애매하게 달린 턱수염. 세렝게티에서 '못친소 페스티발'을 연다면 단연 1등을 차지 할 누우. 조물주가 모든 동물을 만들고 남은 것만 대충 붙여서 만들었다는 굴욕적인 소리를 들을 정도로 누우는 정말 못생겼다. 못생기면 귀엽기라도 하지.. 애석하게도 누우는 날때부터 ‘노안’이라 모든 새끼는 귀엽다는 명제도 무자비하게 뒤집어 버린다.


못생긴 누우들은 꼭 시끄럽게 떼로 움직인다. 너무 겁이 많기 때문이다. 초식동물들은 원래 겁이 많지만 누우는 좀 심하다. 물을 먹으러 강가로 내려올때를 보면 정말 별의 별 생쑈를 다한다.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서 물에 뛰어들어야 하는 펭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펭귄 무리 중 가장 먼저 용감하게 뛰어드는 한마리를 ‘퍼스트 펭귄’이라고 한다. 퍼스트 펭귄은 ‘개척자’ 혹은 ‘선구자’의 상징으로 쓰인다.


강까지 1미터를 앞두고 한시간 반쯤 서성거렸던 누우떼들. 그것도 이상한 구석탱이로와서 물을 마셨다. @2015 그루메티강.


하지만 누우는 ‘내가 지금 첫번째 아니지?’ ‘아놔, 무서운데 밀지마’ 이러면서 물가로 온다. 쭈삣쭈삣 1cm 씩 천천히 내려간다. 보고 있노라면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가 누군가 재채기를 하거나 째째파리에 물려 움찔 하면, 자기들끼리 깜짝 놀라 ‘웨웅! 웨웅!’ ‘우워엉’ 괴상한 소리로 울부 짖으며 십리 밖으로 도망을 친다. 그리고 다시 물가로 오기까지는 최소 몇시간, 어쩔때는 하루를 넘기기도 한다.


이런 겁쟁이들이 매년 위험을 무릅쓰고 1000km를 이동한다. 듬성듬성 수염을 달고 휘청휘청 걷는 이들이 바로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이그레이션의 주인공이다. 누우떼가 이 기나긴 여정을 견뎌야 비로소 다른 동물들이 산다. 그들이 늦게 오면 사자의 새끼는 죽고 악어는 굶주린다. 제때 풀을 뜯지 않으면 벌레가 많아져 다른 초식동물이 찾지 않아 땅의 순환이 멈춘다.


누우가 풀을 뜯으러 한걸음을 앞으로 간다. 풀을 한웅큼 씹고 또 한걸음 내딛는다. 넘어지지만 않아도 다행일 법 한 얇은 다리로 풀을 따라 천천히 걷는 하루. 1년 내내 이어지는 이 걸음이 거대한 세렝게티를 숨쉬게 한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누우의 한걸음, 또 한걸음. @2015 세렝게티 코가텐데 열기구 위에서.




한국을 떠나기 전만 해도 ‘엄친아’와 ‘엄친딸’과 각개전투만 벌이면 됐었는데, 요즘 나온 ‘금수저’는 아예 의지를 잃게 만든다. 나를 한없이 평범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그들. 세상엔 금수저 보다 금수저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다. 화려하지 않은, 그저 그런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사람도 흔하다. 많고 흔하면 보잘것 없는걸까.


세렝게티의 위대한 대이동을 함께하는 누우는 무려 120만마리나 된다. 오늘 한마리쯤 없어진다고 해서 티가 나지도 않는다. 어쩌면 누우는 대장정에 나설 생각도, 세렝게티 생태계를 책임지려는 생각도 없었을지 모른다. 오늘 하루 맛있는 초록색 풀을 먹고 맑은 물을 마음껏 마시려고 걸었을거다. 그저 풀과 물을 찾는 소박한 하루가 모여 장관을 이루는 위대한 대이동이 되었다.  

 

세렝게티에 온다면 꼭 못생긴 누우떼의 그 하루를 봤으면 좋겠다. 매년 새롭게 쓰여지는 야생의 서사시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도 그렇게 소소하지만 각자의 역사를 쓰며 경이롭게 산다고 말해주고 싶다.


커버 이미지 : 푸른 초원으로 다시 돌아온 누우떼 @2016 세렝게티와 응고롱고로 경계 부근.

매거진의 이전글 그가 말한 '진정한 노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