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39구간은 다섯 개봉(깃대봉, 월출봉, 형제봉, 도솔봉, 따리봉)을 넘어야 했는데 어디서 점심을 먹냐는 문제로 의견이 갈렸다. J삼촌은 도솔봉까지 쭉 빼고 마음 편하게 먹자고 했고, 임선배는 가다가 배고파 죽는다고 오늘은 일찍 출발했으니 밥도 일찍 먹자고 했다.
나야 당연히 빨리 먹자는 쪽이었다. 평상시에는 8시쯤 시작하는 산행을 7시에 하려고 버스도 한 시간 일찍 출발했다. 18 킬로미터의 만만치 않은 거리를 더운 날씨(7월)에 해야 해서다. 천만다행으로 형제봉을 넘고는 자리를 폈다. 박대장은 자장라면을 끓였고 현님은 (언제나처럼) 사발면, 을씨는 (웬일로) 김밥을 (싸온 게 아니라) 사 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당당하게 무언가를 꺼냈는데, 그건 바로 밴댕이 젓갈. 내가 싸 온 호박잎을 강된장 대신에 밴댕이 젓갈을 넣고 싸 먹었다.
“우와, 젓갈인데 싱싱해요.”
밴댕이 젓갈은 처음이었다.
전라도에 사는 12년 동안 맛있는 음식을 많이도 먹었다. 대구에서 안 먹어봤던 음식일 텐데 괜찮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전라도 남자는 몰라도 음식은 나와 찰떡궁합이다. 싱싱한 바지락을 회 무침을 해서 먹거나 전어회나 대하, 주꾸미 같은 제철 해산물을 먹는 게 좋았다. 나는 게장과 굴 무침을 원래 좋아했었는데, 대구에서 먹은 건 양념 맛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는 바다 향과 재료 본연의 향이 물씬 나는 게 차원이 달랐다.
나는 고구마순 김치에도 사족을 못쓴다. 고구마순 김치는 대구에서는 본 적이 없었다. 먹는 사람이 있는지 몰라도 내가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는 걸로 봐서 전라도처럼 흔하게 먹지는 않는 것 같다. 뻘게를 다져서 만든 게장을 넣고 고구마순 김치와 밥을 비벼서 처음 먹어 본 그 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짭조름한데 짜기만 한 건 아니고, 달큼함이 도는. 아무튼 생각만 해도 군침이 고인다.
산행기에 노상 힘들었다는 얘기만 쓰는 것 같아서(진짜 힘들지만) 자연 얘기도 좀 쓰고 역사 얘기도 쓰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일단 생각만 그렇게 하고 먹는 얘기부터 쓰기로 했다. 등산에서 무엇을 먹느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슈이기 때문이다. 산행 중에 먹는 음식은 물론 올라가기 전과 후까지도.
이번 39구간은 힘들 거라는 얘기를 한 달 전부터 들은 터라 진작에 마음을 비웠고, 아침으로 ‘앙버터 몽땅’을 먹었다. 빵 위에 버터, 버터 위에 팥이 있는 그야말로 ‘칼로리 몽땅’인 빵인데, 오늘만은 이걸 먹는데 일말의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4시 30분에 출발하는 차를 타기 위해 3시 30분에 일어나면 잠이 모자라서 입맛도 없다. 그래서 전에는 대충 떡 한 조각이나 계란 한 두 개나 먹었는데, 그러면 산행 초반에 현기증이 나고 힘이 쭉쭉 빠져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버터의 힘 덕분인지 어렵지 않게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그새 산행 실력이 좋아졌는지도).
마음가짐이 이리도 중요한 것일까? 지리산 무박종주를 한다고 생각하자며 길을 나섰는데, 날씨도 선선하고 길도 (편할 리는 없지만) 생각보다는 오를만했다. 도솔봉 데크에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지만 장하게도 다시 힘을 끌어모아 따리봉을 향했고, 한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여기까지 구간 끝이지만, 차 있는 곳까지 걸어야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안 나왔다. 그 거리가 족히 3킬로미터는 되었는데, 그래도 가야 했다. 훈제오리와 얼음맥주를 만나기로 해서다. 임도를 하염없이 가야 했지만 백운산 계곡의 물소리는 듣기 좋았다. 도착해서는 계곡물에 몸을 담갔는데, 물이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8시간 넘게 땀에 절은 몸을 씻고 나서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한 번의 등산으로 상반된 감정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이런 극명한 차이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모자란 잠 때문에 피곤했는데도 이른 아침 산의 신선한 기운과 야생화 향기가 좋았고, 5개 봉을 오를 때마다 사서 고생한다며 자책을 하다가도 끝나고 나면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마음이 생겨버린다. 힘들지만 하고 싶고 싫지만 좋은. 아무튼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