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광부와 부엉이

by 김준정

11시간이면 인천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갈 수 있다. 한 시간을 더 보태면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날아가서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레스토랑을 찾아볼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간 곳은 강원도.


태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데, 군산에서는 340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 숫자는 의미가 없다. 얼마나 먼 거리인지 내 몸의 세포 하나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강원도 찰옥수수만 봐도 아니 어쩌다 정선 아리랑을 듣기만 해도 ‘강원도는 먼 곳이야, 알지?’라고 몸이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일단 가는 데 5시간 30분, 박대장은 차에 타면서부터 책을 펼쳐 들었다. <차이 나는 클래스>라는 책인데 버스 안에 불을 껐을 때는 헤드 랜턴까지 쓰고 읽었다. 그 모습은 흡사 광부를 연상시켰다. 어두운 탄광(관광버스)에서 지식이라는 석탄을 채굴하는 과묵한 광부.


그가 처음부터 광부였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종주팀(산악회 이름) 처음 왔을 때부터 마스코트가 된 지금까지 차에서 항상 책을 읽었다. 2년 전 처음 들고 간 책이 아마도 <호모 데우스>인 걸로 기억하는데, 물리적으로 갇힌 상태에서 집중해서 읽을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야만 완독 할 수 있는 책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대장도 책을 갖고 오기는 했는데, 펼쳐 들기가 멋쩍어서 못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심약하게시리. 그런데 내가 늠름하게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었던 것이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책에 레이저를 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앗, 이를 방해하는 강력한 이가 있었다. 바로 아부지. 아부지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리 버스를 오래 타도 절대 자는 법이 없었다. 끊임없이 말을 하는데, 신기한 건 듣는 사람이 없어도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통로를 사이에 박대장과 아부지가 있었다. 마침 나는 이를 관전하기 좋은 자리에 있었다.


“나 태백산 숱하게 왔어. 그래도 오는 거여.”(특유의 리듬을 살려서) 아부지가 시작했다.

“…”

일단 못 들은 척 선방을 하는 박대장. 아부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호응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이 별 것 있어? 친구들은 간디 뭐더러 가냐고 해쌌는디, 그럼 뭣혀? 늙었다고 가만 엎드려 있으라고? 이렇게 돌아다니고 해야 사는 것이제.”

그리고 쐐기를 박는 한마디. “안 그려?”

이쯤 되면 대답 안 할 도리가 없다.

“아, 그렇죠. 하하하.”

박대장의 공허한 웃음이 버스 안에서 흩어졌다.


휴게소는 화장실을 가거나 간단히 요기를 하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휴게소를 애용하는 이가 있다. 숙여사는 휴게소 쇼핑을 즐기는데, 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그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그곳에서 볼 수 있다. 모자를 이것저것 써보고 냉장고 바지를 받쳐보며 포즈를 취하는 그녀에게 휴게소는 백화점이고 런웨이였다. 어느새 모자 두 개, 냉장고 바지 세벌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다.


숙여사의 쇼핑 목록 1위는 부엉이다. 나는 휴게소에 부엉이를 파는 것도 몰랐고, 알고 난후에도 이런 걸 누가 사나 싶었다. 그런데 숙여사가 부엉이들을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금 돈나무에 올라앉은 부엉이, 학사모 박사 부엉이, 그네를 타고 있는 부엉이, 빈티지 화이트 부엉이. 실로 종류도 다양했다.


차에 돌아갔더니 한선배(숙여사 남편)가 있길래 “언니 쇼핑 중이에요.” 했더니 대번에 "부엉이 보고 있지?"라고 했다.


취향이 같은 부부는 얼마쯤 될까를 생각했다.

이번에는 휴게소를 네 곳이나 들렀지만, 가는 곳마다 부엉이가 없었다.

“이상하다. 전에는 오창 휴게소에 부엉이가 있었는데…”

아쉬움 가득한 숙여사 얼굴 뒤로 무심한 한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호박잎에는 밴댕이 젓갈